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쟁
쿠웨이트가 원유시장에 물량을 과잉공급하여 유가를 하락시킴으로써 이라크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한 바 있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속주(屬州)로 삼아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라크의 침공 직후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각국은 8월 2일부터 12개에 이르는 대 이라크 유엔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쿠웨이트 철수와 쿠웨이트 왕정복고, 대 이라크 무역제재 등의 강력한 이라크 응징을 결의하였다.
유엔안보이사회는 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에의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전후하여 미국이 대 이라크전에 대비한 다국적군의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43만의 미군을 포함한 33개국의 다국적군 68만 명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해 이라크도 50여 만의 정규군과 50여 만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공화국 수비대 15만을 쿠웨이트 및 이라크 남부 지역에 집중시켜 대치하였다. 미국은 이라크의 철수시한 이틀 뒤인 91년 1월 17일 대공습을 단행하여 이로부터 1개월간 10만 여 회에 걸친 공중폭격을 감행, 이라크의 주요시설을 거의 파괴하였으며, 2월 24일에는 전면 지상작전을 전개,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군을 축출한 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무력화되고 15만 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패퇴하였으며, 다국적군은 125명의 전사자를 냈다. 걸프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 이라크는 영공에 비행 금지 구역이 설정되었고 다른 나라와 자유로운 무역을 할수 없는 경제 제재를 받았다. 또한 이라크 국민은 전쟁 기간중에 살포된 지뢰와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각종 암발생 등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1. 미국은 왜 이라크를 공격하는가?
■ 미국이 내건 외형적 이유
1) 대량살상무기 확산금지 하기 위해 : UN의 사찰을 받고 있기 때문에 문제 없음
2) 9.11테러의 배후인 알카에다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 객관적인 증거를 찾지 못함
■ 미국이 공격한 실질적 이유
1. 이라크의 석유자원 차지
1) 1927년 키르쿡(Kirkuk) 유전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된 이후, 1934년 상업적 규모의 원유생산을 시작한 이라크는 현재 원유매장량이 1,120억배럴로 사우디에 이어 세계 제2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 매장량이 2천2백억 배럴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마지막 남은 지구상 최대의 에너지 보고'라 불리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 앞으로 98년간 수입할 원유량과 맞먹는 양이다. 또 원유가 지표면에 가깝게 묻혀 있어 생산비용이 배럴당 1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낮고 품질 면에서는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석유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필두로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부시 행정부의 주요 고위 관리들은 석유회사의 경영자.대주주 출신이거나 현재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01년 4월 딕체니부통령에게 제출된 '21세기 전략적 에너지 정책에 대한 도전'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날이 갈수록 미국의 대외석유 의존도'를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전체 석유 소비량 중 30%만 국내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중동지역에서의 석유자원확보는 미국의 국익에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 있으며 석유 확보를 위한 요충지로 이라크를 점찍고 있으며 "걸프지역의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권 확대를 위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건의하고 있다.
2. 무기재고 처리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미군은 매일 2,500개의 폭탄과 2천톤의 무기를 이라크에 쏟아부었으며, 개당 230만 달러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288개나 발사했다. 미국의 무기수출액은 89년 80억 달러에서 91년 400억 달러로 껑충 뛰어올랐고, 냉전해체 후 개점휴업 상태였던 군수업체들은 하루 16억달러의 비용이 든 걸프전을 통해 창고에 쌓았두었던 재고를 정리했다.
