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진의 우측이 관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삼성산이다. 이 산줄기 좌측으로는 동평성, 마성산성이 연이어 있다. |
|
ⓒ 안병기 |
| 관산성의 위치에 대한 두 가지 견해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 어떤 학자는 속칭 재건산이라 불리는 충북 옥천 삼성산 일대를 지목하기고 하고 다른 학자는 삼성산에서 북서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고리산 일대를 지목하기도 한다.
그런 의문을 풀고자 지난 4월 말 난 충북 옥천 군북면에 있는 고리산에 오른 적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는 그의 할아버지가 관산성 싸움에서 거둔 전공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성왕)이 고리산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각간 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 승세를 타서 그 왕 및 재상 네 사람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으며… (후략) … (열전제3권)
군북면 이백리 산자락에서 출발해서 정상을 거쳐 추소리까지 성터의 흔적을 더듬어 갔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겨우 3개의 봉수대 터를 확인하는 데 불과했다. 1971년 단국대 조사반이 조사했던 당시만 해도 저수장 시설로 추정돼는 웅덩이나 병영지를 발견했던 모양이나 그동안 세월이 흐른데다 숲마저 우거져 있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제의 성곽>(서정석 저)이란 책은 "웅진시대 산성은 표고 100∼150m 높이에 주로 자리하고 있는 데 비해 사비시대 산성은 표고 250m 전후의 험산에 자리한다"면서 "이러한 입지의 변화는 전투방식의 차이나 전투에 동원된 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쓰고 있다.
고리산은 높이가 581m나 되는 높은 산이다. 얼핏 산이 높으면 방어에 쉬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식수 부족이나 식량 보급 문제 등의 애로사항이 뒤따를 게 뻔하다. 이날의 답사에서 나는 관산성은 고리산에 쌓은 성이 아닐 거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지난 토요일(6월 30일), 또 하나의 관산성지로 추정되는 충북 옥천 삼성산 자락을 다녀오고자 길을 나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열전'과는 약간 다르게 성왕의 죽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32년(554) 가을 7월에 (성)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근래 학계의 대세는 관산성이 삼성산이며 구천(拘川)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을 싸고 도는 협곡을 가리킨다는 설이 세를 얻어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또 삼성산의 위치는 어디를 말하는가. <동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산천 조에는 "삼성산 재군서오리 유고성유지(三城山 在郡西五里 有古城遺址)"라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삼성산은 옥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속칭 재건산이 될 것이다. 삼성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해발 303m).
삼성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럿 있지만 가화리 현대 아파트 뒤편에서 산 정상으로 난 산길을 택해 오르기로 했다.
|
|
|
▲ 꽃이 아름다운 백선의 열매. |
|
ⓒ 안병기 | 산길 여기저기 열매를 맺고 있는 백선이 눈에 띈다. 백선은 꽃이 우아하긴 하지만 냄새가 향기롭지 않은 식물이다. 얼마 전에 꽃이 핀 걸 보았는데 벌써 열매를 맺었구나. 인간에게 제행무상을 가르치는 데는 꽃보다 더 효과적인 게 있을까.
이정록 시인의 시집 <제비꽃 여인숙>의 첫 쪽에 실려 있는 '슬픔'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첫 쪽에 있으니 제목만 다를 뿐 서시인 셈이다. 시는 딱 한 줄이다.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생이 있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다. 그는 어느 날 야간자습 시간에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잠시 연민에 빠졌는지 모른다. 인생의 꽃 시절인 우리 아이들의 삶이 너무 무겁고 버겁구나. 꽃은 경쾌하고 가벼워야 하며 열매는 튼실하고 무거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생을 지나놓고 생각하면 꽃 시절이 얼마나 무거운 때였던가를 알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욕망을 점점 거세해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의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꽃보다 가벼운 열매의 시절을 지나는 셈인가?
