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질서
김남수
멱살을 잡고 노려보았다. 서로의 눈빛에는 분노와 공포가 공존했다. ‘내가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 이 돌발적인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상대는,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에 대해 ‘얼마나 주먹이 셀까? 빠를까?’를 계산하고 있었거나, ‘이겨도 본전인 밑지는 싸움’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을지를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깊은 숲에서 갑자기 여러 갈래의 길을 맞닥뜨린 듯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전에 살던 동네에서 그래도 매섭다는 평이 있는 주먹을 날릴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주먹을 날릴 용기는 없었다. 상대는 단단하고 깡마른 체격에 눈매는 날카로웠다. 나보다 키도 컸고 한 살 위였으니 객관적으로도 밀리는 싸움이었다. 더구나 그 날카로운 눈매에서 만만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의 잔뜩 긴장한 얼굴에서 당황한 표정 또한 읽을 수 있었다. 늘 모세혈관이 약해 만성적으로 코피를 흘려대는 나인지를 상대가 알았다면 단박에 코를 쳤을 것이고, 서로 몇 대를 주고받더라도 주변 아이들은 피 흘린 자의 패배로 인식할 것이다. 아니, 피를 본 순간 구경꾼들은 둘을 갈라놓으며 게임 종료를 선언할 것이다. 상대가 그러한 나의 약점을 모르기에 나는 흔들림 없이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싸움은 ‘깡’이 8할이라고 했던가? 그의 당황함을 엿본 나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분명 나의 행동을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리라.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동 취업 붐이 일었다. 아버지는 6.25를 겪으며 어떻게 졸업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대학교 영문과 출신이셨고 미군 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영어를 잘하셨다. 그것 때문에 좋은 자리를 얻어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가셨다. 새집으로 가기 전까지 몇 달을 외가에 얹혀살아야 했다. 그동안 살던 종암동에서 종로 2가 낙원아파트로 옮겼지만, 입학 이래 5학년이 되기까지 다니던 S초등학교에서 굳이 전학하지 않았다. 버스 한 번이면 학교 앞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대문, 신설동을 지나 고려대학교 앞을 거쳐 가는 30분 남짓 거리였다. 처음 혼자서 타고 다니는 버스 통학이었다. 걸어서 집과 학교만 오가던 샌님이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니 제법 어른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초등학생요금 25원. 당시 짜장면이 90원이었다. 거처를 옮긴 곳은 외가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큰 이모네였다. 이모부가 제법 부자였던 것 같다. 이종사촌 동생들이 자기 아빠가 사장님이라며 자랑을 했기에 알게 되었다. 이모부는 처부모를 다 모시고 살다가, 잠시지만 처제네 식구까지 챙기는 포용력을 발휘했다. 나는 그 집 가정부가 있었다면 기거했을 법한 부엌 옆 아주 좁은 골방에 거처했다. 낙원 아파트는 주상복합 건물로 4층에는 허리우드 극장이 있고, 악기점들이 모여 있다. 이곳 아이들은 주로 6층 놀이터에 모여 놀았다. 6층부터는 아파트였고, 15층까지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으로 유명한 건물이었는데, 야간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 누나들이 낮에 두 엘리베이터를 운행했으며, 경비원이 곳곳에 상당히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너 여기 사는 것 맞아? 거짓말 말아! 확인한다? 몇 호에 살아?"
