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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비밀 4 -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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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과 역사와 환생(還生)
인간은 책을 통한 지식으로 인간이 이승을 정복하고 과학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급기야는 신(神)이 없다고 지식인들이 이승의 모든 인간을 속이고 있다.
과학이 이루어낸 물질(物質)이 인간의 육신을 편리하게 하고 이승의 모든 인간이 이
과학 문명의 수혜(受惠)를 누리고자 광분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을 복제하여 영원하고자 한다.
자주 일어나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神)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이 재앙을 막는다고
광신(狂信)하고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신비가 과학으로 풀렸다고 인간들은 자만하고 있다.
이십세기에 등장한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승에 전해지고 있는
사서(史書)들이 모두 왜곡되고 위조된 사기문헌(詐欺文獻)인줄 알면서도 인간들이 출세와 명예
그리고 부귀를 얻고자 책을 만들어 세상을 속이고 있다. 학문(學問)과 학자(學者)는 인간들을
속이고 속는 자들이다. 고대(古代)에서 현재까지 학자들이 저술한 모든 문헌들은 신(神)과
환생(還生)그리고 역사(歷史)를 인간의 육신(肉身)에서 보고 왜곡하여 기록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승을 인간들이 모두 파괴하여 놓고 환생의 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제 인간들을 멸망시키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다시 환생의 도를 닦고자 한다. 천상(天上)께서 천명(天命)하신
천기(天機)이다. 이승에 있는 모든 핵무기를 폭발시킨다. 북이 남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대적인
남침을 하여 통일을 한다. 미국이 멸망하고 북도 멸망한다. 이승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가락의 일부만 섬으로 남는다. 선조(先祖)의 땅 가락과 불노 그리고 모동은 천명을 받고 천도를
닦았던 곳이다. 삼천 오백여 년 전 현 중국대륙의 황하 강에서 하(河)나라의 왕이었던
황제(黃帝)께서는 서역의 여와(女渦)왕의 침범으로 전쟁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고자 다른
땅으로 이동하였다. 동으로 새로운 땅을 구하여 자리잡은 곳이 가락(伽洛)이다.
왕국을 한(漢)이라 하고, 천도(天道)인 환생의 도(道)로 교화하였다. 황제(黃帝)를 한가야(漢伽倻) 대왕이라고도 한다. 황제께서 천도를 깨우쳐 교화하였으니 드디어 환생에서 벗어나 신(神)되어
천상(天上)에 오르셨다. 황제(黃帝)의 신격(神格)은 천신(天神)이시다. 황제의 무덤은 문무대왕의
무덤에서 오 분 여 올라가면 있다. 한(漢)의 마지막 왕은 경지 대왕이다. 대진(大震)의 도선이
중국의 왕건을 자칭하고 중국의 역사인 고려를 흉내 내어 대진을 멸망한 다음 위계(僞計)로 경지
대왕을 살해하여 황제께서 세우신 천명의 왕국 한(漢)을 멸망시켰다.
심 상공(沁相公)이 경지 대왕의 시신을 불로동에 모시었고 후손들이 이 인근에서 천도를 닦았다.
심 상공의 손자 연(淵)이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여 천상의 신이 되었으므로 후손인
김문기(金文起)에게 이승이 저승의 환생의 도를 이루어 천상의 신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김문기는 세조에게 고려의 도종 즉 왕건이 대진족의 왕조(王朝)와 (여진족의 동진 왕조는
요(遼)가 멸망 시켰다) 대웅족의 왕조, 한의 왕조( 남이족의 왕조는 한의 성덕 대왕이 멸망
시켰다)를 멸망시키고 역사를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왜곡시켰다고 알리고 세종이 다시 인멸하고
고려의 역사도 왜곡시켰다고 밝혔다.
이 인간세상인 이승은 인간이 생로병사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환생하여 천도를 닦게 하여 신이 되어 천상에 오르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이에 놀란
세조는 김문기와 그의 제자들인 박중림 등 열 명을 노산군 복위라는 사건을 만들어 처형하였다.
김문기가 맏손자 김효현에게 천기를 알려주고 모동에 자신의 시신을 남몰래 옮겨 무덤을 만들고.
이 곳을 지키며 천도를 닦으라고 하였다. 김효현은 할아버지 김문기가 김계훈 이라고 개명하여
이 이름으로 천도를 행하였다 김계훈이 김문기가 문자로 기록하지 말고 문자도 배우지 말며
문서를 작성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였으나 문서하나를 만들어 후손에게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내 놓게 하였다. 그 문서가 바로 감결(鑑訣) 즉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鄭鑑錄)은 이십세기 말에 사는 후손에게 김문기가 선조이며 김문기의 무덤이 있는
모동으로 빨리 들어와 천명(天命)을 받고 천기(天機)를 문사(文士)들에게 알리라는 암호이다.
정감록의 내용은 우리의 역사가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여 경지 대왕에 이르기까지 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천명으로 천도를 행하였고, 왕건에 의한 역사왜곡은 고려조에서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어 모든 이 땅의 백성들이 천명과 천도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배역(背逆)의 책으로 선조들의 역사를 모욕(侮辱)한 것이니 이는 천신(天神)이신 황제를 모욕한 것이요 천장(天長)이신 문무대왕을 모욕하고, 천상의 모든
신(神)들을 모욕한 것이니 이는 천도인 환생을 모욕한 것으로 천벌인 조상벌(祖上罰)로 다스렸다.
이년 전부터 이 무서움을 알리었으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읽지도 듣지도 생각도 아니하고
무시하였으니 이는 인간들이 만든 지식의 속임수에 빠져들어 허상(虛像)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이십일세기는 없다고 하였다. 인간이 신을 모욕하였고 신을 무시하였으며 환생의 도인
부부 도(夫婦道)를 혼탁(混濁)시켜 성의 상품화와 성의 자유화가 인간의 권리인줄 망상하여
어린아이부터 늙은이까지 미쳐 날뛰고 있다. 이에 환생의 극벌(劇罰)로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인간들의 혼(魂)을 반혼 반귀(半魂半鬼)로 만들어 새로운 세상으로
환생시키는데 죄업이 무거운 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초목(草木)으로 나머지는 들짐승 날짐승과
벌레등으로 환생되는 데 물로도 환생된다. 인간이 멸망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매 천상의
모든 신들이 도로서 영력(靈力)으로서 조화(造化)로서 인연 있는 후손들 중에서 깨달은 자가
있으면 환생의 무서운 벌을 면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살아 있다. 역사는 신의 역사이고 환생의 영광이다. 이제 역사의 진실을 하나 하나
밝히고자 한다. 제일 먼저 밝힐 것은 소위 단종 복위 사건이다. 단종이란 왕은 조선조에 없었다.
문종의 아들 노산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 영월에 있는 노산군의 묘는 확실히 노산군의
시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노산군은 살아서 영월에 간 것이 아니고 죽어서 간 것이다.
