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다해 1월22일 금요일 [(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과 행복한 응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24,3-21
† 복음 마르 3,13-19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왜, 어떤 목적에서 사도들을 부르셨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라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런데 단어 하나가 궁금해서
그리스 말 성경을 찾아보고서는 속으로 조금 놀랐습니다. 우리말로는
매끄럽지 않지만 그냥 원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도록, (당신이) 그들을 복음 선포하러 보내도록”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동사를 살펴보면 동사의 주어가 밝혀지기에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주어가 바뀐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괄호로
보충했습니다.
사도들이 우선적으로 할 일은 머무는 것이고, 그들을 파견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게 될 일입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사업을 하려면
미리 함께 일하면서 보고 배워야 하듯이, 제자들이 장차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분과 삶을 함께해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때가 되면 그분께서 그들을 파견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복음을
전하겠다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실 것입니다.
이런 과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가서 사도가 되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 곁에 있지 않았던 사람을 어떻게 그분께서 파견하시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당신을 따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
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초대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께서 머무르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은 다음, 첫 제자가 됩니다
(요한 1,38-39 참조).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새로운 이름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4,3-21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9
저는 지금 빠다킹 신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음하기도 편하고
친근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정말로 좋은 별명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전에도 한 번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말한 적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이
별명을 그리고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별명이 생긴 이유가 저의
느끼한 목소리 때문에 생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너 정말로
느끼해.”라고 말하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별명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 별명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다보니 지금의
‘빠다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인천교구 사제 인사이동 발표가 났을 때 어떤 신부님의 이름을
보고는 잘못 써진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인천교구 신부님은 아니라서 잘
모르는 신부님이신데, 글쎄 성함이 ‘방부엌’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구청에
계신 신부님께 이름이 잘못 쓰인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만, 정말로 이름이
‘방부엌’ 신부님이시고 외국 신부님이 아니라 한국 신부님이라고 하십니다.
어머니께서 이 신부님을 방과 부엌 사이에서 낳으셨다고 이렇게 지으셨다고
스스로를 자신 있게 소개한다고 하시더군요. 어렸을 때, 놀림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사제로 기쁘게 살고 계시지요.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름 자체에만 커다란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명소를 찾아가 이름을 짓기도 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개명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들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것보다 길가는 사람들의 칭송이 더 낫다.’(격양시)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12사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수님께서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몬은 교회의 반석이라는 ‘베드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어줍니다. 이렇게 새 이름을 받아서 그들이
변화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새 이름에 적합하게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여정에 오르실 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시몬과 제베대오의 아들들이 새 이름을 얻었지요.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데 왜 이름을 바꿔주셨을까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라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고 있을까요? 진정한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어떤 멋진 이름을 갖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고 올바른 삶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효도의 완성이다(공자).
성지 기도틀. 지향을 적어 꽂아 놓으면 저 역시 새벽에 일어나 같은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어깨를 감싼 팔
재키 라빈슨은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일류 야구팀의 선수로 기용된
사람입니다. 인종 장벽을 실력으로 극복한 그였지만 그가 가는 경기장마다
비웃는 관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브룩클린 뉴욕 경기장에서 그는 경기 도중 그만 실수를 하게
됐습니다. 관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흑인선수에게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낙담한 그가 2루 석에 힘없이 서있을 때였습니다. 유명한
유격수 피 리스 선수가 그에게 다가와서 팔로 라빈슨의 어깨를 감싸 안은
것입니다. 다음 순간 조롱하던 관중들이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훗날 라빈슨은 그 날 자신의 어깨에 놓였던 리스의 팔을 상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팔이 나의 선수생활을 새롭게 시작하게 만들었다!"
지금 나를 격려해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손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내 삶의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빈첸시오 축일입니다. 축일 맞이하시는 분, 축하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가톨릭이란 어떤 종교인가.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가톨릭이란 어떤 종교인가.
예수님이 직접 조직하시고 이어 내려오는 것이 가톨릭의 특징입니다.
그러기에 하나이고 거룩(계시적)하다는 점도 당연히 따르는 겁니다.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알려 전 인류가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소식은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람들이 깨닫질 못하네요.
사랑하라는 법은 모두 하나 되어 살라는 것, 일치 또는 하나입니다.
