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반, 서울 신촌 연남서식당의 뒷문에는 벌써부터 갈비를 먹으려는 손님들로 줄을 잇는다.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은 12시지만 줄이 길면 11시40~50분쯤 입장을 시켜준다. 들어서면 연탄불이 들어 있는 드럼통만 있을 뿐 의자 하나가 없다. 이곳은 이름처럼 서서 먹는 갈비집이다. 간판은 작년까지 서서갈비였는데 사업자등록증의 상호명을 따라 연남서식당으로 바꾸었다. 손님 중에는 멀리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 꽤 있는데, 가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이다. 하하호호, 마치 축제에 온 듯 흥겨운 분위기랄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드럼통에 둘러서서 이 집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표정들이다. 메뉴는 오직 소갈비 하나. 종업원이 부지런히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갈비 대수를 주문받는다. 상차림이라야 아삭이고추와 고추장, 양념장이 전부다. 밥이나 김치가 필요하면 근처 편의점에서 사와야 한다. 그 외에 다른 음식은 일절 반입이 안 된다.
이 식당은 연탄불 위에 석쇠가 아니라 두툼한 철판을 놓고 갈비를 올려준다. 양념갈비인데도 간장색이 안 나고 붉은 빛깔이 난다. 연탄불에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가면 종업원들이 어느새 와서 먹기 좋게 잘라준다. 잘 익은 갈빗살을 양념장에 듬뿍 찍어 한입 넣으면 달짝지근하면서 순한 양념 맛에 군침이 돌고 쫄깃하게 씹히는 육질이 참 기가 막히다. 보통 갈비 하면 기름기가 많은 것을 연상하는데 이 집은 신기하게도 기름지지 않고 순살코기 느낌이다. 고기 먹는 중간에 아삭이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한 번씩 베어 물면 느끼함을 싹 잡아준다. 한 대에 약 150g인데 맛이 물리지 않으니 한 사람당 두 대는 너끈히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가게 안에 가득 차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다. 옷이나 가방을 비닐봉지에 싸더라도 머리와 온몸에 스며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연탄불 드럼통에서 연기가 쉴 새 없이 나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냄새와 연기가 많이 나서 짜증내다가도 집에 돌아가면 우리 집 맛있는 갈비 생각에 군침이 고인대요.” 주인장 이대현(75)씨는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집 갈비 맛에 반한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거기에 드럼통에 둘러서서 먹는 것 자체가 독특하고 재미난 즐길 거리로 통하고 있어 가게는 언제나 문전성시다.
이 집은 종업원 열네 명 중에 다섯 명이 고기 손질을 전문적으로 한다. 하루 쓸 갈비 600대를 매일 오전에 손질하는데 국내산 뼈갈비에 미국산이나 호주산 갈비안창살을 붙인다는 점이 특이하다. 국내산 육우 뼈갈비를 마장동에서 들여오는데, 사실 뼈에 붙은 갈빗살은 약 3㎝ 정도밖에 안 되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기를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2011년부터 수입된 고급 갈비안창살을 뼈갈비에 덧붙여서 내놓게 되었다고.
갈비양념에 연육제는 전혀 넣지 않는다. “연육제를 쓰면 고기는 연해지지만 심줄은 그대로 남아서 솜뭉치처럼 되지요.” 다른 식당에서 흔하게 쓰는 연육제 대신 사람 손으로 일일이 질긴 힘줄과 기름덩어리를 모두 발라낸다. 소갈비 30근을 사면 11근을 버릴 정도다.
숙련된 솜씨로 갈비를 손질하기 시작해 양념에 버무리기까지 꼬박 4시간이 걸린다. 양념은 서울토박이 출신답게 순 서울식으로 한다. 간장, 황설탕, 마늘, 깨, 후추에 특히 대파를 듬뿍 넣어 잡냄새를 없애고 달콤함을 안긴다. 이 양념장에 고기를 넣고 버무려 잠시 두었다가 바로 손님상에 내기 때문에 고기 빛깔이 유난히 곱다. 오전에 손질해 재워둔 갈비만 한정판매하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가면 문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 저녁 6시에 문을 닫는 날도 허다하고 가끔은 5시 전에도 갈비가 떨어져 문을 닫기도 한다.
유일하게 반찬으로 주는 아삭이고추는 시장에서 제일 고급으로 산다. 김치나 밥은 앞으로도 제공하지 않을 예정이다. 어떤 손님은 근처에 밥과 김치를 파는 편의점과 커넥션이 있냐고 묻는데 그건 아니란다.
▲ 대표 이대현씨
앉아서 먹을 시간이 없는 노동자들 위해
연매출 30억원에 가깝게 성장하며 젊은이들의 명소가 된 연남서식당은 6·25전쟁의 아픔 속에서 시작되었다. “1952년 추운 겨울, 쌀 세 홉을 벌기 위해 아버지는 장사를 시작했어요.” 전쟁으로 딸과 아내를 잃은 이씨의 부친은 생계를 위해 집 마당에 군용천막을 치고 당시 다른 부위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던 소갈비와 돼지고기를 실비 안주로 구워내면서 잔술을 팔았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노동자 손님들은 여유 있게 앉아서 먹을 시간이 없었다. 급하게 막걸리 한 사발에 구운 고기를 먹고 힘을 내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드럼통 앞에서 서서 먹게 되었고 그것이 서서갈비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집 마당에서 천막 하나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64년째다. 간판은커녕 제대로 된 건물도 없이 길거리 천막 아래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리저리 내쫓기는 등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정식 간판을 걸게 된 것이 1967년. 그 후 반세기 동안 오로지 한 개의 점포만 고집하면서 9번이나 옮겨 다녔지만 이씨의 고향인 마포구 노고산동을 벗어난 적이 없다. 유명해지면서 프랜차이즈 문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프랜차이즈야말로 모방일 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맹점들이 실패할 위험이 많다고 생각하여 모두 거절했다. 장사가 잘된다고 지금까지 분점 하나 낸 적도 없다.
2대 이대현씨는 1979년 대물림을 받았다. 열 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왔던 그는 먹는 장사를 비하하는 사회통념이 싫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다른 것도 많은데 하필 왜 음식점인가! 여행 한 번 못가고 꼼짝없이 매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름의 사업을 시작했고 꽤 성공도 거두었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뒤 사업을 접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6시 반에 나와 연탄불을 갈고 주방 감독은 물론 파를 썰거나 이쑤시개와 휴지를 준비하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다. 자녀가 있지만 물려받으라는 말은 따로 하지 않는다.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씨는 오랜 세월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곳을 자녀들이 쉽게 없애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저녁마다 아들 재훈(47)씨가 나와 연탄재 버리는 일을 도맡고 있다.
한국의 맛을 찾아온 외국인들,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어르신들, 그저 서서 먹는 것이 재미있는 젊은이들, 모두 연남서식당의 현재를 함께하고 있는 손님들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곳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