노산군은 세조가 죽인 것이 아니다. 자살한 것이다. 그것은 병자년 초에 일어난 일이며 당황한
세조는 극비리에 심복인 홍윤성을 시켜 영월에 무덤을 만들었다. 곧바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이 일을 극비로 숨겼고 모든 사실을 꾸민 것이다. 세조는 애초에 노산군을 보호하여 성년이 되면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 동안 왕권 강화에 온힘을 다하려고 하였다. 정신 박약아인 노산군이
부왕인 문종마저 잃고 또한 김종서의 감금과 삼촌인 안평대군의 위압적인 태도에 겁을 먹었고
생의 허무함에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당시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왕위 계승권자인 노산군이 삼촌인 수양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김문기
선생을 비롯한 박중림,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이휘, 유응부, 유성원 선생 등은 세조에게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대권을 노산군에게 돌려 줄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병자년 6월
초1일에 세조에게 건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조회가 열리지 않아 다음을
약속하였으나 성삼문이 고집하여 집현전에서 토의하게 되었다. 결론이 나지않아 다음에 모일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김문기 선생과 박중림 선생은 집에 돌아갔으나 나머지 이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세워
토의하였다. 아침 일찍 대궐에 들어왔던 김질이 집현전에 성삼문 등이 밤을 새웠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들어오다가 노산군 왕위계승과 세조의 등극이 부당하다는 소리를
엿듣고 깜짝 놀라 그의 장인인 정창손에게 말하였다. 정창손은 이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세조에게
달려가 역모가 있다고 고하였다. 김질이 문밖에 있다 달아나는 것을 본 성삼문은 큰일났다
생각하고 이개에게 김문기 선생에게 알리라고 보냈다. 출근하던 김문기 선생은 사색이 되어
달려오던 이개를 보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이개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김문기
선생은 이개를 집현전으로 돌려보내고 집으로 되돌아와 맏손자인 효현에게 천명을 전달하였다.
이 천명이 계훈(繼勳) 이고 효현의 아명을 버리고 김계훈이라 하였다. 김계훈은 노산군과 같은해
4월 2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석으로 병자년 당시 거창현감으로 6월 12일 세조가 보낸
도사에게 목이 베어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권영금으로 태종의 외 증손녀로 열 두명의 아들을
낳아 몸이 쇠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천명을 들은 김 계훈은 충복인 막쇠 와
같이 몸을 피하였다. 의금부 부근에서 동정을 살피던 김 계훈과 막쇠는 6월 5일 두 사람의
시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누구인지 수소문한 결과 박팽년 선생과 유성원 선생임을 알았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두 분의 시신을 모시고 남산에 와 묻었다. 6월 8일 서소문 밖 저승고개를
넘어 처형장에 들어온 김문기와 박중림, 성승. 성삼문, 하위지, 이개, 이휘, 유응부 등의 순서로
목을 베었다. 삼일동안 이분들의 시신을 남산으로 모시고 와 묻어 주었다. 그리고 김문기 선생의
시신을 모시고 안음현 모동으로 들어와 지정된 장소에 묻고, 거창현으로 가 아버지 김현석
선생의 시신을 찾아 모시고 모동의 김문기 선생의 무덤앞에 묻었다. 그리고 오백여년 동안
계훈(繼勳)을 지키며 살았다. 이곳에는 대대로 후손들이 만들어 놓은 비결들이 있다.
그 중에는 감결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정감록이라 불리운다. 정도령이 나오고 앞으로 정씨 세상이
된다는 등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감결을
풀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감결이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천기이기 때문이다.
감결은 김문기 선생의 맏손자 김계훈 선생이 할아버지의 천도를 듣고 행한 것을 비결로 만들어
오 백년 후의 후손에게 깨우치려 한 것이다. 이 감결의 내용이 성삼문 선생 등이 절손(絶孫)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세조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정감(鄭鑑)은 모동의 김문기 선생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심(沁)은 바로
세상에서 불리우는 마의 태자의 본이름이다. 마의 태자는 왕건이 조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왕자를
상공(相公)이라고 하였다.
연(淵)은 마지막 상공이신 심(沁)의 손자이다. 김문기 선생이 바로 심 상공의 직계 후손이다.
김문기 선생의 아버지는 김보(金普)이고, 할아버지는 김목경(金牧卿) 이다. 김목경은 연의 칠 대
손이다. 연(淵)은 바로 한나라의 마지막 왕 경지대왕의 증손자이시다. 한나라의 위대한 대왕이시며
천명을 받아 대진(大震)의 곤명 왕을 멸하였고, 대웅 (大熊)의 개루 왕을 멸하셨던 대(大) 한(漢)의
영웅이 계시니, 그분이 바로 문무 대왕이시다. 경지 대왕은 문무대왕의 23대 손이시다.
왕건은 우리 한(漢) 나라의 모든 기록을 파멸하였고 역사를 위조하였다. 또 일연은 삼국유사라는
괴서(怪書)를 지어 왕건의 역사왜곡을 진실인양 꾸미었다. 왕건과 일연은 문무대왕을 훼손하기
위해 김유신과 또한 김춘추라는 가 인물을 만들었고, 문무대왕 능을 김유신 묘로 둔갑시켜
놓았다. 문무 대왕의 손자인 성무 대왕 능을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이라고 꾸며 놓았다. 이들은
또한 문무대왕의 아버지이신 흥무 대왕 능을 진평왕이라 날조하고 선덕여왕의 아버지라고
꾸몄으나 우리 한나라에는 여왕은 없다.
만덕 대왕은 문무대왕의 고조이시다. 선덕 여왕이라 능에 써놓았으니 역사의 왜곡이 어찌 이 것
뿐이랴 모두 중국 대륙에 있는 역사로 개조한 것이다. 문무 대왕은 우리 한(漢)의 개국시조이신
황 제(黃帝)의 87대 손이시다. 황제는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려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 곳
완산에 도읍을 정하시고 자손들에게 천도를 행할 것을 명하셨으나, 후손들은 허상의 도에 빠져
천명을 어겼으니 어찌 나라를 유지 할 수 있겠느냐. 왕건이 허도(虛道)로써 중생을 속이고
대진(大震)의 마지막 왕 미지왕을 살해했고 궁예로 둔갑시켰으며, 대웅(大熊)의 마지막 왕 경애
왕을 살해하여 견훤이라 둔갑시켰다. 우리 한나라를 신라로 둔갑시켜, 경지대왕을 불국사에서
살해하여 대왕의 목을 안압지에 던지었다. 대왕의 목과 시신을 수습하여 왕건의 눈을 피해
대구에 안장하였다. 한을 품은 심 상공은 동화사의 중이 되었으나 이내 환속하여 우리 한나라의
중흥을 꿈꾸었으나 허상임을 알고 천도를 행하려고 영주에 자리잡고 자손을 엄히 가르쳤다.
손자 심은 할아버지의 훈도에 따라 방방곡곡을 돌며 도를 행하였으니 그 자취가 마이산의 돌탑과
운주사의 천불 천탑 이다.
이 역사의 진실이 허상의 눈에 어두운 중생들에게 천상의 경고임을 알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천상이 있고 저승이 있으며 초라한 이승이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에 주인인 혼이 들어 있다.
환생을 깨달은 신들의 역사.
신들이 역사를 알려 주셨다.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김 문 기 (金文起)》
태조 이성계와 김목경
김문기(金文起)는 태조 7년10월8일(戊寅年) 한양(漢陽) (현 중구 오장중학교 후문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관기(金관其)이다.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
고려가 망하여 원(元)의 속방(屬方)이 된지 칠 십여 년 동안 고려 왕족들은 몽골인들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되어 각지를 떠돌고 있었다. 지웅도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
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 고려사는 고려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신(현종)을 공민왕으로 왕신의
승명(僧名)을 신돈으로 조작한 것이다. 현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온 김목경은 전적(典籍)관리로
있었다. 현종의 공신들이 실정(失政)을 계속하자 벼슬에 뜻을 버린 김목경은 야인으로 돌아와
칩거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김목경을 불러 개혁에 동참을 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김목경은 태조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태종이 직접 뽑은 충녕의 학우(學友) 김문기
이런 배경의 김문기가 태종의 눈에 들어 충녕을 보필하고자 직접 뽑은 것이다. 충녕은
정축생(丁丑生)으로 김문기보다 한 살 위였다. 같이 뽑힌 개국일등공신 조준의 손자는 병약하여
충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병사하였다. 김문기는 아명(兒名)이 생남(生男)이고
호(號)가 사선(士善)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김문기에게 밀명(密命)을 내렸고, 밀명을 수행
중에 사용하던 이름이 사발(士發) 그리고 사철(士哲)이다. 국내에서는 사철을 사용하였고 중국
대륙에서는 사발을 사용하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은 김문기를 불러 고려조에서
왕에게만 비밀히 전해지는 문서를 주며 연구하여 세종을 돕되 죽어서까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다.