미국의 군수산업은 미 경제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시정권은 군수자본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 중동에서의 미국영향력 극대화와 이스라엘 안보 강화
미국의 목표는 이라크 정복 후 시리아, 이란 등의 반미정권 교체, 사우디에 석유 의존도 감축 및 석유수출국기구(OPEC) 약화를 통한 석유자원의 안정적 공급, 그리고 이스라엘 안보강화등을 노리고 있다(9. 10 미국 보스턴 글로브 인용)
4. 세계 유일 패권 추구
반미 기운이 강해져 가는 서구와 일본, 중국, 한국 등에 대한 미 군사력 과시와 은근한 협박이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이권이 확보된 이라크에 대한 공격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라이벌들에 대한 '엄중 경고'이며, 대(對)북·대(對)중국 침략의 리허설이기도 한다.(박노자)
2. 이라크 민중의 고통
■ 걸프전의 피해와 경제 제재 10년
1. 걸프전으로 인한 피해(1991.1.17 ∼2.28, 6주간)
1) 미국 항공기가 이라크에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8만8천톤으로, 이것은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거의 다섯 배이다. 이 폭탄은 이라크의 발전소, 하수 처리 시설, 교량, 도로, 고속도로, 운하, 공공 건물 등 이라크의 기반시설을 철저히 파괴했다.
2.) 걸프전 때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하수처리시설, 관개시설, 정수시설을 폭격하여 오염된 물을 마시게된 어린이들이 단순 설사, 장티푸스, 수인성 전염병으로 죽어감 (일종의 생화학전)
▶ 사례 : 이라크 남부 바스라의 여름기온은 섭씨 약60도 정도이다. 이런 날씨라면 하루에 적어도 1갤런 정도의 물을 마셔야 하는데, 경제 제재 때문에 물을 정수하는데 사용할 염소를 구할 수 없어서 병에 담겨 팔리는 물조차 오염되어 있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노엄촘스키 외 지음, 북막스, 233쪽)
3) 걸프전 때 미국이 사용한 열화우라늄탄의 문제
열화우라늄은 원자로에 사용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방사성 페기물로 독성이 강한 중금속임, 이라크 탱크의 철판을 뚫을 수 있고, 다른 방어 시설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걸프전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320∼350톤 정도의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였는데 그 입자와 파편들이 걸프전 전장 전역에 흩어져 현재까지 여러 질병을 일으키고 환경을 오염시킴
4) 걸프전 전후 이라크의 석유산업 현황
2. 핵무기 보다 무서운 대량 살상무기 - 10년간의 경제 제재
1) 이러한 참상의 직접적인 이유는 걸프전 당시 파괴된 각종 시설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경제제재로 복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민생활의 필수품들이 무역금수 조치로 제때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상하수도 시설이 최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도시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식수의 양이 1990년의 절반밖에 안 될 것이라고 추정한 것은 이라크의 사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2) 경제 제재가 이라크 교육제도에 미친 영향
·어린이 노동 증가 : 경제제재 때문에 이라크 경제가 붕괴하자, 물가가 치솟고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을 시키거나, 매춘을 하게 하는 경우도 생김.
·교육제도의 붕괴 : 교사 월급이 10년 전에는 한달 평균 450달러였으나, 현재는 3달러 정도여서 교사들은 수입을 보충하기이해 직업을 바꾸거나 부업을 해야함. 학교 신축을 규제해 기존의 초중등학교들은 2부제 수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학교에는 기본적인 냉난방시설조차 전혀 없음.
3. 미국의 이라크 공격 무엇이 문제인가?
■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 반인륜적인 전쟁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이라크가 UN의 사찰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 공격은 UN과 전 세계적인 반전여론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으며 그동안 걸프전 이후 이라크가 수많은 전쟁후유증과 미국의 경제제재등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일방적인 침공이며 이라크가 UN으로 사찰을 받은 등 군사적으로 무장해제된 상황에서 무자비하게 공격을 받는 그야말로 야만적인 학살을 당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양상이 초기의 다소 제한된 공습형태를 벗어나 엄청난 화력을 퍼붓는 '충격과 공포작전'으로 변화됨에 따라 이라크 민중들의 피해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대규모 공습은 발전소, 병원, 학교 등 민간 시설은 물론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매우 비인간적인 전략이다. 또한 이라크 인구의 절반이 18세 이하 어린이이며 어린이의 25%가 영양실조 상태인 상황에서 전쟁의 피해는 훨씬 심각할 수밖에 없다.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전쟁이 뭔지 알고 있고 전쟁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다섯 살 짜리 아셈에게 전쟁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셈은 전쟁이 “총과 폭탄에 날씨는 춥거나 덥고, 우리가 불에 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이라크 소녀의 글에서)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파괴력이 전술핵무기에 맞먹는 폭탄과 미사일들을 투하할 것이며, 핵무기 사용과 유사한 인명피해와 오염을 유발하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할 예정이다.
