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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기억하는 이승만ㆍ박정희 대통령 시대
우리 동창들의 대다수는 1942년 9월 1일부터 1943년 8월 31일 사이에 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1주년이 막 지난 1949년 9월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휴전 2주년이 채 되지 않은 1955년 4월에 중학교, 그리고 4.19 1주년이며 5.16 한 달 전인 1961년 4월에 대학에 진학하였다.
즉,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 시대(1948-1960)에 초ㆍ중ㆍ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1961-1979)에 대학과정을 이수하고 병역의무를 필한 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훗날 세계가 찬탄하는 ‘한강의 기적’이 개시된 1970년대에 30대의 청년으로 국내에서 해외에서 정신없이 뛰었다.
근래 신문과 텔레비젼에서 우리들이 자랐고 열심히 살았던 시대의 통치자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대통령을 언급할 때 반드시(!) ‘독재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정치인ㆍ언론인ㆍ교수들을 자주 본다. 그런 소리를 듣고 “우리가 살았던 그 시대에 강요된 ‘독재’의 구체적 사례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났다.
‘독재’의 근거를 발견하려고 우리가 자라고 성숙했던 시대를 회고해 보니, ‘독재’라는 단어의 상식적 의미에 부합하는 ‘독재 통치’의 폐해와 고통을 딱 부러지게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 시대에 살면서 전혀 몰랐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역사적 의미’를, 몇 가지 사실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 동창들 모두가 기억하는 ‘우리시대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의 자세한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통과한 시대의 평범한 역사적 사실들이지만,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뒷 세대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 관념으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느껴질 수 있을 듯하다. (용어들을 현대식으로 바꾸지 않고 내가 기억하는 대로 쓴다. 예. ‘국민학교’/초등학교, ‘6.25사변, 6.25동란’/6.25전쟁 등. 사선의 뒤에 것이 현대의 표준용어이다. )
1. 전쟁 중에도 계속된 학교 교육.
우리들의 대다수는 1949년 9월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38선 이북에 살았던 동창들도 그 해에 인민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그 해에 정부에서 새학기 시작을 9월에서 4월로 바꾸면서, 완충적인 조치로 이듬해 1950년에는 신학년도가 6월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1950년 6월 초순에 2학년이 되었다.
곧 6.25사변이 발발하였다. 나는 서울 매동국민학교에 다녔는데, 며칠 동안인지 학교에 가지 않다가, 낯선 인민군들이 보이기 시작한 후 학교를 다시 다녔다. 학교에서는 매일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원수와 더불어 싸우다 죽은...” 과 같은 북한 공산당의 노래만 배웠던 듯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습경보 싸이렌 소리와 폭격 소리가 잦아지면서 학교를 가지 않고, 9.28 수복 때까지 집 뒤안에 파놓은 방공호나 동네 공동방공호를 화급히 드나들며 그 해 여름 석 달을 보냈다.
9.28 수복 후 곧 학교를 다시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 달 쯤 지나서부터 동네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고, 피난 가면서 대문을 대못으로 단단히 박아 놓은 빈집들이 늘어났다. 학교도 안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전통 가옥의 대문에는 밖에서 잠그는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각목을 대고 대못을 박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과 38선 이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은 1950년 11-12월 경부터 1954년 까지 피난 생활을 했다. 그 기간에 어떤 집은 부산이나 남쪽의 어느 고장 한 곳에서만 체류하였고, 어떤 집은 옮겨 다녔다.
전쟁-피난 기간에 우리들은 8-12세 어린이로 국민학교 2-6학년이었다.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지리산 등 전국의 산악 지역에서는 공비가 빈번히 출몰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식량을 약탈해 가던 그 때에 우리는 피난지에서 평화롭게(!) 학교를 다녔다.
교실이 없으면 노천의 비탈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다. 교실은 있으나 책상과 걸상이 없어서 마루바닥에 엎드려서 공부했다. 교원이 부족하여 한 반(班)에 1백명 이상이 편성되기도 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아침반’ㆍ‘오후반’ 2부제 수업, 심지어 ‘저녁반’까지 3부제 수업을 실시한 학교도 있었다.
서울ㆍ경기 지방에서 출생한 동창들과 이북에서 온 동창들은 1949년에 입학한 학교와 피난지 학교, 최소한 2 곳, 많게는 5 곳을 다녔다. 그리고, 1949년 입학하여 6년 학제(學制)에 맞는 1955년 3월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우리가 전쟁과 피난 기간 중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당시 우리 정부의 학교교육 시스템이 간단(間斷)없이 작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전쟁 중에 학교 교육을 계속 시행한 사례는 북한을 포함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을 듯하다. 물론 전쟁을 다른 나라의 영토에서 수행한 미국ㆍ영국ㆍ일본 등의 본국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1ㆍ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제국(諸國)과 중국ㆍ월남ㆍ중동 제국에서는 6.25 동란 때 우리나라와 같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학교교육을 중단 없이 계속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치열한 전쟁 중에도 학교교육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정부였다. 바로 우리가 그 정책의 수혜자이며 증인이다.