이 비밀 문서는 고려를 만든 도종(道宗)이 사왕(嗣王)에게 몰래 건내준 자신의 출생과 고려를
세운 비화를 적은 비록(秘錄)이었다. 도종은 고려사에서 조작한 태조 왕건(王建)을 말한다. 왕건은
대진족(大震族)으로 괴산의 작은 절(현 각림사) 주지인 도광이 하녀를 겁탈하여 낳은 사생아이다.
왕건이 도광의 고향 김천 직지사에서 성장하면서 학문을 익혔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물을
배우며 많은 승려들과 교우 하였다.
대진국(大震國)과 금성(金城)그리고 금화(金化)
대진국은 온조(溫祚) 대왕이 이천 오 백 여 년 전에 압록강변 금성에 도읍하고 개국하였다.
성씨를 금(金)으로 하였다. 금성이 현 의주(義州)이다. 극명왕(戟銘王)은 여러 차례 한(漢)을
침범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급기야 아우 김유신(金庾信)의 계책을 받아들여
문무대왕의 서자(庶子)인 무극을 포섭하여 문무대왕을 시해하였다. 대노(大怒)한 문무대왕의 아들
천무대왕(天武大王)이 대군을 소집하여 대진을 정벌하려하자 대진의 조정은 극명왕을 생포하여 한
나라에 넘겨주어 천무 대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계획하였다. 이를 사전에 눈치챈 극명은 수하를
거느리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동진(東晋)이 대진을 정벌하러 수만의 군대를 보내오자 대진의
문주왕(文周王)은 금성(의주)를 포기하고 금화(金化)로 천도(遷都)하였다. 이 금화가 철원이다.
대진이 이천 삼백여 년 동안 지켜오던 그들 선조의 땅을 빼앗겼던 것이다. 왕건이 문주왕의
신임을 얻어 정사에 참여하였을 때는 개성도 동진의 땅이었다. 왕건은 모사(謀事)의 달인으로
문주왕을 꾀어 한의 경덕왕(景德王)을 암살하였다. 한의 경덕왕은 후에 왕건이 고려왕이 되어
시해한 한의 마지막 왕 경지대왕의 아버지이다. 왕건은 문주왕을 독살하였고 뒤를 이은 대진의
마지막 왕 미지 왕(美摯王)을 살해하고 고려를 세운 것이다.
【평양과 개성은 한번도 도읍 한 땅이 아니다. 고려 도종이 조작한 것으로 중국의 사서를 인용 한
것에 불과하다.】
동진(東晋)과 함주(咸州)
동진은 여진족의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나라이다. 동명왕은 성이 이(李)씨이다. 도읍한 함주는
만주의 목단강 유역이다. 황제가 한족을 이끌고 동진 할 때 일부가 만주부근에 남아
야인(野人)들과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생긴 부족으로 한족의 피가 조금 섞였으나 한족은 아니다.
동진은 강성한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부여(夫餘)를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요(遼)와
분쟁으로 위기를 느끼자 남하하여 대진을 쳐 개성 밑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대진이 왕건에 의해
멸망하자 동진도 요에 의해 멸망하였다.
대웅(大熊)과 개주(開洲)
대웅은 개주를 도읍지로 하였다. 현 부여이다. 개주를 벗어나 다른 곳에 도읍 한 적이 없다.
한때는 충남일대와 전북의 일부 그리고 경북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영토를
빼앗겨 부여 부근의 충남일대를 영토로 하여 나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대웅은
뚜렷한 시조가 없다. 여러 부족이 왕을 번갈아 가며 하다가 겨우 소왕국을 만들었다. 한의
문무대왕에게 패해 일본으로 도망간 개루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신하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개루왕은 정(鄭)씨 가문이다.
한의 광덕 대왕의 사위가 된 무(武)왕은 개루왕의 후손으로 정씨이다. 광덕 대왕의 힘으로 대웅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신의 조국 대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역사 그것도 변방의 역사에
있었던 고구려의 대를 계승하였다는 고려의 도종은 대웅을 염탐하고 있었다.
대웅의 신덕(神德)왕이 죽자 경애(景哀)왕이 대를 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도종은 경애왕을
암살하고 대웅을 멸망 시켰다.
남이(南夷)와 웅천(熊川)
웅천은 지금의 김해(金海)이다. 남해대왕이 웅천에 도읍하고 남이(南夷)를 개국하였다. 남이가
융성하였을 때는 부산일대와 경상도일대 그리고 전라도 해안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현 고령지방에 있던 소왕국(小王國) 서라벌(徐羅伐)을 정복하였다. 바다에 익숙했던 남이는
일본까지 진출하여 영토일부를 차지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남이는 끈임없이 한(漢)을
침입하여 괴롭혔다. 남이의 성왕(星王)은 한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가락까지 쳐들어 왔다.
이에 한의 성덕대왕(聖德大王)은 성왕을 건천으로 유인하여 건천성에서 섬멸하였다. 남이의
왕자와 일부 신하들은 일본으로 도망하지 못하여 일본의 식민지는 와해 되었다.
김해의 수로왕이라는 능은 남이(南夷)의 청루 대왕 능이다. 세종 21년10월4일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순시차로 김해(金海)에 이르러 친히 살펴보온즉,
읍내성[邑城] 서편 길 옆에 가락국 시조(駕洛國始祖) 수로왕(首露王)의 능침(陵寢)이 수전(水田)
가운데에 침몰되어 있었는데, 혹은 길을 내어 짓밟으며 혹은 마소를 방목(放牧)하기도 하오니,
다만 마음가짐이 소홀하고 행위가 무례한 것뿐이 아니옵고, 금제(禁制)하는 법률도 있사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수로왕이 비록 해변 한구석에서 나라를 세웠고, 또 알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사오나, 나라 다스리기를 1백여 년이나 하였으며, 나라를
계승한 것도 거의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신라나 백제의 시조에 비하오면 그 공이 비록 우열은
있사오나, 상고 시대에 있어서 농사를 힘쓰는 것으로 나라를 창립하여 백성들이 그 은덕으로
한편에서 편안히 살았사오니, 비옵건대, 신라 시조를 숭앙(崇仰)하던 예전(禮典)에 의하여 그
제도와 예절을 참작하여 능 옆 사방 50보 안에 있는 밭은 모두 묵히게 하여 갈고 심는 것을
금지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구역의 경계를 정하고 표석을 세우게 하옵시되, 수호하는 1, 2호(戶)를
선정하여 때때로 소제하게 하와 포장하는 예절을 베풀게 하옵소서. 하매, 예조로 내려보내니,
예조에서 아뢰기를,수로왕 능침에 표석을 세우고 수호하는 사람을 두게 할 필요는 없으나, 단지
사면(四面)으로 각각 30보씩을 한정하여 밭 갈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려(高麗)와 한성(漢城)
도선(道詵)은 당(唐)에서 돌아오자 대진의 정세를 분석하고 동진으로 들어가 정세를 엿보았다.
도선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대진으로 돌아온 뒤에 문주왕의 초빙에 응하여 동진의 정세와
대진의 옛 강토를 회복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비웃음과 문주왕의 우유 부단에
실망하였다. 이 후 한(漢)으로 들어 간 도선은 관리들의 눈을 피해 선교(禪敎)를 전도하며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호태 왕 비석을 세우다.