갈라짐 비방 전쟁 착취 등을 없애자는 정신이 가톨릭의 기본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코 3,14~1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과 행복한 응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 3,13-19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13-14)
사랑의 부르심과 행복한 응답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은 주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이 근원적인 소명의 삶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간절히 만나고자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기도를
통해서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나 세상의 갖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동기가 사랑임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부르시는 분은 항상 예외 없이 주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마치
주인인양 착각하며 나를 앞세우거나 내 업적으로 자랑하는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기준은 원하셨기 때문입니다(3,13). 주님께서는 나의
원의와 상관없이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에게 좋을 것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시기 때문에 우리를 원하십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영원토록 나를
사랑으로 원하시는 분이 계심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비결이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면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품과 성격, 신분과 경력, 외모, 재산 소유 정도 등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원하시기 때문에’ 뽑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부르실 때마다 기꺼이 응답해야 합니다. 나아가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도 신앙인답게 인간적인 요소나 기준 때문에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초대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강요나 구속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동기 자체가 나와 동료
인간들의 선(善)이요 행복이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조건 없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속을 거닐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에서 왜 나를 원하시고 부르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러하셨듯이 ‘함께하기 위해서’(3,14),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도록’(3,14-15)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함께하고, 함께하시는 그분을 드러낼 때 힘
있는 복음선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한 공동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 경청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늘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과
함께하면서 사회적 약자들과 억울한 이들, 소외와 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들,
인간의 기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과 깊은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부름
받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원하시어 함께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사랑의
응답을 하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14-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둘을 사도로 뽑으십니다. 사도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마귀를 쫒아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과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온갖 악들을 쫒아내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사도로 불림받으려면
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슬픈 소식, 음울한 소식을 전하고 퍼트리는 사람은 참 사도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참 사도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알기에
그것을 쫒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제 사도로 불릴 준비가 되셨나요?
아직 멀었다구요!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요?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더 가지라고 하시네요.
그것을 꾸준히 하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고
마귀와 마귀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가 있다고 하네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받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또 그분의 사도로 불리게 될 여러분을 강복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마르 3,13-19)
생명을 불어넣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싱싱한 삶의 현장에서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잡고있는 것을 우리가 놓는 것입니다.
집착이 아니라 기쁨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머무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참다운 신비란 주님과의 정직한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란 우리들 삶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신비에 눈뜨게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안주할 수 없는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아름다운 사도의 여정은 아름다운 사람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란 삶다운 삶을 살고싶은 이들입니다.
삶다운 삶이란 주님의 기쁨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질투의 화신 사울왕과 상남자 다윗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 3,13-19
질투의 화신 사울왕과 상남자 다윗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2대왕 다윗 사이의 복잡 미묘한 애증관계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무엘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사무엘은
주님의 명에 따라 인물이 출중하고 다재다능한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잘
생겼으면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이를 보았소?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은 없소.”
(사무엘기 상권 10장 24절) 아마도 사울은 요즘으로 치면 185cm의
꽃미남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주어진 부담스런 직책 앞에 사울은 꽤나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간택된 후 얼마나 적응하기가 힘들었으면
대중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짐짝 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점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과 의기투합한 뒤 전쟁터로 나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용맹한 사울왕의
군사들이 암몬족을 초토화시키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울왕은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왕권을 굳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울왕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던
사울왕은 무리수를 두게 되게 되면서 백성들의 신임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 요나탄 그리고 아들 못지않은 다윗과도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 허망하게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기름부음까지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왕 자리까지
오른 사울왕의 몰락의 배경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는 왕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왕이지만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왕권에 대한 사울왕의 과도한 집착이 몰락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집착은 또
다른 두려움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임기 내내 이 족속 저 부족과의
전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권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가장 측근인 아들 요나탄과의 갈등 상황까지
초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왕은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떠오르는 샛별
다윗을 향한 시기심은 하늘을 찔러 암살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완전 정복하고 금의환향하자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인들이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렸습니다. 악기에 맞춰 춤까지 추면서
이런 가사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사무엘기 상권 18장 7절)
마침내 주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왕으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붇도록 명령하십니다. 사울왕이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커져가자 하느님 두려운
줄 몰랐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위기
앞에 하느님을 찾지 않고 인간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신의
뜻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은 결과가 비참한
쇠락이었습니다.
다윗을 암살하기로 계획한 사울왕은 증오의 칼을 품고 집요하게 다윗의 뒤를
쫒기 시작합니다. 서로 쫒고 쫒기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울왕과
다윗은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참으로 특별한 애증관계입니다.
사울왕의 시기질투로 인해 다윗은 야반도주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망명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도 사울왕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일편단심입니다. 사울왕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항상 이랬습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사울을 치라는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다윗은 늘
이렇게 그들을 타이르며 주군을 살려줬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
(사무엘기 상권 24장 7절)
마침내 사울왕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한판 싸움에서 대패합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알게 된 사울은 호위병에게 명령합니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사무엘기 상권 31잘 4절)
그러나 호위병 역시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찌르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자신의 칼을 바닥에 꽂았습니다. 사울왕은 그 칼 위로 엎어지며 자결을
합니다. 한때 주님으로부터 간택받았고 거룩하게 기름부음받은 사울왕이
더없이 비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묵상하며 인생만사 새옹지마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지
않는 겸손의 덕임을 되새깁니다.
집요하게도 뒤꽁무니를 쫒으며 자신의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던
사울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보여준 태도는 정말 ‘상남자’답습니다.
사울왕과 요나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애통한 마음에 입고
있던 옷을 잡아 찢었습니다. 하루 내내 울며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활의 노래’라는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습니다.
사울왕과는 달리 다윗은 언제나 자신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울왕의 끝도 없는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천적 같은
사울왕을 언제나 용서했고 살려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성왕(聖王) 다윗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 3,13-19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어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 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백성 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서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