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6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이스라엘이 행한 두 가지 악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으로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나 또한 날 위해 생명 주신 우리 주님을 내 마음대로 홀대하며 나 중심적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이 주신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생명의 농사를 지어야 함에도 내가 보기에 좋은 웅덩이를 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의 노력과 애씀으로 행했을지라도 그것은 터진 웅덩이라서 아무 것도 보관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온톤 나의 의밖에 안 보입니다.
이런 죄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춰주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의 정결한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4:1-11
제목 :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오늘’ 곧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묵상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그림자는 빛이 비치면 말없이 사라지며 모형은 실상이 오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아무리 멋지게 지어졌을지라도 진짜 아파트가 완성되면 모델하우스를 아까워하지 않고 그것을 다 뜯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모델하우스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와 모형은 실재가 있음을 보여주는 향도(嚮導)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실재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가나안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고 그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끊임없이 불순종하였다.
여기서 불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지킨 계명은 단순히 문자적인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계명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주체가 백성들 자신이 되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지키라고 주는 것이냐면서 반항하고 부정하며 대적하기도 하면서 불순종의 극치를 보였다.
이것은 그저 문자적으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 계명 곧 말씀이 구원자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하고 늘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주님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 8:8-9)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대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이렇게 먼저 복음을 받았을지라도 그 복음을 마음에 새기거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여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서 부담스러워할 때 그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안식을 하는데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것도 안 하고 먹고 노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안식의 의미를 무엇보다 바르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안식은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예배하고 말씀보고 도란도란 성도들끼리 교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안식은 쉼이다.
그런데 우리가 쉴 수 있음은 아버지의 품안에서만 완전한 안식과 쉼이 가능하다.
그 날은 주일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이 주일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 날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는 매일 매일이 우리가 무덤 안에서 부활하는 새 생명의 날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이 바로 부활의 날이요 새 생명의 날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안식의 날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주의 품안에서 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 안에서 쉬고 안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의 어떠한 행동이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신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그 날이 곧 안식일이요, 그 날이 곧 주일이며 그 시간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요 영원에 잇대어 주님의 품에 안겨 있는 하늘의 시간인 것이다.
가나안 점령시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 들어가서 참된 안식을 누렸어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이란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가나안 원주민인 일곱 족속을 쫓아내야 했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있는 온갖 우상들 그 중에 대표하는 것이 풍요의 신 바알과 쾌락의 신 아세라를 박살내야 했다.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박살내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원주민들을 자신들을 위하여 물을 긷거나 장작을 패는 자로 사용하는데 적합할 것이라 생각하여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이 부요하게 사는 이유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그들의 신으로 모신 것이었다.
이러니 그들에게 안식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누구든지 순종하지 않았던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은 육신적으로 쉬는 안식과 편안함이 아니다.
안식이란 우리의 몸과 영이 날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쉬며 참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말씀으로 계셨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그 말씀이 곧 복음이다.
이 복음만이 우리를 진정한 안식으로 인도할 수 있다.
주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그 자체는 고통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양날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때문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런 말씀 앞에 나 자신을 투영시키면 나의 더럽고 추한 죄악이 밝히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봄날 아침, 거실 창문의 커튼을 젖히면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밝은 햇살에 아주 작은 먼지들이 날아다니는 것들이 보인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햇살 앞에서 낱낱이 적나라하게 보이니까 그 먼지 앞에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처럼 매일 하나님의 아들 자체이신 말씀 앞에 나를 투영시키면 내 안에 있는 온갖 죄의 때가 비쳐진다.
그것에 구역질이 나고 토를 할 정도로 나는 비참하고 비천한 존재이다.
나의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나의 비참함을 먼저 보고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없고 죄가 없으신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회개를 하고 주의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파레시아’이다.
파레시아의 뜻은 담대함 확신 담력으로 해석된다.
이는 나의 객기로 담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주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서 나를 용납하신 주님을 나도 용납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데 그 생명이 곧 새 생명이요 아들의 생명이다.
나는 이런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복음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늘 그림자와 모델하우스 같은 허상과 모형을 이 땅에서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사실을 넘어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
이 진리는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영생이다.
영생은 곧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욥의 감겨진 눈을 열기 위하여 천지창조의 기사를 그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하시고 눈이 있어도 그 눈으로 더 이상 땅의 것에 매어있지 못하게 하셨다.
그로 인하여 그는 결국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오직 그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며 그 입술로는 주를 찬양하게 하셨다.
(욥 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인간적 육신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렸던 욥도 이 땅에서 무언가 갈급함이 있었고 부족함이 있었다.
그가 아무리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정직하게 행한다고 하였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의로 드러날 뿐이었다.
그런 욥이었지만 그 안에 영적인 갈급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했다는 자기주장의지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으나 그것은 인간들의 평가이고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하나님의 평가를 받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무덤인 말씀 속으로 들어가 나의 실존을 본다.
비참하여 죽기에만 합당한 나, 이런 나의 모습을 가지고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미 이런 냄새나고 더러운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되셔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그런 주님의 구속사건에 연합하여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주님의 생명, 아들의 생명으로 이 시간 아버지의 품에 거한다.
이 자리가 다름 아닌 오늘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서 영원에 잇대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the Fact와 In the Truth를 알지 못하고 눈이 가려져서 그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영광 돌리는 일인 줄 알았던 이 죄인 중의 괴수를 주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 심판을 통하여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요 내가 하는 호흡 하나까지도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나의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무엇이라 말 할 수 있겠나이까?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사 주의 품에 품어 주옵소서.
오늘이라는 주님의 시간 안에 거하여 온전히 안식하게 하시고 아담의 생명이 그 무덤 속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할 때 아들의 생명이 되어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이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 진리이오니 땅의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품에 거하여 주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으로 새 날을 살게 하소서.
주의 백성들이 이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저 막연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카이로스 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은 이 땅의 시간과 잇대어 있나이다.
그것은 말씀으로 이어지는 영원이며 그 영원에 잇대어 있는 이 자리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주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