야심에 눈이 어두운 도선은 문주왕을 다시 찾아가 대진의 옛 도읍지인 의주 부근에 대진 땅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워 놓고 오겠다고 하였다. 문주왕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쥐겠다는 속셈이었다.
도선은 심복들인 승려들을 이끌고 동진 땅이 된 의주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여 문주왕의
고조(高祖)인 동천왕능 인근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대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아니 하고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사서를 인용한 비문으로 만들어 놓고, 도선이 이 땅을 수복한 뒤에 자신의
위명(威名)을 떨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도선은 고려를 세운 뒤에
한 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다.
도선이 고려를 금화에서 세우다.
도선은 선교(禪敎)의 승려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쥔 뒤 왕 미지(美摯)를 시해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왕이 된 도선은 승명을 버리고 당나라에 있었던 왕건(王建)을 숭모하여 자신도
왕건이라고 하였다. 왕건은 금화에서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다른 곳으로 왕궁을 옮기지 않았다.
왕건은 당에 유학 가서 배운 풍수(風水)에 조예가 깊고 심취하고 있었다. 평양은 도읍지가
아니었다. 왕건은 대진의 모든 역사를 없애고 대진을 고구려로 하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이름만 지어놓았다. 이 평양의 지명은 후대에 현 평양 땅으로 명명한 것이다. 왕건은 자신의
왕명을 도종(道宗)이라 하였다. 이는 자신이 불도(佛道)를 해탈하여 석가가 되었고, 선도(禪道)의
창시자라 하며 사위(嗣位)를 받는 자는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물을 파괴하고 신라로 조작하다.
한(漢)의 기(氣)를 꺾는다고 가락의 왕릉을 흙으로 덮었고, 사찰들을 허물고 가락의 한족을 몰아
냈다. 가락은 백여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한(漢)도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한족의 전통은
천도(天道)와 천신(天神)에게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불도(佛道)보다 천신의
천도를 더 중요시하였다. 한 나라 천신의 주요 제사 터인 합천(현 영암사지―이곳은 의상 대사가
주석 하였고 석탑에는 의상의 사리가 있다.)의 사사(寺社)를 파괴하였다. 현 원주 부론의
법천사지도 천신의 제사 터인 것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비문을 갈아 없애놓고 중국의 사서를
이용하여 지광국사의 현묘탑으로 하여 신라 탑비인 것처럼 새겨놓았다.
선승들의 승군
왕건의 선승들을 한 나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고려백성으로 선도하는 한편 반란을
방지하고자 선승들이 승군(僧軍)들을 조직하게 하고 지휘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개국의 일등
공신인 선승들이 권력을 가지자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알았지만 이들을 제거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을 알았다.
도종(道宗)의 자식은 없다.
왕건은 자신이 수태(受胎)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많은 비빈(妃嬪) 들이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거의 그의 공신들인 선승들의 자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왕건은 알고
있었지만 내색 할 수는 없었다. 만일 공개하고자 한다면 왕건이 죽음을 당하고 애써 이룩한
고려는 멸망한다는 것을 왕건은 계산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는 것뿐이다.
왕건은 이렇게 무섭고 교묘(巧妙)한 사술(詐術)의 명수이다.
도종의 유훈
왕건은 장자(長子)를 사왕(嗣王)으로 하여 유훈을 만들어 주고 비장(秘藏)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말하고 대진을 멸하여 고구려의 대를 계승하는 이유와 한(漢)의 모든 것을
없애고 신라로 조작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땅의 과거 역사를 삼국의 고구려 신라
백제로 할 것과 유물유적은 삼국의 명칭으로 하라고 하였다. 대진(大震)이 북으로는 압록강의
유역에서, 남으로는 한강의 유역까지 통치하였지만, 중국과 만주에서 일어난 강대한 국가들이
남진하면 이들을 막으려 대진 족은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재산을 빼앗겨 굶주리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그러나 한족들은 대진 족이 외적을 막아 싸우는 동안 평화를 누렸으면서도 대가는
고사하고 인사도 할 줄 모르는 오랑캐이다. 이 한족들은 자신들이 천신의 후손이라 하면서 우리
대진 족을 북이(北夷)라고 멸시하였다. 북쪽의 만주나 중국에서 강대한 국가가 일어나도 고려가
중국 땅에서 강대한 국가였던 동이(東夷)족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하면 누가 깔보고
쳐들어오겠는가 하였다.
한족들을 하층민으로 하여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고, 관리와 승려로는 절대 뽑아서는 안 된다.
대진 족이 승려와 지방 관리까지 도맡아 하되, 여진족을 포용하여 하급관리로 채용하여 한족과
대웅 족 그리고 남이 족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하였다. 한의 영토였던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절을
짓지 말고, 대웅의 부여에도 절을 짓지 말라고 하였다. 고려의 도읍(都邑)으로 금화(金化)는
이익이 없고 또한 불편한 곳이니 천도(遷都)를 하되 한의 영토였던 곳은 안 된다.
옛날 도읍인 금성(金城)은 이미 쇄기(衰氣)하였으니 북쪽도 안 된다.평양과 개성은 도읍지가
아니니, 평양을 허도(虛都)로 만들어 놓고 고구려의 수도로 하고, 개성은 고려의 허도(虛都)로
하라 하였다. 고려의 도읍지로는 대진의 영토였던 한강에 있다. 한성(漢城)에 도읍 하라. 그리고
한성(漢城)과 한강(漢江)이라고 명명하라 이는 고려 땅에서 천신(天神)에게 수천년동안 제사하여
음복을 받은 것이 한족이므로, 이 한(漢)자를 사용하면 천신(天神)의 음복(陰福)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지막에 써놓기를 왕건이 선도(禪道)를 깨달아 생불(生佛)이 되었으니, 죽으면 바로
화장(火葬)을 하고, 사리가 많이 나올 것이, 사리를 김천 직지사의 삼층석탑 옆에 또 하나의
석탑을 만들어 봉안(奉安)하라 하였다. 그리고 왕건의 가짜 능(陵)을 허도(虛都)인 개성에 만들라고
하였다.
선종(詵宗)의 한성 천도
왕건 즉 도종(道宗)이 죽자 사왕(嗣王)으로 선종(詵宗)이 왕위에 오르니 두 번째 이다. 선종은
한성(漢城)으로 천도(遷都) 하였다. 한성으로 도읍 한지 얼마 후 선종에게 괴이(怪異)한 일이
있었다. 왕비가 아이를 낳았는데 손이 없고 얼굴에 눈, 코, 입이 없었다. 아이는 죽어 나왔다.
진광종(震光宗)
제 4대인 진광종(震光宗)은 한족을 아주 멸시하였다. 가락의 이름을 경주로 개칭하고 한족들을
동원하여 능들을 흙을 부어 산처럼 만들었다. 이어 진광은 한의 절 탑을 들어내어 사리와 봉안
품들을 수거하여 왕궁에 보관하였다. 한족에 대한 학대와 멸시로 분노가 극에 오른 한성의 어느
절 노비였던 가도(假賭)가 노비들을 충동질하여 주지 승을 살해하였다. 이어 관아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관리들을 살해 한 다음 왕궁까지 쳐들어가 진광종을 살해하였다. 궁성을 불지르고도
성이 모두 불타오르자 이들은 고려가 멸망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권력자인
선승(禪僧)들과 대소 관원이 급거 개성에 모여 승군(僧軍)을 편성한 다음 한성으로 보내
토벌하였다. 잿더미의 한성을 재건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임시 도읍하고 제5대 왕으로
황신종(凰薪宗)이 왕위에 올랐다.
