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여행 ‘어린 단종의 꿈과 한이 서린 장릉과 청령포… 동강과 서강을 따라 구절양장을 이루는 한반도 지형… ‘라디오 스타’흔적 좇다보면 아날로그의 감성 물씬… 지나가는 객도 그 정취에 반해 갈길을 잃고 서성이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일상과 낯설게 하기’다. 매일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면 기차를 타보고, 항상 똑같은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이용해 농촌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장소가 눈에 띄면 차를 세우고 풍경을 음미해보시라. 여름 휴가철에 벌떼처럼 몰려가 고생하지 말고 겨울의 초입에 한적한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자기만의 개성적인 여행의 묘미를 훨씬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행의 성공 여부는 장소가 아니라 누구와 같이 가느냐와 어떻게 느꼈느냐로 판가름난다. ‘어디로’는 수단이고, ‘누구’와 ‘어떻게’가 목적이 돼야 한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과거를 추억할 수 있고 아날로그 정서가 묻어있는 영월은 훌륭한 겨울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인구 5만명이 채 되지 않는 조용한 고장 강원도 영월(寧越). 한자 뜻을 풀어보면 ‘편안하게 넘어간다’다. 영월 동북부에 위치한 태백산맥을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는 고장이라는 뜻쯤 되겠다.
영월은 어린 왕 단종의 꿈과 한이 서린 곳, 시선 김삿갓의 풍류가 아름다운 동강과 서강을 따라 구절양장을 이루어 경승지를 빚어낸 고장, 시와 별이 강물에 담겨 산을 넘지 못하고 어라연, 청령포,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낸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서강이 동강과 합류해 남한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월 겨울 여행의 백미는 영화 ‘라디오스타’와 별마로 천문대가 주는 정취를 맛보는 것일 게다.
영월에는 2006년도 영화 ‘라디오스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 한물간 록스타인 최곤(박중훈)이 무능하지만 속이 깊고 인간미 있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지방으로 밀려 라디오DJ를 하며 재기의 꿈을 키워가는 이야기에 분명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속도 위주의 사회 시스템이 현대인의 심신을 지치게 한 지도 오래다. 영화에 나온 장소를 하나씩 둘러보다보면 약간의 여유는 생긴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영월읍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영화속 청록다방은 지금도 다방아가씨 김양의 상큼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들어가보면 1980년대 다방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연탄난로를 중심으로 편안한 소파에 앉아있는 40~50대 남자손님들은 주말 ‘에덴의 동쪽’ 재방송을 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에 등장해 “김양아 커피 배달” “자가 저기 왜 가있나”라는 두마디 대사만으로 유명해진 다방 주인 김경애 씨는 여유롭게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이준익 감독이 직접 출연했던 중국집 ‘영빈관’과 최곤을 다시 스타로 만들어주었던 ‘영월KBS방송국’, 세탁소 아저씨와 철물점 아저씨가 아옹다옹 소소한 싸움을 하며 지내던 곰세탁소와 사팔종합건재철물, 최곤과 박민수가 머물던 ‘청령포모텔’... 이들을 차례로 둘러보면 영화속 장면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여행객 자신의 옛 추억도 새록새록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영월읍내 한복판에 있는 서부시장과 상설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을 찾아 삶의 생생한 정취를 느껴보고 밀전병 등 향토먹거리를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날이 빨리 저무는 겨울 저녁에는 봉래산에 올라 별마로천문대에서 야(夜)한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면 좋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 봉래산(799m) 정상에 자리잡은 별마로(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천문대 가는 4.5.㎞ 길은 경사가 완만해 드라이브 코스로도 괜찮다.
8m 돔스크린에 가상의 별을 빛나게 하는 천체투영실에서 전문가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별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별자리 찾는 방법을 익힌 후 옥상으로 올라가 보조관측실과 부관측실에서 별과 달을 보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겨울 직전의 별자리인 카시오페아, 페가수스, 안드로메다 성운을 차례로 찾다보면 ‘판타스틱’을 연발한다.
‘라디오스타’에서 안성기가 천문대 망원경 앞에서 박중훈에게 “별은 자기 혼자 빛을 내는 게 아니라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인간사회에는 적용할만한 명언이지만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별은 자체로 발광할 수 있다고 한다.
