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줴(황각) 黃覺(1883~1956)】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연대」
중국 장시성(江西省) 칭장현(清江縣)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스즈(时至), 자는 딩바오(定保), 호는 졔민(介民)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13세에 부친의 목재업을 도와 생활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쑨원(孫文)이 조직한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였다. 동맹회는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무장봉기를 통한 청조 타도를 목표로 하였다. 1909년 난징(南京) 양강사범학교(兩江師範學校) 부속중학에서 공부하였다.
한국독립운동과의 관계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혁명 세력과 연대를 희망하며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2년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고, 이어서 중국 혁명세력과 연합하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창립하였다. 이때 천치메이(陳其美)·쑹자오런(宋敎仁)·후한민(胡漢民) 등과 신아동제사에 참여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3년 도쿄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으로 유학을 가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크로포트킨(Kropotkin)의 저서를 접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망명한 쑨원이 조직한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14년 중국공산당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리다자오(李大釗)와 함께 을묘학회(乙卯學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민이(民彛)』를 창간하여 편집위원을 맡았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중국인 유학생들을 조직화하였다. 더불어 한인 유학생들과의 연대도 계속되어, 1916년 7월 김철수(金綴洙)·장덕수(張德秀)·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 등과 한국·중국·타이완·베트남·인도 출신 유학생들이 참여하는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결성을 주도하였다. 신아동맹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아시아 민족의 반제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는 비밀결사체였다.
신아동맹당 결성식에서, 모임의 대표로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고, 칼을 빼 맹세하였다. 신아동맹당은 상하이(上海)·도쿄 등에 지부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조소앙과 안재홍을 만나 신아동맹당 한국지부 결성대회를 열었다. 이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1916년 5월 귀국한 리다자오와 만나는 등 동아시아 차원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국제연대를 통해 반제·반일 활동을 하던 신아동맹당은 일제의 탄압 가능성을 우려하여 1917년 9월 30일 해산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1916년 말 톈진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만났다는 회고록의 기록으로 보아 1916년 하반기 무렵에는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 후 상하이에서 활동 기반을 구축한 결과, 1917년 12월 신아동맹당 본부 설립대회가 열렸다. 한국 측 대표로는 신규식·조소앙·장덕수 등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항일운동단체인 구국단(救國團)을 조직하였다. 구국단은 학생들과 연대하여 기관지 구국일보(救國日報)를 발행하고 ‘대중국(對中國)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상하이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7년 여운형의 오랜 동지인 조동호(趙東祜)를 『구국일보』 기자로 채용하였다. 1918년 중국군관학교 입학을 희망하던 김홍일에게 구이저우성(貴州省) 독군(督軍)의 아들 류강우(劉剛吾)를 소개해 주어 구이저우강무학교(貴州講武學校) 입학을 도와주었다. 졸업 후 구이저우를 떠나는 김홍일에게 흥아사(興亞社) 가입을 권유하였고, 흥아사에 가입한 김홍일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흥아사는 아시아 전역에 조직망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비밀결사체로 아시아 각 약소민족이 단합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단체였다. 흥아사는 단체의 기조와 활동을 볼 때 신아동맹당의 이명(異名)으로 볼 수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자금도 지원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 활동도 지원하였다. 여운형과 상의하여 소련 밀사 보드 보이부와 교류를 추진하였고, 1921년 임시정부 내각 총리 이동휘와 중화전국학생회 이사장 야오줘빈(姚作賓)을 소련에 파견코자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1920년 1월 신아동맹당을 개조하여 대동당(大同黨)을 결성하였다. 참석자는 중국 측의 야오줘빈·이메이위안(易梅园)·장멍주(張夢九)·쉬더헝(許德珩)·저우핑칭(周平卿)·천중푸(陳仲孚)와 한국 측의 신규식·여운형·이동녕·이시영 등이었다. 대동당은 삼평주의(三平主義, 민족평등, 국가평등, 인류평등)를 기조로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단체로 아시아 평화와 민족독립을 지향하였다. 대동당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자신의 중요한 혁명사업으로 간주하였다. 한인사회당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동휘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중국인 혁명가들과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연대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연대를 이어갔다. 1923년 2월 17일 의열단의 황포탄 의거로 희생된 영국인 여성 스나이더를 추모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925년 조소앙이 상하이에서 출판한 『김상옥전(金相玉傳)』의 서문을 썼다. 서문에 따르면 조소앙이 김상옥(金相玉)을 소개해줘서 그 자리에서 ‘인류 평등, 세계 대동’ 실천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1925년, 1928년, 1930년 상하이의 교민단이 주최한 3·1운동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한·중 연대를 강조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6년 장제스(莊介石)가 주도한 제1차 북벌에서 난창(南昌)을 점령하자 장시성(江西省) 수리국(水利局) 국장 겸 재무처장을 맡았다. 국민당 장시성 당부 개조 시에는 감찰위원과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장제스 독재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요직을 맡지 못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장제스의 직계인 삼민주의 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수장 다이리(戴笠)가 보낸 회유성 자금을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