황신종(凰薪宗)
황신종은 유화 정책으로 일부 한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선승들은 한족 등의
불평분자들을 색출하여 북방으로 옮겼다. 동진이 이미 요에 의해 멸망되어 황해도 이북지방이
요에 접수되었으나 사람이 없어 황폐하여 있었다. 금이 침입하다. 만주에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야인족과 여진족과 합쳐 금(金)을 세웠다. 금은 고려에게 동진의 땅을 반환하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가 고구려의 대를 계승한 나라로 오히려 압록강 변의 땅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금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사칭(詐稱)하는 고려에 분개한 금의 왕은 고려를
정벌하러 대군을 보냈다. 고려는 한성이 함락되기 전 항복을 하고 사과하였다. 왕건의 유훈으로
고구려를 사칭한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금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금의
침략으로 고려는 피폐 하였다. 금이 망하고 송이 건국되었다.
공평종(恭平宗)과 고종(高宗)의 왕위 싸움
혜종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왕운(王暈)과 왕초(王椒)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왕운이
왕위를 자신하고 대진의 도읍지인 금성으로 천도할 것을 선언하고 금성으로 떠났다. 이 왕운이
공평종(恭平宗)으로 조정의 반대를 묵살하였던 것이다. 선승과 조정신하들은 대경 실색하고
왕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종(高宗)이다. 금성에 가는 도중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왕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고종을 치고자 군사를 모집하였다. 왕운의 부하가 고종의 선승들로부터
밀명을 받고 왕운의 목을 베었다.
고려의 신분제도 골품제(骨品制)
고려시조 도종은 당에 유학하여 선교를 배운 승려들을 이용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불교국가이며 최고 권력은 승단(僧團)에서 나왔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 승려들은 도종의 명으로
한의 각 지역에다 종문(宗門)을 개설하고 주석 하면서 백성을 교화하며 한편으로는 승군을
강화하고 권력을 행사하였다. 각 종문의 선사들이 모여 왕위의 계승을 결정하고 국가 대사를
결정하였다. 고려는 대진족 중심의 승려국가로 골품제와 구 두품제의 신분계급사회이다. 왕건의
사왕(嗣王)출신과 왕건의 공신 승려들의 사자(嗣子)출신을 부처가 된다하여 성골(聖骨)이라 하였고,
왕건의 후손과 일반 공신들의 후손을 보살이 될 것이라 하여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고승들을
구품에서 칠품으로 하고, 대진 족 중에서 관리를 뽑아 육 품에서 사 품까지로 하고, 삼 품 이하는 여진족에서 뽑았다. 각종 노역(勞役)은 한족(漢族)과대웅족(大熊族) 그리고 남이족(南夷族)이
하였고, 또 이들을 노비(奴婢)로 만들기도 하였다.
고려의 승군 위안부 화랑
승려들이 문란하고 권력을 마구 휘둘러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그칠 줄 몰랐다. 한족들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진족과 여진족
부녀자에게까지 성폭행이 일어났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승려들의 폐해(弊害)를 줄이기 위해
화랑(花郞)제도를 만들었다. 대개 한족의 미모(美貌)의 계집애를 승군의 규율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징집하여 승단에 배속하였지만 사실은 승려들의 성 노리개로 뽑은 것이다. 승려들의 권력이
부패하고 정도(正道)를 잃어 백성들의 원망이 높고 특히 권력의 중앙에 진출이 막혀 있는 일반
신하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이러하던 차 왕궁의 하위 계급에 있던 정중부가 젊은 선승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일반 문무직의 신하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이들과
싸움이 벌어 졌다. 싸움이 확대되자 선승들은 승군들을 동원하여 정중부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모두 처형하였다. 그러자 민심이 흉흉하여 승려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권력 승에 대한 문신들의 반란
당시 육 품으로 일반인으론 최고위에 있던 김충이 명종( 宗)에게 승려들의 정치개입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골품제와 승군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명종은 김충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소문무 관원들이 옥을 파하고 김충을 구출한 다음 궁으로 쳐들어가
명종을 살해하고 선승들을 주륙(誅戮)하였다. 김충은 자신과 친밀한 왕전(王塡)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경종(高敬宗)이다.
고경종은 골품제를 폐지하고 승군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종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종족을
고려 백성으로 하는 동일화 정책을 펴서 관리를 차별 없이 등용하는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지명(地名)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를 실시하였다. 고려시조 도종이 고려를 불교국가로 만들어
승려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였고 북방의
국가들이 역사를 사칭한 죄를 물어 고려 강토를 여러 번 유린하였다. 승려들이 불도를 외면하고
권력에 빠져서 고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여 상하민심이 흉흉하였다.
지눌 대사의 민심 잡기와 승풍 바로잡기
민심을 잡고자 고심하던 고경종은 김충으로부터 지눌이라는 선사가 고려불도를 외면하고 개성
근교의 산중에서 홀로 여러 해 동안 수도하고 있는데 도력이 높으니 이 선사를 불러 고견을
듣자고 하였다. 지눌은 고경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불승(佛僧)들을 재교육시키는 한편 엄한
계율로 불도(佛徒)들을 교화하였다.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승려와 신도들을 불심에
기울이게 하였다. 순천 송광사는 이때 잠시 들렸었고 그 외의 인연은 없다. 지눌의 노력에
고려사회는 차츰 안정되었고, 개성인근의 암자에서 말년을 보낸 지눌이 입적(入寂)하였다. 세속의
나이 89세이다. 지눌은 한족(漢族)의 후손으로 성은 박씨로 하였다.
원이 고려를 멸망시키다.
고려가 건국이래 군사조직을 승군으로 하여 일반군사들은 유명무실하였었다. 고경종의 승군
혁파로 무관조직을 만들어 무사를 양성하였다. 이 무사들은 북방에 살던 대진족과 여진족 출신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왕명보다는 권세 가에 충성을 하였고 차츰 사병화가 되었다. 국가의
근간인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중국의 북방에서는 여러 종족이 나라를 세웠다가 망하는
역사가 반복하고 있었다. 그중 몽골 족이 세운 원(元)나라는 고려의 기회주의에 분노하여
대군(大軍)을 보내 고려를 멸망시켰다. 고려가 송(宋)에 치우쳐 원나라가 요구한 사서(史書)를
보내지 않고 묵살한 사건이 있었다. 고려 시조 도종의 잘못된 유훈이 결국에는 고려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북방의 여러 종족들의 원한을 품게 하였고
중국도 좌시 하지 않는 중대한 문제였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옛 영토가 고구려의 후손들과
여러 종족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나라도 이 문제에 대해 고려의 해명을 듣고
싶었으나 묵살한 것이다. 원의 대군은 순식간에 쳐들어와 고려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도읍인
한성을 점령하고 고려왕 효종(孝宗)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고려는 시조 도종이 건국하여 효종까지 32대 사백 삼년 동안 존속한 것이다. 원의 장수는 효종의
아들 왕주(王綢)를 왕으로 세웠다. 충선왕(忠宣王)이다. 그러나 원나라 황제가 보낸 원왕(元王)이
충선왕을 원나라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고려가 멸망 한 후 이 땅은 원의 속방(屬邦)이 되어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원왕(元王)들이 통치하였다. 명(明)에 의해 원(元)이 망하자 원 왕과 몽골
족들이 급히 도망쳐 몽골로 사라졌다. 이 때 그들의 사초를 가지고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원이 망하고 고려를 재건하다.
