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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북유럽 여행 ⑨ : 4대 피오르드의 관문인 한자동맹의 옛 도시, 베르겐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452 17.12.07 03: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6() : 베르겐(그리그 생가, 구시가지 브리겐, 어시장)

 

여행 여덟째 날 : 4대 피오르드의 관문인 한자동맹의 옛 도시, 베르겐

 

특징 : 베르겐(Bergen)은 오슬로 서쪽 492km, 대서양 연안의 작은 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항만도시이다. 이 나라 제2의 도시로서 가장 중요한 어항(漁港)이기도 하다. 베르겐은 '포도주의 보급 기지'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비외르그빈(산간 목장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렸다. 1070올라프 3(Olav III)’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350한자(Hansa) 동맹(同盟)’에 가맹한 이래 200년 이상 서해안의 모든 무역을 지배하여 무역항의 기반을 구축했다. 조선·섬유·식품 등의 공업이 발달했으며, 종합대학도 있어 서해안의 교육·문화의 중심지를 이룬다. 작곡가 E.H.그리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213세기에 이 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여러 번의 화재를 겪었다. 19세기 대화재(大火災)를 계기로 목재건축의 신축이 금지되었으나, 한자동맹 시절의 중심가에는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역사지구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참고로 베르겐은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한번쯤은 꼭 들러보는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를 둘러보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노르웨이 관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피오르드(fjord)’로 연결되는 관문(關門)이기 때문이다. ‘송네(Sognefjord)’하당에르(Hardangerfjord)’, ‘게이랑에르(Geirangerfjord)’, ‘뤼세(Lysefjord)’ 등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네 개의 피오르드가 모두 이곳 베르겐에서 연결되므로 이들을 둘러보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쯤이 이곳 베르겐에 들를 수밖에 없다.

 

오늘도 힘든 여정이 계속된다. 아니 어제보다 더 힘든 일정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푀르데(Forge)을 출발해 베르겐을 거친 후 오슬로 근처에 위치한 ’Morejell’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훨씬 먼 거리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푀르데를 출발한지 1시간30분쯤 지나면 라빅(Lavik)이라는 곳에서 송내 피오르드(Sogne fjord)’를 만난다. 스웨덴의 5대 피오르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피오르드이다. 부드러운 육산(肉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물결 하나 일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것이 흡사 내륙의 호수를 닮았다.






건너편에 보이는 오페달(Oppedal)까지는 페리(Ferry)를 타고 건넌다. 이곳도 역시 버스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송네피오르드의 경관은 보잘 것이 없다. 하긴 게이랑에르의 절경을 만났던 게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경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게다. 이때 가이드의 보충설명이 뒤따른다. 송내 피오르드는 규모는 가장 크지만 경관은 다섯 개 가운데 가장 뒤떨어진단다. 그러나 이게 송내 피오르드의 다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 15분 정도를 투자해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것이니 맛보기쯤으로 여겨도 될 일이다. 기껏 이 정도를 보고 송내 피오르드의 모두라고 평가하지는 말자는 얘기이다.



2005년에 세계 자연유산에 등록된 송네 피오르드(Sogne fjord)’100만 년 전인 빙하시대에 빙하의 압력으로 깎여진 ‘U자형 계곡(피오르드)’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204km) 가장 깊은(1,309m) 피오르드이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 피오르드는, 좁은 협만(峽灣) 주변으로 장엄하고 숨막히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꼭대기에는 하얀 눈이 덮여있고 절벽에서는 폭포수가 가느다란 은색의 리본처럼 피오르드의 잔잔한 해수면으로 떨어져내린다고 한다.



다시 1시간 30분쯤 더 달렸을까 거대한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2.6Km정도 떨어진 양쪽 해안을 연결시켜 놓은 다리인데,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으나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진 다리임에는 분명하다. 이 다리를 지나서 길이가 3Km쯤 된다는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드디어 베르겐 시가지이다. 아래 사진은 다른 곳에서 빌려다 썼다.



