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 늘면 건보 재정 악화” vs “첨단 의료기술 육성 기회”
영리병원 진료 놓고 20년 논쟁
제주 녹지병원 치열한 다툼
“의료 양극화 초래할 것”… “의료기술 선순환 효과볼 것”
‘국내 1호 영리병원’으로 승인됐지만 제주도가 개설 허가를 취소한 제주 서귀포시 녹지국제병원. 서귀포=뉴스1
《영리병원을 둘러싼 논쟁이 20년째 현재진행형이다. 법으로 허용된 건 2002년인데 단 한 곳도 개설되지 않고 찬반만 분분하다. 한쪽에선 의료 공공성을 무너뜨릴 도미노의 첫 줄이라고 걱정하고, 반대쪽은 경쟁과 효율화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일 마중물로 기대한다.
입법 행정 사법도 혼란스럽다. 국회는 법으로 허용했는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불허했다. 법원은 그런 지자체의 결정이 위법이라고 한다. 이런 와중에 최근 녹지국제병원에 대한 법원의 한 판결이 또다시 논쟁에 불을 댕겼다. 경과와 쟁점을 들여다봤다.》
○ 정권 바뀌며 ‘취소’, 법원은 “불허 근거 없어”
영리병원의 공식 명칭은 투자개방형 병원이다. 의료법상 병원은 의사 개인이나 비영리법인만 세울 수 있고, 외부 투자를 받거나 수익을 배당할 수 없다. 그 예외를 처음 법제화한 건 김대중 정부 때다. 2002년 4월 정부는 외국자본이 경제자유구역에 외국인 전용 병원을 세우고 수익도 가져갈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국회는 이런 내용을 담은 경제자유구역법을 제정했다. 2005년 1월엔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게 법을 개정했다. 2006년 2월 제정된 제주특별법에서도 진료 대상을 제한하지 않았다.
2015년 6월 중국 부동산기업 뤼디(綠地·녹지)그룹이 자회사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녹지제주)를 통해 제주 서귀포시에 녹지국제병원을 설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주도에 냈다. 성형외과 등 4개 진료과목을 둔 47병상짜리 소형 병원이었다. 일사천리로 보건복지부가 건립을 승인해 2016년 4월 병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정부가 영리병원 허용 방침을 밝힌 지 14년 만이었다.
2017년 7월 녹지국제병원 건물이 완성됐다. 그런데 그사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분위기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대통령비서실 지시로 만들어진 복지부 적폐청산위원회는 영리병원 중단을 권고했다. 2018년 12월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내국인 진료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허가했다. 녹지제주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송을 냈고, 제주도는 개설 기한(3개월) 내에 문을 열지 않았다며 허가를 취소했다.
병원 개설 허가 취소에 대한 소송은 녹지제주가 최종 승소했다. 지난해 8월 광주고법은 녹지제주가 병원 문을 열지 못한 책임이 제주도에 있었다며 취소 처분을 거두라고 판결했고, 올 1월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남은 쟁점은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이 적법한지였다. 제주지법은 이달 5일 녹지제주의 손을 들어줬다. 진료 대상을 외국인으로 제한할 근거가 법과 조례 어디에도 없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옛 법에) ‘외국인 전용’ 특례를 규정했다가 제주특별법에서 이를 삭제한 연혁에 비춰보면 내국인 진료 제한은 입법취지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제주도가 이 판결에 항소한 데다 12일엔 또다시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 취소를 결정했기 때문에 법리 다툼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건보 붕괴와 필수의료 공백 초래 우려”
영리병원의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라는 법원 판결이 주목받는 이유는 영리병원과 일반 병원이 같은 링 위에서 경쟁하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경제자유구역법에 따라 영리병원 개설이 가능한 인천 송도국제도시 등 전국 9개 경제자유구역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영리병원이 우후죽순 늘어나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악화할 거라고 우려한다. 일반인이 의사를 ‘바지 원장’으로 내세워 운영하는 사무장 병원처럼 투자금 회수에 혈안이 돼 진료비를 부풀리거나 질 낮은 의료를 할 거란 얘기다. 전성훈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는 “자본이 의료를 지배하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영리병원 진료를 건보 적용에서 제외하면 의료 양극화가 더 심해질 거란 지적도 있다. 실력 있는 의료진은 비급여 진료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영리병원으로 몰리고, 외과 수술이나 감염병 치료처럼 ‘돈 안 되는’ 진료는 소외될 거란 얘기다. 헌법재판소는 2002년 10월 모든 병원이 반드시 건보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는 국민건강보험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하면서 “(병원의 선택에 맡기면) 건보 진료는 2류 진료로 전락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우려들은 하나씩 보면 타당하나 각각의 연결고리는 약해 보인다. 영리병원이 곧 건보 체계 붕괴로 이어질 거란 추론이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암과 희귀질환 등 필수의료에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건보 혜택을 주고 있다. 환자로선 효과가 비슷한 치료라면 굳이 건보 적용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영리병원이 사무장 병원처럼 질 낮은 의료를 할 거란 우려도 마찬가지다. 그런 병원은 환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도태되는 게 시장의 논리다.
영리병원을 틀어막는 동안 비공식적인 이윤 추구가 더 심해지고 필수의료가 황폐화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비급여 진료비는 연평균 7.6% 증가했다. 2020년 전국 입원 병상이 2011년 대비 14만2726개 늘었는데 같은 기간 중환자 병상은 고작 109개 늘었다. 건보 체계상 중환자를 받을수록 적자가 나기 때문이다. 중환자실 부족의 대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전 국민이 체감했다.
○ “영리병원서 육성한 신의술 선순환”
그렇다고 영리병원의 미래를 무작정 장밋빛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의료 산업이 수십 배로 성장할 거라는 연구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진료비가 폭등해도 환자 수는 그대로일 거란 비현실적인 전제로 계산한 게 많다.
부실한 공공의료는 필수의료에 대한 건보 수가를 높이거나 공공병원을 확충함으로써 해결하고, 그와 동시에 값비싼 첨단 의료기술을 육성할 수 있는 영리병원도 조심스럽게 도입하는 걸 대안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 병원이라는 서울대병원도 장례식장과 푸드코트에서 번 돈으로 진료 적자를 메운다. 연구비에 재투자할 수 있는 돈이 한 해 100억 원도 안 된다고 한다. 김효수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해외에선 영리병원이 심장병을 줄기세포로 치료하는 의술을 개발하고, 그 신기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일반화돼 공공병원으로도 확대되는 선순환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어느 나라나 공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서비스를 민간에서 보완하고 있다”라며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오히려 진료의 질이 낮은 병원은 건보에서 제외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