옛 성터는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
|
▲ 우물 터. 삼국시대 적에 사용하던 그 우물일까? |
|
ⓒ 안병기 |
|
|
|
▲ 삼성산 정상 여기저기에 흩어진 성돌들. |
|
ⓒ 안병기 |
| 산 정상 가까이에서 물이 고여 있는 우물 터를 만난다. 이곳이 <세종실록지리지>가 지칭한 '가물 때는 마른다'라는 그 우물일까? 마음속에 물음표 하나를 걸어 둔 채 정상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각종 기록은 이 성을 서산성(옥천읍 서정리)과 혼동하기도 하고 월전리산성으로도 부른다.
1977년 간행된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1977년에 간행한 <문화유적총람>은 이 성이 하수정부락의 북방 약 360m에 있으며, 성 둘레는 743m로 이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성은 거의 붕괴되어 성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성돌 몇 무더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중앙에는 장대지로 보이는 너른 터가 있으며, 원추천인국(루드베키아)가 화원을 이루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 얼마 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군 초소 옆에는 정지용의 <산에서 온 새>라는 시가 새겨진 작은 시비가 있으며 철봉대 등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치열했던 싸움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잠시 갈 길을 잃은 내 빈약한 상상력은 다시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에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진흥왕)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라고 적고 있어 사상자 수에서 <신라본기>의 기록과 크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아무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진흥왕 14년(553년) 음력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나제동맹을 유지하려는 백제 성왕은 그해 음력 10월에는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소비로 보까지 하지만 나제동맹은 끝내 깨어지고 만다. 관산성 싸움 승리 후 신라는 이 요충지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게 된다.
|
|
▲ 해발 523m에 위치한 고리산 봉수대 (4,28). 삼성산과 가까이 있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
|
ⓒ 안병기 |
|
|
|
▲ 서쪽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처에 서 있는 두 개의 돌탑. |
|
ⓒ 안병기 |
|
|
|
▲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근처 여기저기에 흘러내린 성돌들. |
|
ⓒ 안병기 |
| 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서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애써 시야를 확보하자 대전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며 서산성이 있었던 서정리 일대와 더 멀리 고리산이 보인다. 산의 서쪽 능선을 타고 쭉 가면 동평성, 마성산성에 이른다. 그러니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쪽 능선을 타고 조금 걸어가자 2개의 돌탑이 나오고 근처를 살펴보니 둥근 석축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그 아래는 돌무더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곳이 망대가 있던 자리인가 보다. <옥천군지>(1641쪽)는 "이 성은 남쪽을 경계 방어토록 축성하였으며 정상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망대에는 100여 평의 대지가 있"다고 쓰고 있다.
만약 이곳에 망대가 있었다면 그 망대는 심대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쪽에 있는 용봉에 가려 군서면 일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어쩌면 동평산성을 쌓은 것은 이 심각한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관산성의 망대를 겸해서 쌓은 게 아니었나 싶다.
월전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정상으로 올라와 올라올 때의 길이 아닌 동쪽에 있는 산길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국수나무가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을 조심스럽게 헤치면서 산을 내려서니 옥천관광호텔 바로 앞이다.
|
|
▲ 옥천읍 양수리에서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로 넘어오는 산길. 길이 자꾸 끊어지곤 했다. |
|
ⓒ 안병기 |
|
|
|
▲ 말무덤재라 불리웠던 옥천군공원묘지. |
|
ⓒ 안병기 |
| 오늘의 답사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점심을 먹은 다음 옥천 도서관에 들러 자료를 보충한 다음 다시 삼성산을 오른다. 이번에는 양수리 하수정마을을 지나 용봉으로 올라가는 고갯마루 갈림길을 거쳐 정상 성터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와 월전리로 향한다.
길의 자취가 희미한데다 온통 너덜겅이니 발바닥이 아플 지경이다. 희미해진 길을 헤치며 간신히 산에서 내려가니 우측에 공원묘지가 나타난다. 예로부터 '말무덤'이란 지명이 있던 지역이다. 월전리라는 지명은 월곡과 군전이 합쳐져 생긴 명칭이다.