베르겐의 투어는 그리그의 생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내려 큰 상수리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있는 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면 삼거리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조형물 하나를 만난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생김새를 꼭 기억해 두자.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그리그의 초상화와 똑 같은 모양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먹고 살펴보지 않을 경우 그 모양새를 찾아낼 수 없음에 유의한다. 예술가의 생가라서 조형물 하나까지도 예술적으로 만들었나 보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몇 걸음 더 걸으면 사무동이 나온다. 생가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데스크(desk)에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때 입장권 대신에 작고 동그란 스티커(sticker)를 나누어 주는 게 특이하다. 각자 옷자락 등에 붙일 수 있도록 한쪽 면에 접합제가 발라져 있다.



데스크 옆 벽면에는 그리그의 약력(略歷)을 연대별로 적어 놓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두면 잠시 후에 돌아보게 될 생가에서 더 많은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면 약력 아래에 진열해놓은 블로셔(brochure)라도 하나 챙겨볼 일이다. 에드바드 그리그(Edvard Grieg)는 베르겐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오슬로에 에드바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있다면 베르겐에는 에드바드 그리그가 있다고 할 정도로 베르겐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 뭉크 역시 이곳 베르겐에서 상당 부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리그가 베르겐을 떠나 있었던 시간도 제법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겐에서 그리그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는 누구보다 노르웨이적 색채가 짙은 음악가로 명성이 높은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페르귄트 모음곡(Peer Gynt, 1867)’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를 들어 보면 당시 식민 상황이던 조국에 대한 그의 마음이 느껴질 것이다.



사무동에는 카페와 기념품 숍이 함께 들어서 있다. 카페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별 흥미도 없는 생가를 둘러보느니 차라리 향긋한 커피향에나 빠져볼 요량인가 보다.



생가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 아래에 200석 규모의 콘서트홀이 마련되어 있다. 아담한 목조주택으로 지어진 공연장은 소리울림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계단식 지붕은 잔디로 덮여서 얼핏 보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정원인가 싶을 정도이다.



공연장 앞에는 그리그의 동상(銅像)을 세워놓았다. 152인 그의 키에 맞게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는데 서양인 치고는 무척 작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동양인이라 해도 작은 키에 포함될 것이다. 동상은 엄청나게 인기가 좋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때문이다. 하긴 그리그의 생가(生家)에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공연장에서 바다 쪽으로 스무 걸음쯤 내려가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오두막이 나온다. 복원한 그리그의 작곡실(作曲室)이란다. 그리그는 바다로 향한 창문을 중심으로 피아노와 책상, 그리고 오선지와 펜 등 최소한의 물건을 비치해 놓고 곡을 썼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이 오두막을 복원할 때 발생했던 에피소드(episode)가 하나 전해진다. 아내 니나(Nina)에게 최종 점검을 받는 중에 그녀가 갑자기 집으로 뛰어가더니 두꺼운 악보집을 가져다 피아노 의자에 놓더란다. 이것 없이 그리그의 작곡실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153cm의 단신이었던 그리그는 피아노를 칠 때 두꺼운 악보집을 깔고 앉아야 편하게 건반을 두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두막에서의 조망(眺望)은 좋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노르도스만()은 물론이고 건너편에 있는 산자락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기슭에 기대어 옹기종기 지어진 작은 집들이 시선을 끈다. 푸른 숲속에 하얀 점들로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만일 노을이라도 비낀다면 저 바다 풍경은 흡사 동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수도 있겠다. 아니 그럴 게 확실하다.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그리그의 작업공간을 이곳에다 마련했겠는가.



다음은 트롤하우겐(Troldhaugen)’, 즉 그리그 부부가 30대 중반부터 여름철에 지내던 생가(生家)이다. 북유럽에서 요정을 가리키는 트롤하우겐은 노르웨이 사람으로는 눈에 띄게 단신이었던 그리그의 별명이기도 했는데, 그의 집이 지금도 요정의 정원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생가의 안은 식당과 베란다. 그리그가 사용하던 슈타인웨이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 외에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주요했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된 공간도 있다. 그리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원하는 만큼 음악을 공부하고 작업하면서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 니나(Nina)와 평생을 해로했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Ole Bornemann Bull, 1810-1880)’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1863년에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Rikard Nordraak)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1864~65년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1901년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을 작곡했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솔베이지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페르 귄트 모음곡 작품 23(Peer Gynt Suite Op.23)’홀베르그 모음곡 작품 40(Holberg Suite Op.40) 등이 있다.





