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28>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왜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을까?(下)
獨 민중 교황에 분노…
루터 외침이 ‘혁명의 불씨’로
루터 ‘믿음·성서 지상주의’ 주창, 중세 가톨릭교회 사상 기반 부정
‘95개 조 반박문’ 유럽 전체 확산,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 큰 역할
종교 넘어 권리·자유 당위성 높여, 유럽 근대화 이끈 정신적 자산으로
비텐베르크 시청사 앞의 루터 동상. |
고향인 비텐베르크까지 면벌부 판매가 이어지자 마침내 루터는 1517년 10월 말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충당할 목적으로 당시 독일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던 면벌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일종의 개인 의견서였다. 면벌부 구입과 동시에 연옥에서 신음하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근본적으로 교황과 사제에게는 죄의 사면권이 없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바르트부르크 성 안 마르틴 루터의 기도실.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이러한 루터의 견해에 대해 로마교황청이 강하게 반응하면서 독일의 한 신학 교수가 들어 올린 횃불은 거센 변혁의 바람을 타고 급기야 유럽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 중 왜 하필이면 루터가 종교개혁에 불을 붙이게 됐을까? 루터는 작센주 튀링겐 지방에서 원래는 농부였으나 광산 임대로 재산을 모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했던 루터만큼은 자신처럼 손에 흙을 묻히면서 살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식의 의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루터를 당시 북독일 지방 명문대학이던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내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안정된 직업인 법률가의 길을 가도록 강요한 셈이었다.
하지만 1505년 여름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후 루터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고 말았다. 친구와 함께 시골길을 가던 루터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를 피해 나무 밑에 있을 때, 느닷없이 떨어진 벼락으로 친구는 즉사하고 자신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한 채 부친의 간청을 뿌리치고 수도사의 길로 향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이 타락한 중세교회를 쇄신할 의도로, 그 옛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도 바울(본명 사울)을 회심으로 이끈 것처럼, 루터라는 인물을 들어 쓰고자 역사한 셈이었다. 아니면 에릭 에릭슨과 같은 심리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자신의 장래에 대한 평생에 걸친 부친의 강압에 억눌려 있던 루터의 반항심이 드디어 폭발했는지도 모른다.
수도사 시절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각종 규례를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영적인 평안을 누릴 수 없었다. 신앙적으로 번민에 시달리고 있던 루터는 1508년경 수도원장의 권유로 비텐베르크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모교에 성서신학 교수로 남아 연구와 교육을 지속했다. 여전히 구원의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던 루터는 마침내 1513년 그 해답을 성서에서 찾기에 이르렀다. 신약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접하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신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처럼 선행을 강조한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눈으로 성서를 바라보기 시작한 루터의 입장에서 당시 독일에서 자행되고 있던 면벌부 판매는 묵과하기가 힘든 문제였으리라. 더구나 그는 불 같은 성격에 불굴의 의지력을 타고난 인물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루터의 신앙관은 이후 그가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 테제’를 내걸고, 로마교황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믿음 지상주의(sola fide)’에 더해 그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신에 대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성서 지상주의(sola scriptura)’를 주창했다. 이를 수용할 경우, 그동안 성서에 버금가는 신앙적 권위를 누려온 교황의 교서, 종교회의의 결정, 성인의 전기 등은 무용지물에 불과하게 된다. 중세 가톨릭교회 신앙의 사상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셈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서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적 기반마저 뒤흔드는 주장을 했다. 그는 인간은 오직 각자의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기에 신에게 나아가는 길은 사제들에 의해서만 독점될 수 없고 모든 평신도에게 신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이른바 ‘만인 사제주의’를 내세웠다. 이는 당시 종교적 상황에서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신의 대리자임을 내세우며 교황을 정점으로 중세 천 년간 구축되어온 사제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교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터의 반발이 광야의 고독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고 당시 독일 민중에게 어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루터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했던 다른 개혁가들은 실패한 반면 왜 루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문제 이외에 당대의 정치 및 경제적인 측면까지 고찰해야만 한다. 중세에 로마가톨릭과 교황권은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중세인들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 이외에도 당시 독일인들 사이에서 로마교황청에 대한 불만이 쌓여온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탈리아 사람인 교황이 독일의 교회 문제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도 불합리한데, 여기에 더해 자신들이 낸 거액의 종교세가 고스란히 로마교황청 금고로 들어가 교황청의 사치스러운 행사 및 성당 치장 비용으로 낭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독일인들은 교황권의 배제를 갈망하면서 누군가가 자신들의 억눌린 가슴에 불을 댕겨주길 고대하고 있었다. 이처럼 ‘종교적 민족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루터의 ‘95개 조’가 작은 불씨가 됐던 것이다.
한 개비의 성냥불이 순식간에 장작불 더미로 변한 저변에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이 있었다. 1450년대 이래 인쇄기술은 제지술 및 잉크의 개량과 보조를 맞추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루터가 작성한 ‘95개 조 반박문’은 루터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불과 이틀 후 한 인쇄업자에 의해 팸플릿으로 인쇄되어 삽시간에 독일 각지, 아니 유럽 전체로 확산됐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로마교황청과 맞서기로 결단하는 과정에서 루터가 작성한 세 개의 팸플릿도 수만 부씩 인쇄되어 유럽 각지로 전파됐다. 당시 활판 인쇄술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유럽 근대화의 비밀 무기였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최초 성경책. |
사건의 역사적 영향
일단 루터가 물꼬를 터놓자 종교개혁의 물결은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들 중 대표자로 장로교의 창시자인 캘빈(John Calvin)을 꼽을 수 있다. 원래 프랑스 신교도였다가 종교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1540년 초부터 제네바에 정착, 시정(市政)까지 장악하면서 종교적 기반을 닦았다. 캘빈은 1536년 『크리스트교 강요(綱要)』를 통해 자신의 신앙 교리를 체계화했다. 무엇보다도 제네바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개혁가들은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가서 위그노, 퓨리턴, 고이센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본격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시대를 열었다. 빠르게 발흥한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가톨릭 세력 간의 갈등은 급기야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재앙을 초래하기도 했다.
1517년 루터가 방아쇠를 당긴 종교개혁은 거의 1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개인의 종교 자유를 허용하는 선까지 나아갔으나 발발 이후 서양 세계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중세 가톨릭교회의 통일성을 타파하고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양분하는 계기가 됐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프로테스탄트 권역인 게르만적 중북부와 가톨릭 권역인 라틴적 남서부로 나뉘었다.
특히 루터가 내세운 ‘만인사제주의’는 신 앞에 만인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이후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권리 신장 및 개인 자유의 당위성을 높이고 이의 실현을 고양하는 지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타파하고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성을 해방함으로써 유럽을 근대화로 이끄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됐다.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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