약 한 달 정도 이런 시달림을 겪고서야 자유를 찾았다. 아이들은 모두 인근 K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들은 어느 날 나타난 이방인이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이종사촌을 제외한 누구도 내게 오빠나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가 살던 종암동 철둑길 주변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들이었다. 종암동 아이들은 더 거칠지만 순수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곳 아이들은 전체적으로 깨끗해 보이고 귀티가 났으나, 어딘지 나약해 보이기도 하면서도 매서운 모양이었다. 텃세라고 하나? 좀처럼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종사촌 남매가 없었다면 같은 장소에서 노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촌 여동생은 내가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도록, 경품을 걸며 종이비행기 날리기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어딘지 촌스러워 보였을 내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더구나 난 무척 마르고 허약했다. 그러니 얕잡아 보였을 것이다. 내가 살던 종암동 철둑길 아이들 역시 새로운 아이가 오면 또래끼리는 서열을 정해야 했다. 기 싸움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반드시 주먹다짐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종로 2가 아이들은 내게 그러한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따돌리고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서너 달이 지난 후에야 같이 놀 수 있었으나, 내게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는 아이는 저학년 아이들뿐이었다. 그중에 늘 나를 못마땅하게 보던 6학년이 있었다. 깡마른 체구였으나 나보다도 키가 컸고, 눈매가 째진 것이 무서워 보이는 형이었다. 다방구 놀이를 했다.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편과 진 편을 갈랐다. 이긴 편은 모두 달아나고 술래가 된 아이들은 하나하나 아이들을 잡으러 다녔다. 요리조리 달려 피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잡히기 시작했고, 남은 아이들은 연결된 포로들을 구하러 달려오기도 하고 도망도 다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은 아이들은 줄어갔다. 미끄럼틀 위로, 정글짐으로 도망 다니던 아이들이 모두 잡힌 후였다. 완전히 은폐된 곳에 혼자 숨어있던 나는 무리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그들은 너무도 느긋하게 걸어오는 내가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혼동했다. 나는 그런 혼란한 틈을 노려 재치 있는 속임수를 썼다. "다 잡힌 것 같은데, 한 명이 안 보이네. 집에 간 것 아냐?" 술래들이 모두 어리둥절할 때, 나와 가위바위보를 했던 아이가 멀리에서 소리쳤다. "우리 편 아니야! 잡아!" 천천히 다가가던 나는 그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려가 마지막 포로의 뻗은 손을 터치하며 외쳤다. "다방~~~구!" 포로로 잡혀있던 아이들이 환호하며 일제히 흩어졌고, 놀란 술래들은 흩어지는 포로들을 다시 ‘다방구’를 외치며 잡아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멀리 도망친 반 정도의 아이들이 다 잡힐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제는 공수가 바뀌어야 할 순서였지만, 어느덧 저녁이 되어 나를 포함한 많은 아이가 인제 그만 놀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약이 오른 건,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6학년 형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도 없이 끝나버리니 모든 화풀이의 대상이 내가 된 것이다. 나 하나로 인해 모두를 잡아들이는 데에만 한참 더 걸렸으니 그럴 만하다. 술래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이 보통 심통이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눈을 부라렸다.
"술래도 안 하고 그냥 가기가 어디 있어?"
이후에 생각해 봐도 내게 어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도 같이 멱살을 잡고 때릴 태세를 했다. 말릴 생각도 없이 사촌을 비롯한 같이 놀던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사태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여차하면 가장 재미있다는 불구경, 싸움구경, 노름구경 3경 중 제1이라는 싸움구경을 할 수 있어서였을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서로 멱살을 잡은 채 한 시간 같은 1분이 지났다. 이 1분은 서로 많은 생각을 하며 기세 싸움을 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놀이터에서 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촌 동생도 지켜보기에 자존심이 걸린 자리였다. “이 새끼가!” 이 한 마디 이후로 서로 노려만 보던 둘이었다. 나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눈은 커가지고 깡이라고는 거리가 먼 나였다.
먼저 살던 곳에서도 무당집 녀석에게 늘 지고 살았다. 또래 중 그 아이를 이기는 아이는 ‘왕자’라는 이웃 동네 아이였는데, 자주 우리 동네에 와서 놀았다. 긴박한 이 상황에서 그 아이와 마주친 첫 장면이 떠올랐다. 왕자라는 아이와 나는 서열이 필요했다. 무당집 녀석이 꼬랑지를 내리며 녀석을 피했고, 그런 그가 내게는 새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동네 형이 “얘가 왕자라는 아이다”라고 소개를 했고, 서로 마주 선 상태에서 다짜고짜 내가 먼저 그 아이의 얼굴을 때렸다. 나도 깜짝 놀랄 결과가 벌어졌다. 왕자라는 아이가 “와앙~!”하고 그 자리에서 울어 버린 사건은 많은 동네 형들의 입으로 회자 되었다. 내가 무당집 애에게 지고, 무당집 애는 왕자에게 지고, 왕자는 내게 진다며 재미있어했다. 주먹 힘은 내가 무당집 아이를 능가했으나 전반적인 발재간과 체력에서 도저히 상대되지 않았다. 역시 체력이 약한 내가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빠른 승부와 ‘선빵(먼저 때림)’만이 승리의 요건이었다.