2. 평등과 자유경쟁
근래 “친일 기득권 세력이 운운...”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로부터, 학교 동창들이나 직장 동료 등,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누가 ‘기득권’을 향유했는지 얼핏 지적할 수가 없다.
서울중ㆍ고등학교 동창들을 회고해 보면 ‘우리 사회에 기득권 세력의 존재’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55년에 평생 처음으로 경쟁시험을 치고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급생들의 다수는 서울과 남한 각처 출생이었으나, 평안도ㆍ함경도 등 이북 출생도 상당히 많았다. 이북 출생이 3분의 1은 되지 않았나 싶다. 일부는 해방 후부터 6.25전까지 내려 온 세칭 ‘월남민’이었으나, 대다수는 1.4 후퇴 때 ‘피난민’들이었다. 북한에서 인민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남한으로 피난 와서 국민학교 3~4년을 다니고, 세칭 ‘일류 중학교’였던 서울중학교에 경쟁시험을 쳐서 합격한 아이들이었다.
동창들의 부모님 직업은 다양했다. 내가 아는 친구들의 아버님 혹은 어머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 공무원, 국영기업 이사, 군장성, 대기업 사장, 떡방아간 주인, 목사, 변호사, 세탁업자, 양계장 주인, 양조장 사장, 양품점 주인, 군복 염색업자, 의사, 중소기업 사장 등이었다. 어떤 친구는 6년을 같이 어울렸어도 부모의 직업을 모르고 지냈다.
당시 40세 이상으로 고위 공직자이거나 교수ㆍ의사ㆍ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한 부모님들은 거의 모두가 일제시대에 전문학교(專門學校)나 제국대학(帝國大學) 출신들이다. 요즈음 ‘친일파’로 매도당할 수 있는 분들이다.
부모님들의 재산 정도는 전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친구 집에 놀러 다니면서 집과 사는 모양을 보고 ‘큰 부자집’ㆍ‘잘 사는 집’ㆍ‘어렵게 사는 집’ 등으로 막연히 느꼈을 뿐이다. 대지 수백평의 큰 한옥(韓屋) 혹은 왜식(倭式) 2층 주택의 부자집들이 소수 있었고, 다수는 서울에 아주 흔했던 각양각색의 한옥(韓屋)과 뚜렷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혼합식 주택이었다. 후암동ㆍ성북동ㆍ북아현동 왜식 가옥에 사는 친구들은 보통보다는 부유한 듯했다. 나와 친했던 친구 하나는 시장통 가건물 가게 천장 위에 엉성하게 만든 방에서 살았고, 후암동 해방촌과 미아리 판자촌에 사는 친구도 있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안 계시거나 한 분, 특히 아버님이 안 계신 친구가 여럿 있었다. 아마 우리 동창 부모님들 다수가 해방 전 우리가 출생할 때 20대, 6.25 동란 때 30대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전쟁에서나 20대와 30대의 희생이 가장 컸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보통 20대 초반에 결혼했으니까, 6.25 때 만 일곱 살 된 장남의 부모님은 30세 전후, 일곱살 된 차남ㆍ3남의 부모님은 30대 중ㆍ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학 동창 중에 아버님이 일제 징용으로 나간 후 태어난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동창 중에도 있을 듯하다.
이와 같이, 서울중학교 동창생들의 출생지, 부모님의 직업, 재산 정도가 아주 달랐으나, 학교생활이나 친구 사귀기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놀러 가서 ‘밥 얻어먹고’ 고등학교 때는 수시로 ‘자고 오기’까지 한 친구 집과 생활 수준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 동창들 중에 자신의 배경 때문에 중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엄격하게 운영된 공개경쟁 시험을 거쳐 중ㆍ고등ㆍ대학교에 입학하여, 차별 없는 평등한 교육을 받았고, 자유 경쟁으로 사회에 진출하였다.
1950-60년대까지도, 20세기 민주주의의 모델로 인정하는, 미국에서조차 인종차별ㆍ성차별(性差別) 등 불평등(不平等)이 보편적 사회현상이었다. 그 때문에 1960년대에 민권운동(民權運動)이 크게 일어났다.
우리가 중ㆍ고등학교에 다닐 때, 너무나 당연하여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평등(平等)’이다. 그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상에는 그 때 우리가 평범하게 의식하던 ‘평등’이 평범하지 않은 나라들이 훨씬 많다.
3. 배고픈 사람은 있었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천재지변이나 전쟁 때문에 식량의 생산과 공급이 부족하여 집단 기아(飢餓) 사태가 발생한 시대가 있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현재 90세이상 되는 선배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가 출생한 1940년대 초반,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굶어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6.25사변 기간과 그 직후, 그리고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에서 아사자(餓死者)가 대량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사연은 들어 봤어도, ‘굶어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살아 온 시대에 우리나라도 식량이 부족하였던 사실은 우리가 기억하는 국어 단어들로 확인할 수 있다.
