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시산맥 신인상 / 한상신
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4편 / 한상신
아스피린 한 알을 물과 삼켰는데 물만 넘어갔을 때
내가 다시 유리컵에 물을 따라 들고 있을 때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
나의 하루는 자주 500mg짜리 흰 두통이다
염전의 외딴 소금창고를 닮은 밤에 대해
항상 증거가 불충분한 나의 생활에 대해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 불면 그 미제사건에 대해
어차피 기록을 남길 수 없으므로
아스피린이 비명도 없이 동그랗고 조그맣게 추락한 후
내가 소금기 마르듯이 잠이 든다면
신기루를 스쳐 아스피린 몸피들이
잠속인지 잠 바깥인지 알아차릴 때까지
내가 빈 책장처럼 딱딱하고 허전하게 잠이 든다면
내일 아침에 어쩌면 어제 아침에 내가 아닌 것처럼 깨어나
여기가 어디죠?
마리앙투아네트 증후군처럼 하얗게 증발하며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처럼
내가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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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불을 켜니까 발목이 번진다
나는 어깻죽지 툭툭 털며 빗소리를 벗는다
늘 먼 곳에서 검은 마스크를 쓰고 오는 빗소리
신발장을 열고 빗소리 닫고
비에 젖은 운동화 뒤축이 어둡다
운동화 끈을 잃고 끈 구멍이 사라지고
빗소리 몇 목숨이 실종되고 있다
미리 젖고 있는 어둠
푸른곰팡이 포자같이 번지는 어둠
발뒤꿈치를 조금 들어 올리는 빗소리
빗소리는 좀처럼 개체수가 줄지 않는다
재봉틀 같기도 하고 탁상시계 같기도 하고
연통 같기도 하고 무슨
가재도구 같기도 한 푸른곰팡이들로
빽빽한 오후 여덟 시
신발장 안에서 빗소리들이
켤레켤레 깊어지고 있다
신발장 앞에선 외딴 신발 한 짝의
어둠이 또 고요히 번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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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물방울은 어차피 누드다
물방울들이 물방울들끼리 맨살을 마저 벗는다
물방울의 둘레와 둘레를 뺀 나머지
목선을 따라 환한 물방울은
물방울이 물방울에 물방울을 끼치다가
물방울 안으로 이내 사라지고 만다
물방울 옆에 물방울이 또 도진 후
물방울에 매달린 작은 욕조들
욕조를 욕조 밖으로 떨군다면
물방울 바닥이 더 깊어진다면
물방울 우듬지가
물방울 메아리가
물방울 아침이
벽의 줄눈을 타고 붐빈다
하마 동그랗게 아물지 않는다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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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다홍
1
계단 모서리마다 이 세상을 뜨고 싶은 다홍들 가랑가랑 가랑가랑 어떤 가랑잎은
어떤 가랑잎보다 전신이 가벼워 먼저 떴다 가라앉았다 흔들 삐딱해가며 어디야 종이컵이 바람을 담았다 매번 쏟았다 계단은 계단을 혼자 떠나는 연습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2
계단 머리에 모과나무며 단풍나무는 제 이름들을 내려놓는다 바람이 불자 화단과 화단 사이로 다홍빛이 돌았다 삼색이 너 거기서 염을 하겠구나 다홍을 신고 다홍빛 해 그림자를 덮겠구나
며칠 전 으슥하게 젖을 물리고 있던 삼색이가 오늘은 경계석 옆에서 벋정다리로 누워 있다 장의사가 관절을 다홍으로 덮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이제 편하게 가세요 몸에 힘을 조금만 빼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 입관이 끝나면 장의사가 빈소에서 육개장을 한술 뜨며 다홍빛으로 말할 것이다 몸을 주욱 펴주셔서 잘 모셨어요
그 발치께 있던 새끼들이 뿔뿔이 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기저기 다홍이 자꾸 샜다 계단이 묵묵하다 다홍의 무게중심이 허공에 잠깐 머물렀다 가랑잎 몇 개가 계단바닥에 떨어졌다
삼색이가 화단 안쪽 잡풀 밭에 데려왔었다 발톱이 오이 속살 같은 새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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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의 본론
도마 위의 메밀묵이 먹먹하다
한 모쯤 말하려 했다
메밀묵을 넘겨짚는다
메밀묵은 항상 아래쪽이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두 손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안 들려 안 들려
메밀묵을 농담같이 장미 칼로 썰었다
도마 위의 메밀묵은 후미진 골목 만화방 전등 밑 같다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정만화책 곁의 순정만화책
무심히 우묵하게 엎드린 메밀묵
숭덩숭덩 썬 메밀묵의 어깨들이 끼리끼리 붐볐다
