闡美錄 卷之上 [천미록 권지상]
매우 아름다운 사실을 기록하다
내 친구 전(全) 비서원 비서랑(秘書院秘書郞) 능석 병기(陵石 炳基)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히 아름답고 바탕이 뛰어난 어린이(童子)로 자랐다. 아버님 병환에 약을 구하려고 전날 밤부터 차비(差備·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떠났는데 다행히 신령스러운 스님의 인도로 그날로 약을 구하여 다시 아버님을 뵐 수 있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르기를 지극한 효성에 감동되어 이루어졌다고 한다.
두 동생과 더불어 우애가 깊었으며 마침내 재산을 나눌 적에 기름진 전답은 사양하고 메마른 땅만을 자신이 가졌다고 한다.
일찍이 한(恨)이 된 것은 시조 환성군(歡城君· 諱 聶)이하 삼위(忠烈公·忠康公·忠達公)의 묘소(堂斧)를 실전하였으니 곧 숭인방(崇仁坊· 고양군 숭인면 이문리· 지금 동대문구 이문동) 천장산(天藏山· 한국외국어대 뒷산) 아래에 설단(設壇)하고 인하여 근방에 재사(齋舍)를 짓고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한 구역의 제전(祭田)도 마련하였다.
가문(家門)에서 가정을 꾸리지 못한 조카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도와 혼인을 시켰고 집안의 아이들 가운데 가난하여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의 학비를 부담하여 취학도록 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마을에 우물을 파서 목마름의 근심을 덜어 주고 곤궁하여 조세(租稅)를 못 내는 사람을 찾아 대신 갚아 주었으니 그의 선행(善行)은 대략 이와 같았다.
빈곤한 친척을 구제하고 길 가던 나그네와 걸인들의 다급함을 구해주었으며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다 기록할 수는 없었으며 한 시대에 덕망을 갖춘 신사(紳士)로서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그 이름을 사모하고 행위를 부러워하며 경쟁이나 하듯이 하례(賀禮)하는 시문(詩文)이 거의 수백 편에 이르렀다.
어느 날 그의 장자인 형식(鎣湜)군이 소매 속에서 한 뭉치의 문서를 끄집어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로 인하여 군자들이 우리 아버님을 하례하여 보내온 시편(詩篇)을 들고 찾아왔다.
소자는 그 자료가 흩어져 없어질까 염려되어 책으로 간행하고자 장차 목판에 새겨 내 아버님의 선행을 영원토록 전하려 하는데 아버님께서 아들과 사이를 막고 있어 감히 두렵지만 애걸하며 또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아버님의 성품과 도량은 겸허하고 조용하여 근래에 이름이 드러난 사실을 일절 자랑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면서 매우 엄하게 지금 이 일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시니 어찌하오리까?
아버님의 아름다운 덕과 행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착하고 선망의 행위를 여러 현인군자가 시문(詩文)으로 하례(賀禮)를 올리고 있으니 이것은 선(善)을 좋아하는 진실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선조님의 아름다움과 훌륭한 지위가 있는데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불효가 되느니라 하였으니 지금 자식이 된 자로 능히 아름다운 행위를 알고 후세에 영원히 전하여지고 도모한다면 효자일 것이다.
그러한즉 천미(闡美· 아름다움을 기록한 문서)란 표제(表題·署)가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듣기로는 자애로운 아버님은 효자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우리 시험 삼아 돌아가 아버님께 고해 올려 보리다. 겸허함을 보이면은 반듯이 허락하시리라.
서문(序文)은 그(鎣湜 公)의 뜻을 거절하지 못하고 드디어 이와 같이 적었나이다.
1928년 (戊辰) 3월 하순
승훈랑 전 돈녕부 주사 광산인 청거 정홍림(靑居 鄭泓林) 서문을 짓다.
[原文]
忠臣有若採薇軒
繩武賢孫昌大門
常棣如今長對蕚
靈芝從古豈無根
設檀香燒天藏岳
鑿井泉甘可樂村
老我蕪辭非溢美
同城記取輿人論
判書 經石 李愚冕
[번역문]
채미헌 전오륜이 충신이었으니
선조의 행적을 이은 후손이 대문을 열어 번창하였도다.