말무덤이란 '말(馬)을 묻은 묘'라는 뜻이 아니다. '말'의 어원이 '머리'나 크다는 뜻의 '마루'에서 유래한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좌평 또는 장군급이 묻힌 게 아닌가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
|
▲ 월전리 구진벼루가 있는 산자락. 뒤로 보이는 산이 대전과 옥천에 걸쳐 있는 식장잔이다. |
|
ⓒ 안병기 |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이 죽은 곳은 구천이다. 그렇다면 구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구천의 위치를 추정해내려면 먼저 관산성이 어디에 있었던 자리부터 파악해야 한다.
관산성이 삼성산이라는 견해를 깔고 들어가면 구천(拘川)은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 근처 구진벼루가 된다. 마을 앞으로는 서화천이라는 꽤 너른 내가 흐르고 내의 바깥쪽으로는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능선 중간쯤에 높이 약 30m가량의 험준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구진벼루이다.
이곳은 '구진벼루' 또는 '구전벼루·구진벼랑' 등으로 구전되어 불리고 있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구천'이 '구진'으로 변음된 것이고 '벼루'가 벼랑 즉 절벽을 뜻한다고 보면 구진벼루가 맞다는 것이다. 고리산 자락 아랫마을 군북면 이백리 '갯골(갯내)'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갯골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면 구천에 가깝다는 것이 추정의 근거인 듯하다.
월전리 구진벼루로 들어가는 길은 각종 공사가 한창이다. 어수선하기도 하고 온통 파헤쳐져 있어 걷고 싶지 않은 길이다.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여기서 답사의 대미를 접기로 한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바람직한 품성
공원묘지 한편에 앉아서 잠시 1400여 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관산성 싸움을 생각한다. 이 싸움을 단순히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흥미로운 전쟁으로 치부하는 데서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교훈을 얻을 것인가. 관산성 싸움에서 어떤 명쾌한 교훈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삼국시대와 달리 지금은 백제가 우리나라도 아니고 신라가 무찔러야 할 '외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 성왕은 신라를 습격하려고 겨우 보병과 기병 50명만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도착한다. 이건 아무래도 죽음을 자초한 무모한 행위였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도대체 그 적은 병사로 어떻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성에 몰래 잠입해 신주총관이자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라도 암살하려던 속판이었을까.
신라군은 아마도 이 정보를 내통자 혹은 첩자를 통해서 사전에 알고 매복해 있다가 불시에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관산성 싸움은 백제에 대한 신라 첩보전의 개가로 보인다. 애당초 이 싸움의 실마리였던 서기 553년의 싸움 역시 나제동맹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가 신라에 방심의 허를 찔린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성왕에게는 정세를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전략과 각개 전투에 임하는 전술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백제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성왕의 방심과 자만, 전략전술의 부재는 그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나라마저 멸망으로 치닫게 했다.
성왕의 경우에서 나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품성을 추출해내고 싶다. 방심과 자만은 개인에게도 해독을 끼치는 심각한 문제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에게는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성품이다. 방심이나 자만 같은 돌발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에선 상황에 맞는 전략적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올해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이런 점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후보의 면면과 지나온 자취들을 꼼꼼히 따져보고자 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 아니다. 답사기를 쓰기 위해 내 딴에는 문헌을 탐독하고 논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설 같이 돼 버린 부분도 없지 않다. 나 자신은 결코 사실에만 근거해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 실증주의자는 아니다. 실증하는 것은 지식을 확장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인 실천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역사는 결국 해석의 문제이며, 그 해석을 가지고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하느냐의 문제라고 귀착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세계를 해석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게으른 전문가보다는 열정적인 아마추어가 만드는 세상이 훨씬 역동적이라는 게 내 지론이며 그것이 또 내 부끄러운 답사기에 대한 변명이나 방패가 돼 줄 것을 믿으며 답사기를 끝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