유다 지파의 소명, 파스카 과업
창세 49,1-2.8-10; 마태 1,1-17/ 대림 제3주간 화요일; 2024.12.17.
성탄을 9일 앞두고 오늘부터 대림시기는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미사의 본기도에서는 임박한 성탄에 담긴 강생의 신비를 받아 들이라는 절박한 지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본기도) 우리가 성탄을 통해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인데, 이는 오늘 독서에서 소개하는 유다 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이 실현된 경로를 나타냅니다. 열두 아들 중에서 유독 유다가 족장이 된 지파의 족보가 소개된 까닭은, 야곱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장자 축복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 배출의 축복을 허락하고, 또 실제로 그 지파에서 다윗이 배출되었고 그 다음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나왔으며, 이 요셉이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된 마리아와 정혼함으로써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지만, 그때 이미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며 유다 지파 소속인 요셉과 정혼하여 혼인까지 한 상태였으므로 법적으로는 요셉을 따라 다윗의 후손이자 유다 지파 소속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분께서 세상의 왕손 혈통까지 거머쥐신 셈입니다. 이것이 마태오가 복음서 첫 머리에 족보를 소개함으로써 후세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다인 출신들에게 강조하고자 했던 메시지였습니다. 공생활 동안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골뜨기 취급을 받고 얼치기 예언자로 천대받았던 스승의 한을 풀어보려는 듯, 마태오는 자기 스승의 숨은 진실을 족보로 드러내고 그 다음에는 천사의 방문을 알림으로써 탄생의 비밀까지 공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품위를 회복하는 한편,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야곱의 축복에 충실하셨다는 점이고, 이는 야곱이 원조 인간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저질렀을 때 인류가 원죄에서 벗어나도록 구세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창세 3,15 참조)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 좌절될 뻔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이 충실하고 용감한 여인들, 즉 타마르, 라합, 룻, 우라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 개입하시어 메시아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에 대한 개입 이어 결정적인 개입은, 동정의 몸이었지만 야곱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구세주가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신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던 당시 요셉은 족보상으로만 그럴싸한 왕족 혈통일 뿐 변방 갈릴래아에서도 외진 나자렛 촌구석의 이름없는 목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마태오는 흩어진 유다 지파 사람들을 찾아 족보를 재구성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 열두 지파 체제는 바빌론 유배 이후 거의 무너져버려서 레위 지파와 벤야민 지파 외에는 거의 흩어지고 혼혈로 무너져서 겨우 이름만 남아있던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지파 체제가 무너지면서 지파 구성에 담겨 있었던 야곱의 뜻이나,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추진하시려던 파스카 과업도 그 명성이 희미해졌습니다.
천 년 전 다윗의 대까지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었습니다. 다윗이 열두 지파를 결속시킬 왕으로서 추대될 수 있었고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선택까지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윗이 지녔던 파스카 의식이 투철했었음을 들어야 합니다. 겨우 돌팔매질로 철제 무기로 무장한 골리앗을 쳐부수었다는 신화는 파스카 의식으로 무장한 다윗 무리가 블레셋 부족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을 압도할 만큼 정신 전력이 왕성했었다는 표지입니다. 군사적인 정신 전력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를 탈출시키고 해방시키신 데 이어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로 정착시키신 역사를 이어서, 열두 판관을 거쳐,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결사체를 이룩할 구심점이 바로 다윗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과 맺으신 약속이 있습니다. 이른바 시온 계약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유다 왕실을 굳건하게 보호해 주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인 것이었는데, 하도 당연한 내용이라 전제로 숨겨진 이 보호의 조건은 다윗과 유다 왕실이 파스카 과업을 차질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온 계약은 파스카를 내용으로 한 시나이 계약의 실무 계약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대에 융성하는 듯하더니 곧 우상숭배와 내분에 말려들어가 왕국이 분열되고 지파가 갈라지더니 급기야 강대국들에 짓밟혀 다시금 종살이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수백 년이 흐른 뒤 구세주께서 오시고 나서야 파스카 과업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 이후 자그만치 천 년만입니다.
파스카 과업이 예수님께서 본 궤도에 올리신 첫 발언은 나자렛 회당에서 행하신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마태오가 어렵사리 취재하고 소개한 족보가 드디어 빛을 발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후손’이라는 역사적 순서를 뒤바꾸어서, ‘다윗의 후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이 소개한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편적으로 하느님을 믿은 첫 조상이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는 해도 다윗이야말로 역사에서 파스카 과업을 계승한 뛰어난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의 파스카 의식을 본격적으로 실현할 인물로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명을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여 공개적으로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연이 지난 백 년 동안 역대 교황들이 확립해 놓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의 성서적 배경입니다.
이 명제는 파스카 과업의 표현입니다. 역사를 이어서 보편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엑소더스 사명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빈곤으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파스카 과업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다움을 자기 정체성으로 드러내기 위한 필수 항목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향후의 역사에서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이 명제 수행을 통해 역사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파스카 과업을 시작하는 고리인 이 명제가 성체성사의 생명이며 파스카 성삼일 전례가 겨냥하는 목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맞이해야 하는 이유는 구세주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이 전달되는 통로는 전례이며 또한 성체성사입니다.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과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파스카 과업이 실현되리라는 맏음이 필요합니다. 야곱의 축복 이후 천 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메시아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 개입하신 하느님께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에도 교회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