하루를 묵고 다음 날은 단종유적 코스로 잡으면 여류롭다. 단종은 서강 끝 지점에 외로이 떠있는 유배지 청령포에서 두달간 기거하다가 홍수로 인해 청록다방 건너편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와 머물다 숙부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받는다. 삼면은 강으로 한쪽은 험준한 암벽 산으로 막혀 고립돼 있다. 여기서 단종은 서울 창신동에 있던 아내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고독과 고립과 위협을 견뎌내야 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잠시 숙연해진다. 단종의 시신을 모신 장릉은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기에 안성마춤이다.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영월은 또 곤충박물관 책박물관 등 각종 박물관이 위치한 박물관의 고장이다. 일일이 둘러보기 힘들다면 영월군청 바로 앞에 있는 최초의 공립사진박물관인 동강사진박물관이라도 방문하면 적어도 사진에 대한 상식 한가지는 늘릴 수 있다.
◇여행메모
▶영월 찾아가는 길=승용차로 수도권에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 원주 만종 분기점에서 우회전해 중앙고속도로를 탄 뒤 제천IC에서 빠져 영월 쪽으로 38번 국도를 타고 20분만 가면 영월읍내가 나온다. 제천IC 못미쳐 신림IC에서 미리 빠져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는 88번과 31번 국도를 타고 가면서 서강의 운치를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깊고 잔잔한 서강의 물줄기가 아름다운 선암마을을 휘감으며 탄생시킨 ‘한반도 지형’과 거대한 탑 모양의 비경 선돌을 볼 수 있다.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면 여주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탄 뒤 감곡IC에서 나와 신호등이 별로 없는 38번 국도를 이용해도 된다.
시외버스는 동서울 터미널이나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을 이용하면 2시간20분 정도 소요된다.
▶먹거리=영월읍 영흥3리의 청산회관(033-374-3030)의 곤드레나물밥(보통 7000원 특 8000원)은 특히 유명하다. 함께 나오는 두부와 된장 맛도 좋다. 장릉 옆에 있는 장릉보리밥집(033-374-3986)의 보리밥은 6천원에 된장찌개와 다양한 반찬이 제공된다.
▶숙소=‘강건너 하늘정원’(033-373-1110)은 동강 물줄기와 태화산 계족산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펜션이다. 아직 감을 따지 않은 감나무의 홍시를 맛보고, 주인 아저씨가 구워주는 고구마와 은행을 먹어보는 재미도 있다.
유오성이 말하는 내고향 영월은…
나의 어린시절 감성이 형성된 곳
도시와 농촌의 情이 스며있는 곳
보면 볼수록 옛 향기에 젖어든다
“영월을 강원도 두메산골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지금의 영월은 서울에서 무척 가까운 곳입니다. 맑고 깨끗한 저의 고향은 사계절 내내 좋지만 특히 겨울에 오면 더 많은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유오성은 영월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때 서울로 전학올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부모가 읍내 중앙시장에서 쌀장사를 해 어려움 없이 자란 유오성은 “영월은 나의 감성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면서 “지금도 머리가 복잡하거나 뭔가 잘 안풀릴 때는 영월을 찾게된다.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를 새로 맡게 되면 반드시 영월에 있는 할머니 산소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말했다.
유오성은 영월의 매력은 청령포와 장릉, 별마로천문대 등 ‘영월10경’속에 다 들어있다고 했다. 동강의 신비한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뜻 깊은 단종과 김삿갓의 혼을 기리고 있으며, 그 속에 다양한 박물관을 품고 있는 영월은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온다고 한다.
유오성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선돌 근처에 사는 친구가 일주일 넘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자 친구 집으로 가봤더니 딸기농사가 너무 바빠 일손을 도우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들 모두 수업이 끝나자마자 2주 정도 친구의 딸기 농사를 도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단종이 갇혀 지냈던 청령포와 장릉은 어릴때 유오성의 놀이터였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서강을 통과할 때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 수영을 해 건너간 적도 많았다.
유오성은 “어릴 때에는 영월이 답답한 동네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지금은 아늑한 공간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면서 “영월 군민들은 관광객들에게 편안하게 해주는 장점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그 편안함은 장삿속에서 베푸는 친철이나 무덤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촌스럽지만 소박하고, 격식을 차리지는 않지만 사람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월군 홍보대사답게 표현 하나하나에도 전문가적 안목이 들어있다.
요즘은 2년만에 돌아온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에서 순진한 건달 공상두를 맡아 연습에 여념이 없는 유오성은 “영월은 관광자원을 잘 개발했고, 도시와 농촌의 중간 단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도시와 농촌의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고 영월의 장점을 설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