생가의 뜨락에서 다시 한 번 시야가 열린다. 아까와 비슷한 풍경인데 이번에는 자그만 섬들 몇 개를 추가시켜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있는 그대로를 떼어다 액자(額子)에 넣고 싶은 풍경이다. 거기에 조금만 덧칠을 한다면 유명미술관에 내걸어도 될 만한 그림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




다리에서 콘서트홀의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이 오솔길은 노르도스만()이 보이는 바위언덕 아래로 연결된다. 오솔길이 바닷가에 이를 즈음 그리그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죽어서도 이곳에 머물길 바랐던 키 153의 거인은 양지바른 바위절벽에 구멍을 뚫고 아내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앞에 보이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낙조(落照)가 던지는 햇빛 줄기가 바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영원히 저곳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907년 그는 영국의 리즈음악회로부터 초대를 받고 베르겐의 노르게 호텔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만다. 생전에 그가 원했던 대로 그의 시신은 이 바위에 안치된다. 그의 부인 니나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1935년까지 살았는데, 그녀가 숨을 거둔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남편의 옆에 함께 안치되었다.




무덤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야가 열린다. 작은 바위들이 노르도스만()을 향해 자연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징검다리가 바다 건너 산자락과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이 정도로는 눈에 차지 않았나 보다. 바위 몇 개를 시멘트로 연결시켜버렸다. 배를 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래의 아름다운 경관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투어를 마치고 빠져나오는 길에 색다른 풍경 하나가 시선을 끈다. 가로등 기둥과 그 옆에 있는 배전함에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아까 생가에 입장할 때 나누어주던 스티커이다. 본연의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일종의 무덤인 셈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베르겐의 구() 시가지이다. 버스는 우릴 어시장 앞에다 내려놓는다. 이어서 한 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뒤따른다. 각자 알아서 구() 시가지를 돌아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일단은 브리겐(Bryggen) 지역으로 향한다. 베르겐 시의 옛 부두이다. 14세기~16세기 중기에 브리겐은 한자동맹이 이룩한 해상무역 제국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매우 독특한 목조 가옥들이 모여 있는데, 당시의 번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과거의 목조 건축물들이 62채 가량 남아 있다고 한다.



베르겐(Bryggen)14~16세기 런던, 브뤼헤 등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한자 동맹의 주요 거점이자 북유럽 최대의 물류 무역항이었다. 특히 대구와 소금 거래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당시 이곳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북유럽 최고였다니 베르게너의 자부심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각형의 뾰족한 지붕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옛날 저곳은 선원과 상인들로 넘쳐나는 왁자지껄한 부둣가였을 것이다. 사실 저 건물들은 처음으로 지어질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본래의 목조 건축들은 수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복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1702년 대화제로 일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는데, 20세기 들어 사료를 바탕으로 세심하게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복원사업이 완벽하게 이루진 사실이 인정되어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바 있다.



베르겐이 북유럽 최대의 상업항으로 발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입지 조건이 좋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이유도 있다. 바로 독일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자동맹의 중심항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북부지역의 상인들은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독일의 도시는 물론이고 외국에 있는 도시와도 상업적인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13~15세기에 독일 상인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러한 상인 집단을 한자동맹이라고 한다. ‘한자(Hansa)’가 독일어로 집단이라는 뜻이니 독일 상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와 다른 지역을 연계하여 공동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결성한 것일 게다. 유럽 남부에서 성행했던 길드(guild)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브리겐은 베르겐의 얼굴이자 심장이다. 원색의 목조건물들이 시가지를 생동감 넘치고 정감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각인시키고 있다. 파격의 색감과 매혹의 디자인으로 지어진 건물들로 이루어진 동화 마을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독일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독일인 무역상들이 브리겐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가옥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현재 남아 있는 목조건물들 중 일부만 14~16세기 것이고 나머지는 18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순차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숫자가 적혀있는데 새로 지어질 때마다 표기를 해둔 것이란다.



거리에는 안내판을 세워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한자박물관 등 근처의 찾아볼만한 곳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가 하면, 건물의 벽에는 브리겐 복원사업에 대한 설명판도 붙여 놓았다.