전쟁기간 중에 학교에서 점심으로 ‘우유죽’을 한 국자씩 받아먹었다. 우리는 ‘우유가루’, ‘밀가루 배급’, ‘양쌀’ 혹은 ‘안남미’, ‘납작보리쌀’과 같은 단어들을 기억하지만, 그것으로 6.25전쟁 기간과 그 직후에 우리 국민이 기아(飢餓)를 면할 수 있었던 사실을 연상(聯想)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값비싼 건강식이 될 수 있는 ‘꽁보리밥’은 그 시대에는 가난한 집 주식(主食)을 대표하는 말이었고, 오늘날 ‘밥’은 당연히 쌀로 짓기 때문에 ‘쌀밥’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지만, 그 시대에는 부잣집 주식으로 인식되었다. ‘밥’의 대용식이었던 ‘호박죽’ㆍ‘아욱죽’ㆍ‘수제비’ㆍ‘개떡’등도 잊혀진 음식들이다. 1960년대까지 신문 기사의 큼직한 제목으로 ‘춘궁기(春窮期)’ 혹은 ‘보릿고개’, ‘절량농가’(絶糧農家)와 같은 단어들이 보였었다.
인터넷에서 인구통계를 검색해 보니, 1950년대 남한의 인구가 2천만을 넘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물론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가능했지만, 어쨌든 2천만 국민 중 소수라도 굶어죽게 두지 않았다.
오늘날도 인구 2천만의 나라가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식량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 처할 때, 6.25 때 우리 정부만큼 전국민을 대상으로 아사(餓死) 방지 대책을 수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4. 국민이 내심으로 환영한 5.16 군사혁명
4.19 때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등장한 ‘구악일소(舊惡一掃)’의 바람은 우리 학교까지 들어왔다. 나는 직접 들어보지 못했지만, 몇몇 교사들이 교장선생님을 몰아내야한다고 선동했다고 한다. 학생들도 잠깐 동요하고 소란했지만, 교장과 문제 교사들이 학교를 떠난 후 조용해졌고, 우리는 대학입학시험 준비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서울 시내, 특히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연일 데모대가 길을 메웠다. 심지어 국민학교 아동들까지 데모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4.19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공천하면 논뚝의 말뚝도 국회의원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민주당 공천자들이 거의 전원(?)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구파’ㆍ‘신파’로 갈라서서 정쟁만 일삼았다. 데모와 정치인들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 시민들은 어떤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여 데모를 진압하고, 저희들끼리 싸움질만하는 정치인들을 몰아내기를 은근히 고대하였다.
이듬해 3월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4월 초 대학 입학식 후 한 달남짓 지나서 5.16 군사혁명이 났다. 반복해서 방송하는 혁명공약을 들으면서 대다수 시민들은 “올 것이 왔다”라는 기분이었고 혹시 어떤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더욱이 8군사령부의 계속된 방송에서 혁명군에게 원대 복귀를 종용하였고, 혁명 수일 후 혁명과 관계없는 듯한, 1군사령부 창설 기념식이 생중계 방송되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나 단 며칠 후부터 일반 시민들은 심정적으로 안정되었다.
진절머리가 나던 데모가 싹 없어지고, 구파-신파 싸움질 신문 기사를 보지 않게 되어 시원하다는 어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5. 희망을 갖고 노력하던 시대
이승만ㆍ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살았던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그 시대를 “장래 성공의 희망을 갖고 최대한 노력하던 시대”로 기억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시대에는 가난을 정부의 탓으로 불평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어느 독일 사회학자가 각국의 빈민가(貧民街)를 연구하면서, 한국에도 현장 조사연구차 들려서 서울의 ‘달동네’ 한두 군데를 방문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 독일 학자를 만나 우리나라 빈민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 달동네를 방문한 그의 소감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달동네에 사는 빈민들은 미국 뉴욕 할렘, 유럽의 게토 등 다른 나라 빈민가 사람들과 다르다. 우선 외부인이 할렘이나 게토를 걸어가면, 노변에 앉았거나 서성거리는 험상궂은 사람들이 적대적인 눈초리로 쏘아보아 긴장하게 된다.
내가 서울의 달동네를 방문한 때는 아침 시간이었다. 달동네의 비탈진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 등교를 챙기고, 일하러 갈 채비하느라 소란스럽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이방인인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듯했다.
한 집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했다. 남편은 일정한 직업 없이 서울역에 나가서 날품팔이를 하고, 부인은 파출부를 한다. 남편의 불규칙한 수입과 부인의 15만원 파출부 수입, 도합 20여만이 월간 수입이다. 그 중 5만원은 집세 내고, 10만원 정도를 식생활에 쓰고, 5만원은 아들의 과외비(!)로 지출한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의 4분지 1을 과외비로 쓰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 분 말씀이 “지금 우리는 가난하게 살지만, 우리 아들은 성공시키려 과외 시켜요. 정주영ㆍ김우중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나요? 우리 아들이 그들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였다.
그 분 말씀을 듣고 “한국은 희망 있는 나라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달동네 아주머니의 말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을 느끼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살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이승만ㆍ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사실(史實)들 중에서 몇 가지를 회고하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