그 결과 미국 폭격기와 지상군이 지나간 자리는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폐허만 남게 될 것이 분명하다
■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본성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3월 19일 "후세인 망명과 상관없이 이라크로 진격할 것"이라는 미국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 정부 고위관료들이 "2-3년간 미군정 실시"를 공공연히 언급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미국의 최종적인 전쟁목표는 군정이나 친미정권 수립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번 전쟁이 곧 대이라크 '정복전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군수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든지 이라크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제국주의의 탐욕적인 전쟁임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자, 자유와 번영의 나라라는 거짓된 이미지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마음 깊숙이 숨겨진 제국주의적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이제 더 이상 숨길수도 없게 되었다.
설사 미국이 이라크를 차지하게 되더라도 이를 지켜보는 전 세계 평화애호 민중들과 이제는 화해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와 자멸의 길로 빠지게 될 것이다.
4.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한반도와의 상관관계
2002년에 들어서면서 부시행정부는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2003년 3월 들어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끝난 후 '북한을 손봐야 한다'(존 볼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언론에 흘러나오고 있다.
"美, 이라크戰 후 北공격 배제 안해"
미국은 이라크전이 끝난 뒤 북한에 대해 무력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고 알렉산더 버시보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가 러시와 TV와의 인터뷰에서 20일 밝혔다.
"북핵 조율 안되면 전쟁 가능성"
4일간 평양을 방문한 스트롱 특사는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전쟁의 필요성은 당장 없지만 미 국과 북한이 협상을 통한 해결책 마련에 실패할 경우 그럴 가능성도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연합뉴스, 03/22 )
예전부터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여왔는데 1994년의 영변폭격계획인 5027작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미국 군사전문사이트(www. globalsecurity. org)가 밝힌 "OPLAN 5027"작전에 의하면, 미국이 98년부터 북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하며 북한이 생화학전을 감행하면 서울시민 4백56만명 이상이 살상될 수 있는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전면전'전략을 기획했음이 밝혀졌다.
또 2002년판 전쟁계획은 "신속한 선제 공격을 강조하면서 한국과 상의하지 않고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밝혀졌다.
지금 한반도에는 4월 2일까지 진행되는 독수리 훈련과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릴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RSOI)이 진행되고 있다. 이 훈련에는 미국의 첨단병기가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480억을 하는 스텔스폭격기 6대가 군산 미 공군기지에 내렸고 핵항공모함인 칼빈슨가 들어와 있다. USS빈센스호와 이지스함구축함도 동원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흐르고 있으며 이라크전이 끝난 후 매우 강도 높은 북미대립이 예상되고 있다.
한국전쟁과 양민학살
◆ 노근리 학살 사건
[ Kill 'em all ] 모두 죽여 버려
-영국 BBC 방송이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상물 이름
1950년 7월 23일, 미군 제 24사간이 북한군 2개 사단에 밀려 퇴각 중이었습니다. 충북 영동군 주곡리 주민들은 전투를 피해 이웃 임계리로 넘어 갔습니다. 25일 해질 무렵 미군 수십명이 나타나 피난길을 열어주겠다며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7백여 명을 모았습니다.
피난 행렬은 신작로를 따라 주곡리를 거쳐 황간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가리 마을로 접어들자 미군은 주민들에게 '오늘은 여기서 지낸다. 엎드린 채 고개를 숙여라. 일어서거나 돌아다녀서는 안된다'고 지시했습니다. 겁에 질려 도망가던 주민 9명이 일차 사살됐습니다.