형제간의 우애가 아가위나무 꽃받침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으니
영지버섯은 예로부터 어찌 뿌리가 없이 필 것인가?
천장산 아래 단소를 세우고 향화(香火)를 잇고
우물을 파니 물맛이 달아서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었도다.
늙어서 거칠게 쓴 글이 지나치게 칭찬한 것 아니라
여러 사람의 중론을 기록하여 같은 성(城)을 쌓음과 같음이라.
판서 경석 이우면
[原文]
至行如君世所稀
奉先誠意闡幽微
楊阡歲久勤攀栢
松嶽風淸慕薇軒
早隱城闉樂韜晦
晩成堂構識歸依
於今縱述思亭記
愧乏后山文發揮
判書 趙胤熙
[번역문]
그대(全炳基)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이는 세상에서 희귀하니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어렴풋한 것을 자세하게 나타냄이니
버드나무 늘어진 도로도 오랜 세월과 돈독한 노력으로 만들어짐과 같이
송악(개경) 풍경이 청아해지고 채미헌(전오륜) 선조를 사모함도 이와 같았다.
일찍이 성문 안에 숨어서 은둔의 삶을 살면서
조상이 설계한 집을 후손이 짓는 것이 늦게 이루어짐을 받아들였다.
이제 조상의 발자취를 기술하고 추모하는 사당을 생각해보면서
뒷산과 같은 글을 지으니 부끄럽다네
판서 조윤희
[原文]
憶昔薇軒志節完
後孫孝友繼衣冠
瀧村有給兼爲井
廟祀無徵且設壇
棣蕚相輝春不老
芝蘭竸秀月長團
從來遐福由人至
此理於君取細看
判書 聽雨 閔京鎬
[번역문]
채미헌 전오륜의 지조와 절개의 견실함을 회상해보니
후손들이 효도와 우애를 지니고 의관을 이어받았네
여울이 있는 동네는 물이 넉넉하지만 겸하여 우물도 준비하듯이
묘소를 실전한 문중은 또한 단소를 설치하여야 하느니
형제들의 화목함이 빛나서 언제나 봄볕 같아서
집안의 인재들이 빼어남을 나타내고 달과 같이 성장해가네
예부터 지금까지 멀리 있는 복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이니
그대(全炳基)는 이런 이치를 자세히 고찰하였나 보다.
판서 청우 민경호
[출처] 闡美錄
※ 하례(賀禮)하는 시문(詩文) 수백 편 중에 우선 3수만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전씨(全氏) 광장 | 제4대 전병기(全炳基) 종약장 - Daum 카페
전씨(全氏) 광장 | 능석 전병기 (能石 全炳基) [慕薇齋記] - Daum 카페
@ 이우면 [ 李愚冕 ]
1881년(고종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으로 문명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1885년 공조참의·대사간·형조참의를 지냈고, 1886년 이조참의·호조참의·대사성이 되었다.
승정원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 등을 거쳐 1890년 호조참판·병조참판이 되었고, 1891년 동돈녕(同敦寧)·한성부우윤·예조참판, 1892년 한성부좌윤·승정원좌승지를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비서원승(秘書院丞), 1898년 회계원경(會計院卿), 1902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비서감경(秘書監卿)이 되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비서감경·홍문관학사·장례원경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우면 [李愚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윤희 [ 趙胤熙 ]
본관은 양주(楊州). 시조는 조잠(趙岑)이며, 부천에 정착한 18세손 조진한(趙鎭漢)의 21세손이다. 조윤희는 부천에 거주하였으며, 종5품 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윤희 [趙胤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민경호 [ 閔京鎬 ]
본관은 여흥(驪興). 1885년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고 그 뒤 시강원 겸필선을 거쳐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889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91년에는 이조참판이 되고, 1898년에는 궁내부특진관, 1899년에는 봉상사제조가 되었다. 1899년 10월 일시 면직되어 고군산(古群山)으로 유배되었으나 1900년 12월 사면되었다. 1901년에 다시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평안남도 관찰사, 1902년 2월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냈다.