현종(顯宗)은 여진족
원왕이 도망치자 고려의 벼슬아치들이 고려를 재건하고자 고려왕의 후손을 찾았다. 고려 왕건의
후손으로 찾은 것이 승려(僧侶) 지웅(志雄)으로 속명이 왕 신(王辛)이었다. 왕신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현종(顯宗)이다. 현종이 왕이 되어 몽골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인재들을 과거를 불문하고
많이 등용하였다. 원나라 당시 원경(元京)에는 고려인은 물론 고려로 귀화하지 않고 함경도와
만주 등지에 남아 있던 여진족들이 모여들어 권문세가의 눈에 띄어 관리가 되겠다고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이 망하자 고려의 한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때 이 인임도 한성으로 돌아와 관리로 등용되었고, 지위도 올라갔다. 현종을 만나보고 깜짝
놀랐다. 이 현종이 이 인임의 먼 일가로 조상이 여진족이었다. 지웅이 일찍이 출가하면서 자신이
왕건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하였고, 또 왕건의 후손으로 행동하고 다녔으며, 문서도 조작하여
지니고 있었다. 현종도 놀라 이 인임의 입을 막으려고 지위도 올려 대우하였다. 원이 망하고 명이
중국에 들어섰으나 북만주 일대에 명의 손길이 제대로 못 미쳐 무주공산이 되어 치안이 불안하자
일부 야심을 가진 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무장하고 각 지방을 약탈하였다. 이들 일부가 고려로
들어와 약탈 방화하여 현종의 조정이 개혁의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현종이 여진족의 후예임을 알고 더욱 현종의 고려를 깔보았고, 대규모로 침투하여
개성까지 쳐들어 왔다. 명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만주일대의 치안을 확보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종은 자신이 여진족이며 가짜 왕건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돌자, 이 인임의 짓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인임이 만주의 야인들과 내통하여 고려를 침입하여 현종을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하였다는 이유로 이 인임을 처형하였다. 이때 여진족 출신의 관리를 이 인임의 일당이라고
처형하였다. 조정의 중신들은 야인을 소탕하여 화근을 뿌리 뽑자며 만주에 출병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력으론 역부족으로 탁상공론 일뿐이다. 남쪽에서는 고려
개국이래 하층계급으로 몰락한 한족과 남이족 등이 현종의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인임의 정변이후 이성계는 자신도 여진족이므로 현종의 숙청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성계는 현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불안한 이성계는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궁성에 잠입하여 현종을 시해하였다. 그리고 현종의 아들 왕양(王讓)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을 반대하던 최영을 비롯한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이 왕양이 순종(舜宗)이다.
왕건이 숨긴 역사의 현장을 가다.
한(漢)과 가락(伽洛)
한(漢)나라는 가락에 도읍 하여 이천 오 백 여 년 동안 존속한 나라로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왕국이다. 가락은 현 경주의 옛 이름이다. 시조(始祖) 한가야(漢伽倻)대왕은 이름이 림( )이다.
성은 수( )씨이다. 중국 대륙에서 문명을 떨쳤던 한족(漢族)의 하(河)나라가 서역의 서만(西蠻)족이
대거 침공하자 하(河)의 태군대왕(太君大王)은 싸움을 피하여 동진(東進)하였다. 따르는
한족(漢族)은 육십 여만 명으로 약 삼분의 일정도 였으나 일부는 만주에 남았고 또 일부는
함경도로 떨어져 나가 경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십 오륙 만명이었다.
경주를 가락으로 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하의 태군 대왕이며 한의 시조이신 한가야 대왕이
중국에서 자신들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黃帝)이다. 여와가 바로 황제의 하 나라를 침공한 서만의
대왕이다. 이 여와 족의 후손 무왕이 주(周)나라를 개국한 것이다.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도
왜곡 조작한 것이다. 경지 대왕(擎摯大王)은 고려 도종(왕건)이 술수(術數)를 써 왕사(王寺)에서
살해되었다.
(왕사는 현 불국사이다) 경지 대왕 능은 대구 불노동 고분군(古墳群) 안에 있다. 문무 대왕 능은
현 김유신 능으로 되어 있다. 김유신은 대진의 극명왕의 동생으로 문무대왕을 진천으로 유인하여
시해(弑害)를 하게 한 자이다. 현 진천 태령산 밑의 김유신 생가로 되어 있는 곳이 문무 대왕이
시해 당한 곳이다. 문무 대왕의 이름은 태( 太)이다. 문무대왕은 대웅(大熊)의 진흥왕(眞興王)이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물리치고 전주까지 추격하여 진흥왕을 죽이고 전주를 함락하고 영토로
삼았다. 진흥왕의 아들 개루왕(蓋屢王)이 다시 한(漢)을 공격하자 문무대왕이 반격하여
섬멸하였다. 이에 놀란 대웅의 신하들이 반기를 들자 개루는 일본으로 도망하였다.일본으로
도망간 개루는 와신상담 끝에 재기하여 일본의 왕이 되었다.이 개루가 일본의 시조라고 불리
우는 초대 천황이다.
이성계의 순종
순종은 명목상의 임금으로 이성계가 모든 권력을 갖고 왕권을 행사하였다. 이성계는 순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사실상의 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군대를
보내 진정시켰고, 원왕 조정의 신료(臣僚)들과 대소 사찰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였다. 이러한 이성계의 전횡(專橫)에 불만을 품은 불교의 선승들과 정몽주를 비롯한
문신들이 순종에게 이성계를 조정에서 내보내어 왕권을 회복하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순종이
정몽주에게 은밀히 밀서를 보내어 이성계를 체포하여 일당을 숙청하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앞장서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성계에게 밀고되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성계는 정몽주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얼마 후 순종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명나라에 정도전을 보내 이성계가 중국 당나라의 변방인 신라의 후손이며, 고려가 이미 왕씨가
절손 되어 망하였으므로, 고려의 온 백성과 신민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고려이전의
옛 사서를 상고하니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으므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고, 조선는
대대로 중국의 속방으로 사대(事大)하고, 중국황제의 신민(臣民)으로서 조공(朝貢)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후예이다.
이성계는 동진(東晋)의 여진족으로서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동진의 도읍에서 살았으나, 이성계의 조부가 도읍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함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이웃과 불화가 생겨 오랜 다툼 끝에 이웃을 죽이게 되자 만주로 도망쳤다. 홀로
남은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웃들과 왕래를 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부인이 이성계를 낳고 일년도
안되어 죽자 어린 이성계를 데리고 만주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방황하다가 원의 수도에 이르러
먼 일가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원이 망하자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는 고려로 들어가기로
하고 원경(元京)을 떠났다. 가는 도중 이성계의 아버지가 급환(急患)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을
염(殮)할 사이도 없이 도적떼가 들이닥쳐 이성계를 비롯한 일행을 잡아 떠났다. 도적들은 사람을
붙들어 노예로 파는 자들이었다. 이 도적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이성계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시신은 없어진 뒤였다. 고려로 돌아와 관리가 되어 권력의 중심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던 이성계가 드디어 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인 것이다.
이성계의 혈통에는 정신질환이 유전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병이 있었다. 정신병과 간질로 장남이 이것으로
죽었고 차남도 이 증세가 있었으나 심한 것은 아니다. 태조는 태종을 후계자로 정하고 모든
정사를 태종의 자리를 굳건히 하는데 힘썼다. 태조의 개국과정을 미화하고 고려의 혼란과
고려왕들의 문란하고 퇴폐한 생활로 조작하여 고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조작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방이 되어 몽골 족의 지배를 받은 것을 숨겼다. 고려시조 도종의 유훈을
조작하여 진실을 숨겼다. 고려가 불교국가로 승려들이 집권한 사실도 없애고 고려이전의 역사를
중국의 사서들로 위조하기도 하였다.
정도전을 토사구팽 하다.