26일 점심 무렵 황간면 노근리 앞길에서 다시 미군은 주민들을 가로막고 철로 위로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퇴각하던 미군 제24사단으로부터 이 지역을 인계받은 제1기병사단 제7연대 소속 군인들이었습니다. 주민들 머리 위로는 정찰기 한 대가 맴돌았고 뒤이어 나타난 전투기 2-3대가 기총소사를 시작했습니다. 살점과 피가 철로 사방에 튀었습니다.
전투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양쪽 산기슭에 매복한 미군의 총알이 쏟아졌습니다. AP통신은 "당시 중대장이었던 맬번 챈들러 대위가 현장에서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미군 병사들의 증언을 보도했습니다. 또 CBS 탤레비젼의 보도는 "여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우리 앞에 걸어 다니는 것은 모두 사살했다"는 증언도 전했습니다. 참사 50년만의 일입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가 파악한 사망자는 121명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수는 4백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정은용 씨는 "이틀 뒤 현장에 가보니 4백여 구의 시체가 포개져 뒹굴고 있었으며 유족들이 참아가지 않은 시체도 1백여 구였다"고 증언합니다. 생존 주민들은 지난 40년간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현장조사나 피해자들의 증언 한번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나 똑같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민군에 의해 부산까지 밀렸던 국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 때 고양시 일대도 함께 수복되었는데, 남쪽이 고양시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1개월여에 걸친 부역자 색출과 처단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주도하에 진행된 치안대 및 우익단체의 부역자 색출작업은 최소 수백 명의 무고한 양민들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살 가해자들은 일제시대 폐금광으로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버려져 있던 금정굴에서 이른바 부역자 처벌을 자행하였다. 적극적인 좌익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미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후였고, 가해자들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의 대다수는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 인민군 점령시 기껏 곡식의 낟알을 세는 정도의 일을 한 소극적인 부역자, 개인 감정으로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집과 일터, 길에서 아무렇게나 끌려가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피학살 유가족들은 친인척들의 주검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기나긴 세월을 '빨갱이 가족'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천추의 한을 품고 살아왔다. 사건이 있은 지 50년, '금정굴'은 어느 누구도 갈 수 없는 곳, 결코 그날의 참상을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1. 언제 일어났나?
1950년 9.28 수복 직후 약 1개월 반 동안
2. 어디에서 일어났나?
지금의 일산 중산마을 맞은편의 탄현동 뒷산, 일제시대 폐금광에서
3.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최소 400명에서 최대 2,000명까지 (1995년 1차 발굴된 유골 감정 결과: 오른쪽 대퇴골 153개, 두개골 74개, 부녀자의 뼈도 10% 이상, 10대의 뼈도 있음. 50년간의 유골의 유실률과 어린이 및 부녀자 뼈의 유실률이 훨씬 높은 것을 감안하면 1차 발굴된 유골만으로도 수백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됨)
4. 누가 죽였나?
경찰과 우익단체 (당시 태극단장: "경찰이 처형했다. 우리는 스스로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중앙에서 조사가 내려오자 이무영 서장이 그 사건 을 우리 태극단이 한 걸로 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와 거절했다."당시 고양경찰서 직원: "군경합동수사본부에서 나온 사람이 이무영 당시 고양서장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사람을 이렇게 처리하느냐고 질타하며 이서장을 끌고갔다." 당시 치원대원: "사람을 죽이고 흙을 덮고 또 죽이고 덮고 여러 켜로 덮었다." 당시 태극단원: "무차별로 처단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나왔다.")
5. 법적 절차에 따른 처형이었나?
불법 처형 (전시인 당시에도 반드시 재판을 통해 처벌하라는 법령이 있었음에도, 경찰과 관계자의 임의적 판단에 따라 불법 처형)
6.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 개인 감정으로 지목된 무고한 양민들 (수많은 사람들: "당시 적극적인 좌익 활동가나 부역자들은 모두 인민군을 따라 이미 월북한 뒤였다." 당시 치안대원: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상을 묻는 질문에 "사상은 무슨 사상이냐, 농민사상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