1903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고, 1905년에는 비서감승(秘書監丞)의 관직에 올랐다. 같은 해 7월에 규장각직학사, 1906년 시강원첨사, 태의원경을 지냈다. 그 해 3월 비서감경, 9월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경호 [閔京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한복 [ 李漢福 ]
근대기 |
1897 ~ 1940 |
서예, 일반회화 |
서화가 |
근대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호는 수재(壽齋) · 무호(無號),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근대 화단에서 배출된 1세대 화가로 화조화를 비롯해 산수와 기명절지를 잘 그렸다. 서예는 오창석(吳昌碩)의 전서체를 근간으로 변화를 준 글씨를 잘 썼으며, 골동품 애호가로 감식안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어 서울의 궁정동 대저택에 머물며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11년 설립된 경성서화미술원에 입학하여 문기어린 남종화풍과 정교한 필선을 위주로 하는 북종화풍을 배웠으며, 1914년 이용우(李用雨) · 오일영(吳一英) · 이용걸(李容傑) 등과 함께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오일영 · 이병희(李丙熙) 등과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집을 드나들며 글씨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 화보의 임모를 통해 그림을 배웠기 때문에 <참새>(1916)에서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화법을 구사하였고, 안중식의 화풍을 보이는 기명절지류의 그림을 다수 제작하였다.
1918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일본화과에 입학하여 일본화풍을 배웠으며 1923년 졸업하였다.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書畵協會)의 정회원이었고,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를 무대로 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수묵채색화에서 3등, 서예에서 4등을 하였고, 1923년 제2회 때는 서예에서 3등을 하였고, 1924년 제3회 때에는 수묵채색화와 서예 두 부문에서 1등 없는 2등을 하였다.
이때 이한복은 일본에서 중국의 오창석과 일본 동경미술학교 교수인 타구치 베이호우(田口米舫)의 영향을 받았다며, 일본의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비해 유치하여 일본 서화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당선 소감을 피력하였다. 1924년 제4회 서화협회전에 <운(雲)>, <앵(櫻)>, <계(鷄)> 등을 출품하였다. 이 무렵 이한복의 화풍은 일본에서 그림을 배우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실적이면서도 채색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는 일본풍의 화조화를 그렸는데, <엉겅퀴>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골동 감식안이 뛰어나 지척에 살았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을 거의 매일 만났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골동품을 구입할 때마다 김용진(金容鎭) · 박영철(朴榮喆) · 장택상(張澤相) 등과 만나 감상하며 미술품에 대한 감식안을 높여 갔다.
1925년 10월 김복진이 청년회관에 미술연구소를 설치하고 체계적인 교과과정을 마련했는데 이 때 김복진 · 김창섭과 함께 교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일본에서 변관식 · 방무길과 함께 동경유학생 35명을 규합하여 조선미술회를 조직하고, 화단의 쇄신과 조선미술의 세계적 지위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실질적인 활동상은 밝혀진 바 없다. 1926년 조선미술 비하론을 내세우며 가토우 쇼우린(加藤松林) · 카타 야마탄(堅山垣) 등 20명의 일본인과 함께 총독부 학무국에 서예와 사군자는 예술적 가치가 없다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폐지할 것을 건의한 것과 달리 그 해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 자신의 화실을 일본식으로 꾸미는 등 일본 친화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한복, 계산무진
글씨는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까지 유행한 추사체를 모방한 예서와 오창석(吳昌碩)의 필체를 따르는 전서 및 해서 등 다양한 서체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추사체와 관련 있는 <계산무진(谿山無盡)>은 자유로운 화면 구성과 비백(飛白)의 산봉(散鋒)처리가 근대기 추사체의 전통을 보여준다. 또한, 청나라 오창석의 필체를 본받아 전서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1922년에서 1929년까지 연속해서 조선미술전람회의 미술부 서예부에서 수상하였다.