태조는 오랜 동안 자신을 도운 정도전을 의심하였다. 정도전이 태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태조의 남모를 비밀을 없애고 사실을 왜곡하여 조작하고 개국을 도운 일등공신이지만 태종이
정도전을 신하로 부리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에겐 정도전이 걸림돌인 것이다.
이러할 때에 태조의 비와 태종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사소한 의견이 서로 오해를 한 것이다.
이 오해가 증폭되어 태조의 침실까지 이르자 태조는 이것을 이용하여 한성을 나왔다. 개국공신인
충복들로 하여금 정도전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자신의 왕비와 왕자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 무서운 살육현장을 태종은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고 아버지 태조의 잔인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태종은 역사의 무서움을 알았고 왕권에 걸림돌이라면 자신의 자식도 서슴없이 죽여야
된다는 태조의 무정(無情)에 가슴아팠다.
양녕의 유전병
이것이 태종의 가슴에 못이 박혔고 훗날 양녕과 효녕을 살려둔 계기가 되었다. 양녕과 효녕이
정신질환이 유전되어 발병되곤 하였지만 심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왕위에 올라 통치하기엔 적합지
않아 양녕을 폐 세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았고 이어 선위하여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세종의 자식들에게는 다행하게도 유전병이 없었다.
노산군 에게도 유전병이.
그러나 장자인 문종의 아들 즉 노산군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정신병이 유전되어 있었다.
상심한 세종은 노산군을 인적이 드문 궁궐 한편에 유페 하여 놓고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극비로 함구령을 내려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세종의 각별한 신임과
비밀임무를 수행한 어릴 적부터 수학동기 김문기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
김종서의 시기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김종서는 천성이 시기심이 많아 세종의 측근인 김문기를
질투하여 모함을 세종과 문종에게 하였다. 김문기는 조정의 관직을 대부분 의정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는 세종의 명으로 의정부에 적을 두되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세종의 밀명을 받아
수행하며 수시로 세종과 독대하여 토론하였다. 이 밀명은 고려조와 고려조 이전의 역사 왜곡과
중국 사서들과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현지를 답사하는 일이었다. 세종과의 관계를 눈여겨본
김종서는 김문기를 모함하였으나 세종이 묵살하자 내심으로 원한을 산 것이다. 이어 문종에게도
김종서는 김문기를 모함하여 지방에 한직으로 보낼 것을 간하였다. 문종은 세종과 김문기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김문기가 권력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인 것을
세종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문종의 실수
그러나 문종은 김종서의 집요한 건의에 김문기를 찾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이 간곡하게 내린
유언인 신하를 믿되 속까지 믿지 말며 어려운 일은 김문기와 상의하되 속마음을 말하지
말라하였었던 세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유언을 잊고 김종서를 신뢰하여 마침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문종이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세종이 말한 속마음이란 바로 노산군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세종은 노산군을 치료하여 문종의 대를 잇게 하려는 원념(願念)이었고, 노산군의
심신상태(心身狀態)를 신하들이 알게되면 종사(宗社)가 위태롭기에 노심초사 하였던 것이다.
노산군의 신병(身病)을 문종은 김종서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문종을 김종서가 독살하다.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김종서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문종을 독살한 것이다. 그리고 노산군을
자신의 감시 하에 두고 세종의 아들들을 이간하는 공작을 단행하여 안평대군을 휘하에 두었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대군만 살해하면 김종서의 나라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이성계의 조선을 구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아들로 대단한 효자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실행하였고 더구나 왕위를 넘보거나 왕권에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문종을 도와 문종의 왕권 유지를 돕고 있었으나 문종이
갑자기 죽고 김종서가 문종의 유시를 빌미 삼아 권력을 쥐고 자신을 비롯한 종친들의 대궐
출입을 막으며 안평대군과 자신을 이간(離間)하여 불화를 낳게 하자 종사의 앞날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종서를 찾아가 살해하고 그 일당을 잡아 처형한
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김종서의 일당으로 체포된 자 중에 문종의 환관으로 김종서에게
포섭되어 내통하고 있던 자를 국문하자 뜻밖에도 문종의 독살이 밝혀 진 것이다. 수양대군이 이
사실을 함구하게 한 다음 여러가지 고민 끝에 김종서도 죽였고 문종의 능까지 조성되어 있어 이
사실을 공표 한다면 왕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심하고 비밀로 하였다.
노산군이 자살하다.
김문기는 노산군이 정신질환에 간질까지 있어 극비리에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은 백관들의 조회에서 노산군이 아직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니 자신이 노산군을 대리하여 정사를 할 것이며 노산군이 열 여섯 살이 되는 병자년에
왕위에 올라 문종의 대를 잇게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백관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노산군의
차도가 나아지기는커녕 병이 악화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노산군을 친자식 같이 정성을 다해
돌봤으나 애쓴 보람도 없게 되었다. 노산군이 시중드는 자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목을 메어
자살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놀람은 이만 저만 아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극비로 하여 심복인
홍윤성에게 노산군의 시신을 영월로 이송하여 장사 지내었다. 김문기의 역사가 천도임을
알리려던 계획은 노산군 복위사건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대소 신료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김문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수양대군이 병자년이 되어 봄이 다되도록 조회도 열지 않고
노산군 왕위 문제에 함구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궁내에 돌아다니고 있어 수양대군에게 만나 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김문기는 그 동안의 모든 사실을 박중림과 홍윤성에게 말하고 노산군의 왕위문제와 자신의
가문이 멸족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역사의 진실 즉 이 땅의 모든 역사가 조작되어 있고
세종과 자신이 이 사실을 덮으려고 모든 실록을 다시 꾸몄으며 전조(前朝)의 왕실이 비밀히
간직하였던 사서들을 함흥으로 가지고가 불태워 없앴다는 것을 조회에서 밝히겠다고 하였다.
이에 홍윤성은 침묵을 지키다가 유월 일일에 조회가 열릴 것이라고 하며 자신은 이때 참여하지
않으며 자신의 역할이 후일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박중림으로부터 김문기의 말을
전해들은 박팽년과 성삼문은 자신들도 동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회가 열리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자 김문기는 다음 조회 때에 하기로 하고 모임을 갖지 말고 헤어질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토론에 여념이 없던 차에 김질의 눈에 띄어
정창손과 음모(陰謀)하여 이들이 역모(逆謀)하였다고 수양대군에게 고발한 것이다.
6월2일 출근하던 김문기는 길에서 기다리던 이개를 만나 집현전에서 박팽년 등이 체포되었음을
알았고 집으로 돌아와 맏손자 김효현에게 계훈으로 유언하고 충복인 막쇠와 함께 남의 눈에 띠지
않게 집에서 빠져나가도록 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밤늦게 서야 의금부 도사들이 들어 닥쳐
압송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박팽년이 옥사하자 김문기는 수양대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은 고문으로 피투성이인 김문기를 궁안 자신의 거처로 불러 술상을 차려 주고
사람을 물리 쳤다. 자신의 아버지 세종을 생각하여 김문기를 대우한 것이다. 수양은 김문기가
역모를 하였다는 고변을 믿지 않았다. 김문기는 세종과 자신이 하였던 역사의 진실을 모두 없앤
과정을 말하였다. 역사는 신의 것으로서 인간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여 없애면 그 무서운
조상벌로 징벌한다고 구체적인 고사(古史)를 인용하여 말하였다.
수양대군의 반응은 세종의 비밀을 알고 있는 김문기 등을 처형하고. 부녀자의 절개는 지켜
주겠다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수양대군은 한참 후에 김문기를 바라보며 자신도 어쩔수없이
이 무서운 사실을 없애야 하므로 김문기 등을 처형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부녀자들에게는 수치스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이 때
수양대군에 의해 처형당한 박중림 성승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이휘 유응부 외에
끝까지 밝히지 않는 동료는 홍윤성과 최항이 있다. 홍윤성은 참가하지 않고 뒤처리를 하겠다고
하였으며 최항은 상중(喪中)으로 시골에 있었다.