브리겐 지역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은 대부분 3~4층으로 되어 있다. 주로 사무실과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던 곳도 있다. 이 건물들은 용도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지붕이 뾰족하고, 좁은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조금만 멀리서 보면 지붕과 처마가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립 주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목조 건물들은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의 모습은 신분과 재산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방에는 고급스러운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침실은 밀폐된 곳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반면에 일꾼들이 살았던 곳에는 나무로 만든 간이침대와 벽난로, 여러 명이 동시에 요리를 할 수 있는 화덕과 작은 요리대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곳도 역시 유럽의 도시들의 특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카페의 앞에다 테이블을 세팅(setting)해 놓은 것이다. 점포의 안보다 오히려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하긴 유럽같이 햇빛이 귀한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쏘이고 싶다는 손님들이 찾아오니 어쩌겠는가.



여행자들이 옛 도시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들러보는 곳이 있다. 바로 뒷골목인데, 해당 도시의 은밀한 속살을 엿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곳 베르겐은 예외였던 것 같다. 현지인들의 거주공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옛 건물들 몇을 둘러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대구 모양으로 생긴 조형물이 보인다. 대구가 이 지역의 특산품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베르겐에서는 소금, 대구, 모피, 벌꿀, 의류, 포도주, 곡물, 목재, 양모 등 무척 많은 물품들이 거래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금과 대구였다. 일찍이 베르겐에서는 북해와 아이슬란드 연안에서 잡아 온 생선을 모아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 판매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말린 대구였다. 이는 대구가 많이 잡히기도 했지만 종교가 큰 몫을 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금육재(부활절 전 40일인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하지 않는 것) 기간에는 육류를 먹을 수 없었기에 생선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 말린 대구가 많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브리겐(Bryggen) 지역의 오른편은 신시가지이다. 삼각으로 된 지붕 등 외형은 구()시가지를 흉내 냈지만 본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멀리서 봐도 시멘트로 지어졌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포탄으로 여겨지는 조형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하단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그 반대편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1014-1918’이란 숫자도 적혀있다. 아무래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상을 되새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다에는 각종 배들이 정박해 있다. 유람선이나 요트는 물론이고 어선과 화물선도 보인다. 선조들의 영광을 잇고자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나 아닌지 모르겠다. 베르겐은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무역과 상업항이었다. 북유럽 최대 항구로 엄청난 양의 소금이 거래되었으며, 북해와 아이슬란드에서 잡아 온 생선을 모아 유럽 각지로 공급하는 식량 창고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까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시장(Bergen Fish Market)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유람선과 요트가 즐비한 베르겐 항구 앞 광장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시대의 거리 브리겐(Bryggen) 역사지구의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토르게 어시장(Fiske torget)’라고도 불리는데 매일 열리는 노천시장이다. 11세기 초 항구도시 베르겐이 형성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어시장으로, 40여개의 상점과 노점들로 이루어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이다. 대구, 연어, 새우, 고래 고기 등 신선한 해산물들이 거래되고,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수공예품, , 과일 등도 판매하고 있다.



어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하지만 팔고 있는 생선들은 다양한 편이다. 연어, 대구, 바다가재 등 오만가지 생선들이 판매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킹크랩(King crab)이 아닐까 싶다. 속살만 빼놓았는데도 어른의 팔뚝만큼이나 굵다. 그런 좌판들 속에서 주민과 관광객들이 함께 북적이고 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양자 간의 흥정으로 소란하다. 혹자는 이런 풍경을 보고 베르겐의 살아 있는 허파와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어시장이라고 해서 반찬거리만 파는 게 아니다. 생선회는 물론이고 익혀놓은 킹크랩과 새우꼬지, 홍합 등 조리과정을 끝낸 해물들도 다양하게 진열해 놓고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선채로 음식을 먹고 있는 게 보인다. 그게 싫은 사람들은 포장마차 안에다 만들어 놓은 간이 식탁에서 먹으면 된다. 우리나라의 포장마차 촌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풍경이다.





반듯한 외모의 식당도 보인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붐비고 있다. 조금 전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사람들보다 행색이 나아보이는 건 나만의 선입견일까? 어시장이 배낭족이었다면 이곳은 관광객들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다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경우 만만찮은 가격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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