메밀묵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한 차례 더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메밀묵의 가로가 메밀묵의 세로를 용케 견디고 있다
[수상소감]
어렸을 적 커다란 바퀴가 두 개인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하늘로 구름처럼 날아오를 듯한 기분일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 졸랐더니 열 살이 되면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이 되어도 자전거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열병 같은 무엇인가를 저는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글쓰기는 그 자전거를 기억하는 한 방식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는 것도 없고 부족하기만 한 제가 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격려를 주셨던 여러 선생님들 덕택입니다, 늘 모자란 글을 읽어 주신 시 세미나 선생님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34년생 사랑하는 울 엄마, 관객이 많은 무대가 떨린다면서도 노래를 스스럼없이 열창하던 엄마처럼, 엄마의 딸도 용기를 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겠다며 머리 싸매고 돌아앉은 나를 애정과 근심으로 지켜 준 남편에게도, 자랑스럽게 잘 커 준 두 딸 지윤과 민지에게도 지면으로나마 고맙다는 뜻 전합니다.
제게는 개벽과 같은 당선의 전갈이 지니는 엄중한 무게를 온몸으로 기억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2020년 해를 맞아 일 년에 한 번 있는 계간 시산맥 신인상 심사를 온라인 무기명 원고로 하였다. 100여 명의 응모작품 중 예심을 거쳐 5명의 작품이 심사자의 이메일로 들어왔다.
1번 -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외 9편
2번 - 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9편
3번 - 그 외 9편
4번 - 내연(內緣)의 땅 외 9편
5번 - 가시를 바르며 외 9편이었다.
한 편의 시가 그 한 편으로서 스스로 움직이는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기본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더해 그런 무난함을 넘어 새로운 발견이든 정서적 극대화든 그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신인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시인이 언어의 운용보다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시 안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은 각자 추천 번호를 단톡방에 올렸다. 1번이 한 표(A 심사위원), 2번 3번이 각 한 표(B 심사위원)씩 나왔다. 심사위원은 다시 한 번 1번 2번 3번을 읽으면서 꼼꼼하게 검토하였다. 마지막 1번과 2번으로 추리고, 고심 끝에 최종 수상자를 2번으로 결정하였다.
3번 - 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이 좋고, 자신만의 사유를 확장해 나가려는 방식에서 숙련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의 효과에 비해 정제되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표현들이 다소 아쉬웠다.
1번 - 의미나 맥락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무겁지 않고, 진지함보다는 사소함을 통해 핵심에 다가가려는 태도가 잘 읽혔다.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이미지의 운용이 활달하고 경쾌하나 한편으로는 가볍다는 혐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2번 - 마음에 어떤 움직임을 일으키는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그 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힘이 그것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에서 보듯이 서정적인 울림을 담백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비극적 세계를 따뜻하고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에 믿음이 간다.
이번 2020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수상자는 한상신 시인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그 첫걸음이 시의 진정성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산맥 안에서 기존 등단자와 빠르게 동화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본심 : 이화은 이승희 // 예심 : 조희진 최지원 김정현(시산맥 등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