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기(漆器)
칠기란 옻칠과 같은 검은 잿물을 입혀 만든 물건으로, 제작기법에 따라 목심제(木心製), 협저제(夾紵製), 목심협저제(木心夾紵製), 남태제(藍胎製) 등으로 나뉜다. 목심제칠기(木心製漆器)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형태를 만든 다음 표면에 칠을 한 것이며, 협저제칠기(夾紵製漆器)는 저(紵)를 물 속에 담가 두었다가 양잿물을 섞어 짓이긴 다음 오물을 빼고 기물의 형태를 만들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옻칠을 하여 제작한 것이다.
목심협저제칠기(木心夾紵製漆器)는 나무에 포(布)를 입히고 칠을 한 것이다. 남태제칠기(藍胎製漆器)는 대나무나 버드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것을 일컫는데, 남정리 116호분 출토의 칠채협(漆彩篋)과 칠통(漆筒)이 대표적이다.
장식기법으로는 칠기의 표면에 운문(雲文), 와문(渦文), 원문(圓文), 동물문, 괴수문을 그리는 칠회(漆繪)기법, 기물의 테두리나 표면에 가는 침과 같은 도구로 음각선을 그려 문양을 새기는 음각기법이 있으며, 장식성과 함께 견고함을 더하기 위하여 이배의 귀부분이나 칠반, 완의 테두리, 갑(匣)·통(筒)·염(염)의 테두리나 측면 등에 금동이나 은제의 테를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칠기에 유리를 삽입하는 감입기법도 행해졌는데, 정백리 2호분과 석암리 6호분에서 출토된 칠함의 뚜껑에서 볼 수 있다. 금동사엽(金銅四葉) 장식이 있는 이 뚜껑에는 중심과 각 엽에 얇은 백색 유리를 감입하여 내면의 동물문양을 안쪽에서 투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밖에 표면에 얇은 금·은 조각을 잘라서 문양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칠을 한 뒤 다듬는 기법인 평문(平文)이나, 동전을 이용하여 장식하는 전화장식(錢貨裝飾)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칠장(漆匠)
옻나무 수액인 옻칠을 채취하거나 기물에 옻칠을 하는 장인.
목차
1 개설
2 담당 직무
3 변천
개설
칠장(漆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용도에 맞게 정제하여 만든 옻칠을 기물 표면에 칠해서 칠기(漆器)를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칠기란 옻칠을 한 기물을 말하며, 대개 나무로 만든 기물 표면에 옻칠을 하기 때문에 목칠기(木漆器)라고도 한다. 옻칠은 예로부터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옻나무 재배, 옻칠 생산과 수급, 칠기의 제작을 국가에서 관장하였다. 따라서 칠장은 각 시대마다 주로 관장(官匠)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뛰어난 칠장은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담당 직무
옻칠은 산(酸)과 알칼리에도 강하고 열과 습기에도 강해서 나무가 갈라지고 터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방충, 방부 효과가 좋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변색도 되지 않고 광택도 좋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일본 등지에서 천연 도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옻칠뿐 아니라 나전(螺鈿)과 결합된 나전칠기(螺鈿漆器) 기법이 우리나라 칠기법(漆器法)을 대표하는 기법으로 발전하였다. 칠장은 옻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용도에 맞도록 정제하여 흑칠(黑漆), 주칠(朱漆) 등 옻칠액을 제조한다. 그리고 다양한 기물의 표면에 적당한 두께와 색이 나도록 칠을 올려 칠기를 완성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전국의 옻나무 산지를 직접 관리하였고, 생산되는 옻칠을 공납으로 받았다. 칠장은 경공장과 외공장에 소속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주로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중앙에는 병조(兵曹)와 군기감(軍器監), 상의원(尙衣院) 등에 배치되었다.
옻칠은 일반적으로 목조 가구와 문방사우를 비롯한 문방구, 소반 등 생활 용구, 목조 건축 등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병조와 군기감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병조와 군기감 제조(提調)가 칠장의 수를 9명으로 늘려줄 것을 요청하는 기록이 있는데(『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 때문인지 병조에 소속된 칠장은 9명으로 나와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하던 군기시(軍器寺)에 활과 활촉을 만드는 궁현장(弓弦匠)과 마조장(磨造匠)·유칠장(油漆匠) 등과 함께 칠장 12명이 소속되어 병기 제조에 종사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빈궁도감(殯宮都監)과 혼궁도감(魂宮都監) 등에도 칠장이 배치되어 재궁(梓宮)을 칠했던 기록들을 각종 『의궤(儀軌)』나 『일성록(日省錄)』 등에서 볼 수 있다. 재궁에 옻칠을 하는 진칠(進漆) 작업은 의식에 따라 매우 경건하게 진행되었으며, 사후 칠장에 대한 시상이 진행되었다.
18세기 후반 경상남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 설치된 12공방에서 나전칠기를 비롯한 공예품을 제작하던 관장들 중에도 칠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인근 지리산 지역에서 채취된 옻칠을 사용하여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막대한 양의 칠기를 생산하였으며, 폐영 이후에는 사장(私匠)으로서 한국 칠공예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 ‘공장’조에 수록된 전문 직종이나 각종 『의궤』, 『일성록』 등에는 칠장뿐만 아니라 바탕칠을 하는 가칠장(假漆匠)과 옻칠을 하는 진칠장(眞漆匠)·소반을 칠하는 반칠장(盤漆匠) 등도 등장한다. 이는 옻칠의 용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전문 분야를 더욱 세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천
삼국시대 고분과 통일신라시대 왕궁의 연못인 안압지(雁鴨池)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당시 다양한 칠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옻칠은 역사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하던 관수품이었기 때문에 옻칠을 담당하는 칠장 역시 주로 관장으로 활동하였다. 삼국시대의 기록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에서는 중앙의 칠전(漆典)이라는 관서에서 칠공예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용 기명(器皿)과 진보(珍寶)를 담당하던 중상서(中尙署)와 무기 제작을 담당하던 군기감에 칠장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칠장이 경공장과 외공장으로서 병조와 군기감, 상의원 등에 배치되어 국가에 필요한 칠기를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