특히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10점 중 9점이 오창석 필체를 따른 전서체라 주목된다. 그 가운데 1924년 조선미전 3회에 2등상을 받은 《전문쌍련(篆文雙聯)》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원필세의 전서에 농묵의 마른 갈필로 속도감을 내는 질삽(疾澁)으로 자간(字間)의 답답함을 벗어나게 하였다. 해서(楷書)인 1925년 당선작 <난정서(蘭亭序)>또한 정갈하고 단정한 필세가 이한복 서예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한복, 화조 · 어해도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불참하고, 진명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복고적 화풍으로 회귀한 작품들을 주로 그렸다. 1931년 6월 4일 개신동맹기성회에서 김용수 · 이상범 · 김종태 · 이승만 · 김주경 · 최우석 · 윤희순 · 일본인 가토우 쇼우린(加藤松林) · 카타 야마탄(堅山垣) · 타카기 아키라(高木章) 등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였다. 1930년 오봉빈(吳鳳彬)의 조선미술관에서 주최한 '조선고서화진장품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출품하였다. 1937년 4월 1일 조선미술원 개관전에는 <새>를 출품하였다.
1939년 김용준은 「한묵여담」에서 이한복에 대해 술을 즐겼던 애주가라고 하여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940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북경 중앙공원에서 조선미술관이 주최한 조선명가서화전람회에 오세창을 비롯해 김용진 · 김은호 · 김태석 · 이상범 · 이용우 등과 참여하였고, 5월 화신화랑에서 주최한 10대가 명가산수화전에도 참여하였지만 이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집필자
강영주(서예), 최경현(일반회화)
주요 작품
참새(1916), 雲 · 櫻 · 鷄(1924), 篆文雙聯(1924), 엉겅퀴, 谿山無盡, 石鼓全文(1922), 篆文般若波羅密多心經(1922), 蘭亭序(1925), 篆額笑對靑山(1926), 篆聯一對(1926), 吉祥文(1927), 篆額(1928), 石鼓集字聯(1928), 楷書(1929), 石鼓八言對聯(1929)
출처
선조(先祖)의 훌륭한 행적을 본받아 자신을 경계(警戒)하거나 계신(戒愼)하는 일.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 상체(아가위 나무)의 꽃을 형제의 우애에 비유한 노래임. 전(轉)하여 형제(兄弟)간의 우애(友愛)를 비유하는 말.
[네이버 지식백과] 상체 [常棣]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숨은 것을 밝힘.
여러 해가 지나 꽤 오림.
진(晉)나라 왕부의 부친이 사마소에게 살해되자 왕부는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옆의 잣나무에 매달려 울부짖었는데, 나무에 눈물이 흘러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 晉書 孝友傳 王裒 〉
1 (자기(自己)의 재능(才能)ㆍ지위(地位) 같은 것을) 숨기어 감춤.
2 종적(蹤迹)을 감춤.
궁전(宮殿)의 꾸밈새.
아들이 아버지가 설계한 집을 짓는 즐거움. 아들이 아버지의 業(업)을 계승하는 즐거움을 이름.
[네이버 지식백과] 당구지락 [堂構之樂]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조기형, 이상억)
옛일을 돌이켜 생각에 잠김.
지초(芝草, 영지靈芝)와 난초.
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지란생어심림 불이무인이불방 ; 지란은 깊은 숲속에 나지만, 사람이 없다 하여 향기를 내뿜지 않는 건 아니다.-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한다.)<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
庭下芝蘭繁奕葉 門前桃李尙靑春(정하지란번혁엽 문전도리상청춘 ; 뜰 아래의 지초와 난초-집안의 인재-들은 대대로 번성하고, 문앞의 복숭아와 오얏-문하생門下生-들은 아직도 봄일세.)<전득량田得良 곡행촌이시중암哭杏村李侍中嵒>
*芝蘭之交(지란지교) : 깨끗하고도 맑은 벗 사이의 교제. 감화(感化)를 주고받는 교제.
但使芝蘭秀 何須棟宇隣(단사지란수 하수동우린 ; 다만 지란지교로 좋게 할지언정, 어찌 구태여 집을 이웃하여 살아야 하리오.)<두보杜甫 증왕24시어설40운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
*芝蘭玉樹(지란옥수) : 훌륭한 자제(子弟).
[네이버 지식백과] 지란 [芝蘭]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상세히 보다. 면밀하게 고찰하다.
첫댓글 유익한 자료 감사히 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