그렇다면 김문기는 누구인가?
김문기(金文起)는 태조 7년 10월8일(戊寅年) 한양(漢陽) (현 중구 오장중학교 후문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 관기(金관其)이다.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
지웅은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 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 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현종(顯宗,992∼1031)은 고려 제8대왕으로 1009년으로부터 1031년까지
재위한 왕으로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었던 왕이다. 기록상 현종은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이다. 아버지는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인
태조의 여덟 째 아들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대종 왕욱의 딸
황보씨로-헌정왕후(獻貞王后: 孝肅太后) 둘 사이의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종이 병약하여,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현종을 죽이려고 애를 썼다. 그들에 의해 억지로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현종은 원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는다. 이중 원성왕후 김씨와 원혜왕후 김씨는 나중의
제9대 10대, 11대의 왕인 덕종, 정종, 문종을 낳았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1018년(현종 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 (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귀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현종의 대 거란정책은 거란의 제 2차 침입(1010년)과 제 3차 침입(1018년)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 6주의 반란을 요구하여 제3차
침입을 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하였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게 귀주(龜州)에서 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하여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고려는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ㆍ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현종은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세로 생을 마감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조선 왕조실록 초기 왕조에 등장하는 김문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종 18년 <종사랑 예문 검열(從仕郞藝文檢閱) 신(臣) 김문기(金文起)>라는 글이 춘추관
보고서에 처음 보인다. 태종에 의해 스카웃된 문기가 이 해에 첫 관직에 발령난 기록이다.
*세종 12년 김문기(金文起) 대교(待敎)로 삼다.
*세종 13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김문기를 보내어 《태조실록(太祖實錄)》《공정실록(恭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 세종 18년 김문기(金文起)를 좌헌납(左獻納)으로, 민효열(閔孝悅)을 우헌납(右獻納)으로,
이종검(李宗儉)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삼았다.
*세종 19년 김문기(金文起)로 사간원 좌헌납을, 이사검(李思儉)으로 경상좌도 도절제사 겸
판울산부사(判蔚山府事)를 삼았다.
*세종23 앞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유의손(柳義孫)ㆍ 응교(應敎) 김문(金汶)ㆍ 경창부 소윤 (慶昌府少尹) 김문기(金文起) 등이 문과의 한성시(漢城試)를 뽑을 때, 거자(擧子) 두 사람이 같은
성명(姓名)을 가졌었다. 의손(義孫) 등이 그 거취를 잃어 아비의 이름을 잘못 쓴데다가
기타 분수(分數)를 잘못 계산한 것도 몇 사람이나 있게 하였으므로, 유사(攸司)에 내려 이를
핵실(劾實)하게 하였다.
*세종24 의정부와 육조(六曹)에서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와 예조 좌랑 박적선(朴積善)을 보내어
하전(賀箋)을 올리고 이내 안장 갖춘 말과 옷의 겉감과 안집을 바쳤다.
*세종26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세종26 유수강(柳守剛)을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 잔치에 기생들이 여러
상신(相臣)의 좌우에 벌려 앉으니, 영의정 황희(黃喜)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에게 이르기를, 공연(公宴)에서 기생들이 좌우에 벌려 앉는 것은 예전에도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동년 봉상시윤(奉常寺尹) 김문기(金文起)를 평안도에 보내어 산양회(山羊會)에 도적이 들어온
상황과 지위원군사(知謂原郡事)가 산양회 만호(萬戶) 등과 군기(軍機)를 잃어 버린 죄를 핵실하게
하고, 이어 문기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에 적(賊)이 두 번이나 침입하였는데 한번도 그들과
싸우지 못한 것은 매우 한스럽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이 상륙(上陸)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도주(逃走)하였으니, 전번의 일에 비교하면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 적정(賊情)을 정탐한
사람들의 공로의 등급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고 하였다.
*동년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김문기(金文起)가 치계(馳啓)하기를, 신(臣)이 이산(理山)에 이르러
친히 접전(接戰)한 곳을 살펴보니, 그 군사를 숨겨 두었던 상태가 매우 소활(?闊)한 구석이
많았으며, 우리 군대가 웅거하여 있던 곳은 높고 험하거나 초목이 무성한 곳이 아니어서
싸움하기에 매우 편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장(邊將)이 또 적(賊)을 유인하여 육지 깊숙이
끌어들이지 않고 적이 겨우 육지에 오르자마자 먼저 이쪽에서 급히 공격하였기 때문에
섬멸시키지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도망쳐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또 복병(伏兵)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화포(火砲)를 방사(放射)하여서 모두 군기(軍機)를 잃고 다 무찔러 죽이거나
잡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적선(賊船) 4척이 침몰하고 적병도 죽었으며, 나머지 적병들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하여 달아났으니, 적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공로가 꽤 현저합니다.
그러나, 공과 과실(過失)이 서로 같으므로 그들의 공로를 사정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엎드려 상지(上旨)를 기다립니다. 고 하니, 유서(諭書)를 내려 회답하기를, 적을 방어한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賞罰)은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정하겠으니, 각 사람의 공과 과실을
자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경차관 김문기(金文起)가 산양회(山羊會) 추파
구자(楸坡口子)의 적정 정탐인(偵探人)의 공로의 등급을 논평하여 보고하니, 즉시 병조에
전지하기를,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고자 하니, 산양회 만호(萬戶) 박유(朴츝)와 지리산
군사(智異山郡事) 정윤덕(鄭允德)ㆍ 군졸(軍卒) 박숭무(朴崇武)ㆍ 노전(盧典)ㆍ김청(金淸)ㆍ
안이인(安以仁), 사용(司勇)ㆍ 김유생(金有生)ㆍ 안오상(安五常)ㆍ 김춘량(金春梁)ㆍ 백운(白雲)ㆍ
송세우(宋世雨)ㆍ 김을생(金乙生)의 공로를 구분해 계달(啓達)하라. 고 하였다.
* 세종27 전 수봉상시윤(守奉常寺尹) 김문기(金文起)가 계모의 상(喪)을 만나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가 추천하여 도진무(都鎭撫)로 삼으니, 문기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의 어미가 일찍 죽으오매 나이 열 세 살 때부터 계모에게 자랐사오니,
은의(恩義)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신은 독자이므로 상사(喪事)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 지방으로
부임하오면 실로 마음이 아프고 민망스럽거늘, 하물며, 신은 본디 옹졸하고 약하여 무사(武事)에
익숙하지 못하오니, 신의 임명을 바꾸옵기를 바라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에게 안마(鞍馬)ㆍ 활ㆍ 화살ㆍ 옷 1습(襲)과 갓ㆍ 신을,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에게도 옷 1습과 활ㆍ화살 등을 내려 주고, 좌승지 유의손(柳義孫)에게 명하여 모두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는 보내게 하였다.
*세종29 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함길도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基)는 평소에 이질(痢疾)을 앓으니 오래 군무(軍務)를 맡기기에는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황보공(皇甫恭)으로써 체대하게 하였다.
- 다음편에 계속 –
[출처] 111. 왕조의 비밀 4 - 7|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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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뭐야,,,이 글은..완전히 역사를 뒤집어버리네.
이 글이 위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설령 짜집기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글보다는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은데...도대체 어떤 글이 역사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위서나 소설로 쓰려고 해도 매우 내용이 신빙성있게 표현이 되어
참역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잠깐 멈칫할 정도의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