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 김태형 둘까지는 어쨌든 의지대로 이어갈 수 있다 셋을 셌다면 아래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고 있을 것이다 거꾸로 세지 않는 것은 거꾸로 셀 필요가 없으므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숫자들을 지울 수가 있다 침을 삼키고 넷까지 지나왔다면 다섯이라고 머릿속에 숫자를 세고 애써 여섯을 발음하는 동안 눈이 어두워 멀리 가지 못한 양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무리는 그저 검은색일 뿐이다 절벽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는 한 줄기 빛처럼 한 마리씩만 끌어내려서 무사히 계곡을 건너오게 해야 한다 일곱까지 세면서 여덟까지도 쉽게 셀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홉 번째 양은 사라지고 없다 여덟 번째 양을 놓치고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았어도 처음부터 다시 세야 한다 거기까지 세었다면 굳이 아홉까지 셀 이유가 없을 테지만 아홉까지 와서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듯이 고작 열 마리뿐인데도 다 세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어쩌다 처음부터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어도 마지막 열 번째 양이 또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머릿수를 세고 네 다리를 세어 보고 꼬리까지 세어 봐야 한다 한 마리 양이 없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 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 —시집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청색종이, 2024.12.31) ----------------------
* 김태형 시인 1971년 서울 출생. 고려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현대시세계》 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코끼리 주파수』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등 산문집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엣세이 최승희』 『국경마을 투루툭』 등. 현재 『청색종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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