1분의 긴장 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결국, 6학년이 먼저 멱살을 풀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끝나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내일 보자며 뿔뿔이 흩어져 갈 길로 갔다. 신기한 건 다음 날부터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 번도 형이라고 하지 않던 4학년 녀석이 다가오며 말했다. “형! 어제 세완이 형한테 대든 건 형이 처음이야. 그 형, 여기서 싸움 제일 잘하는 형이거든.” 그날부터 나는 내게 형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놀 수 있었다. 그 6학년 형은 좀처럼 놀이터에 나오지 않았고 마주쳐도 애써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더 피했는지도 모른다. 괜히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밀림의 왕이 된 사자처럼 무게를 잡으며 우쭐하고 다녔지만, 실상은 다시 그런 상황이 생길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5학년 2학기가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구매한 집의 입주가 시작되어 이모네 집을 나오게 됐다. 아파트 9층에 있는 구멍가게 구석에서 사촌 동생과 군것질하고 있을 때였다. 가게 밖에서 그 6학년 형과 4학년 녀석이 아이스바를 사 먹으며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형, 이사 간다던데?”
“그래?”
“그런데 형. 전에 그 형이랑 왜 안 싸우고 그냥 갔어?”
“그건….”
그들은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사촌 동생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며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내 얘기를 하는 중에 나타나는 것도 어딘지 어색한 일이었다. 세완이 형은, 자신이 주도하여 늘 아이들을 거느리고 새로 온 아이들을 따돌리기도 했던 것들이 더 미안한 일이었는데, 나와 싸우려 할 때 내 얼굴을 보자 이제는 그런 일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곧 중학생이 될 처지에 굳이 싸움까지 해 가며 조그만 놀이터 골목대장 노릇 하기가 우스웠다고 했다. 그들이 가게를 떠날 때까지 구석에서 숨죽이며 서 있었다. 사실 그에게서 내가 상대도 안 됐을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우쭐했던 마음, 의기양양하게 굴던 시간만큼이나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사촌 동생에게는 “그 자식 되게 웃기네. 내가 무서워서 피해놓고.”라고 했지만 내 말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건 사촌 동생이나 나나 잘 알고 있었다.
서초동으로 이사하며 새 학교로 전학했다. 그곳은 서울이지만 낙원동은 물론, 종암동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시골이었다. 학교라고는 가까이 K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가면 한국교육대학교, 멀리 Y중학교와 E여고 그리고 S고등학교가 전부였다. 내가 전학한 학교는 한 학년에 두 반만 있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베이비붐 시대를 겪으며 한 학년 삼십여 반에 1학년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던 먼저 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총각 담임선생님은 관사라는 곳에 기거하며 혼자 살았고, 전교생이 어디 사는지 다 파악되는 서울 안의 시골학교였다. 생전 처음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았고, 동네 언덕에는 큰 향나무가 있었다. 무슨 말(마을), 궁현, 상명, 하명 등 행정구역 상 한 동이지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마을 이름들이 존재했다. 버스도 없는 십 리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노라면 개구리가 울고, 메뚜기가 떼 지어 다니고,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며 쫓아오는 곳이었다. 가끔 등굣길에 많은 개에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모르며 그 동네 친구 이름을 크게 불러대는 일도 있었다. 학교 앞에 피마자를 키웠는데, 학생을 동원해 열매를 따게 하는 등 이곳이 서울 맞는가 싶은, 좌변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택시를 타 보았노라 자랑을 하는 아이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순박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그곳에도 역시 새로운 질서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