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39대 미국 대통령...평화와 인권을 위한 헌신의 아이콘
1924년 10월 1일 조지아 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난 미국의 39대 대통령이다.
"미국 국민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카터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직 땅콩 농부로서 자신의 배경을 내세우며 정치에 입문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베트남 징집 회피자들을 사면하고,
기후 변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첫 번째 미국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국제적 업적 중 하나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을 중재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 인질 사태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같은
외교적 위기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단 여섯 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카터는 평화, 환경 보호, 인권을 위한 헌신으로 명성을 회복하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대통령으로, 2024년 10월 100세 생일을 맞이했다.
마지막 19개월은 호스피스 돌봄을 받으며 지냈다.
(어린 시절과 배경)
카터는 네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땅콩 농장 운영자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그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카터는 고등학교 시절 농구 스타였고, 미 해군에서 7년 동안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다.
전역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농장을 운영했다.
(정치 경력)
카터는 정치에 입문하여 지역 학교 및 도서관 위원회에 선출된 후, 조지아 주 상원의원에 출마니다.
그는 민권 운동가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1970년 조지아 주지사로 취임한 후 "인종 차별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을 하며
민권 문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의 취임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을 의사당 벽에 걸면서
민권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나타냈다.
(대통령 재임)
1974년 대선 캠페인에서 카터는 워싱턴 정계의 부패와 비윤리성을 비판하며
평범한 땅콩 농부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는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마음속에서 여러 번 간음한 적이 있다"고 인정해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의 과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초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원 중 4%만 그를 지지했으나,
그는 제럴드 포드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취임 첫날, 그는 베트남 징집 회피자들을 사면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공화당의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카터는 여성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고,
로절린 카터가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성 차별에 대한 헌법 수정안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국제적 리더십)
카터는 기후 변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첫 국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백악관에서 에너지 절약을 위해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난방을 줄였다.
그는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으나, 이는 후에 철거되었다.
그의 재임 중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중동 정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란 혁명과 미국인 인질 사태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재선 실패와 퇴임 후 활동)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에드워드 케네디와의 민주당 후보 지명 경합에서 승리했지만,
본선에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인질 석방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란 측은 인질들이 떠나는 시간을 레이건 취임식 이후로 지연시켰다.
퇴임 후 카터는 북한으로 평화 임무를 떠나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며 국제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소박한 삶과 자원봉사)
퇴임 후, 카터는 소박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수익성이 높은 강연이나 기업 이사회 참여를 거부하며 조지아 플레인스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다.
2015년에는 암 진단을 받았으나,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와 함께 자원봉사자로서 주택 건설에 참여했다
2025년 1월 국장이 끝난 후 카터 전 대통령의 유해는 대통령 전용기로
고향인 플레인스로 옮겨졌다.
이후 생전에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던 교회에서 장례 예배가 열렸으며,
가족 묘역에 안장돼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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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나이로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가장 겸허했던 대통령으로 불린다.
퇴임 후에도 돈 벌 기회가 숱했지만
모두 사절하고 방 두 칸짜리 집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집 시세는 22만3000달러, 환율 1470원대를 적용해도
불과 3억원 남짓. 그마저도 국립공원관리청에 기부하고 갔다.
후임자들과 같은 욕심을 피했다.
사업가 친구들의 전용기를 마다하고
여객기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고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땅콩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77년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백악관 주인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 뒤엔
군소리 없이 짐을 챙겨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임기 후에 따르는 정치적 부(富) 챙기기를 거부하고
참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강연이나 기업 컨설팅을 해주며 떼돈을 벌려 하지 않았다.
대기업 고문 등 통과의례처럼 주어지는
제의들도 모두 고사했다.
땅콩 사업 재정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100만달러 빚을 지고 있었다.
곧바로 사업을 처분하고 가계 회복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제의 책 33권을 출간해 빚 갚는 데 보탰다.
전직 대통령 연금 21만700달러도 쏟아부었다.
자신을 거물로 여기지 않았다.
거물인 양하는 사람도 싫어했다.
세금으로 충당되는
전직 대통령 연금, 경호 비용, 기타 경비를 최대한 절약했다.
클린턴 127만, 조지 W 부시 121만, 오바마 118만, 트럼프 104만 달러에 비해
연간 49만6000달러로 줄였다.
그는 돈을 좇지 않는 자신에 대해 “그게 뭐 잘못된 거냐”며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탓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77년간 해로했던 아내 로잘린 여사가 2023년 11월 먼저 묻힌
고향 마을 연못 가장자리 버드나무 옆 묘소에 나란히 눕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