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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곧 구별된 세 위격이 있다. 이름으로이지 이름들로가 아니다. 한 본질이 존재한다. Calvin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이 많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어느 것이 선행하여 다른 것을 낳는지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먼저 사고(思考)의 방향을 즉시 돌이켜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명심하지 않는 한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위대한 은사들은 우리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은 거의 없으며, 사실상 우리의 존재 그 자체도 한분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John Calvin 1987, 3-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장 3항을 보면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한 삼위가 단일한 신격으로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고 했다.
예컨대 영이신 성부가 무한 영원불변하시고, 영이신 성자가 무한 영원불변하시며, 영이신 성령도 무한 영원불변하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 하여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관례적으로 신학자들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별하였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에 대한 관계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말한다. 인간의 구속의 과정에서 점진적 계시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 명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a. 영원히 불변하게 불가분하신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유일신 교리). b.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완전하고 동일하게 하나님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동질성 교리). c.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구별된 위격들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구별성 교리). 이상의 세 개념들이 성경의 삼위일체 교리를 요점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a를 부정하면 삼신론(參神論)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b를 거부하면 본질적 종속론(本質的從屬論)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며, c를 거절하면 양태론(樣態論)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obert L. Reymond 2004, 283-284).
1. 삼위일체 논쟁
Latin의 신학자였던 Novatianus(200?-258?)는 그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룬 작품에서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초대교회가 갖고 있는 최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초대 기독교 배경 속에서도, 속사도들의 글에서도, 변증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단의 사상 속에서도, 심지어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핵심 주제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 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the Trinitarian Controversy)이라고 한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여러 가지 면에서 다루었으며, 이것이 Arius(아리우스)와 Athanasius(아타나시우스) 논쟁, 325년 니케아(Nicaea)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회의의 중심 논제였다(박용규 2000, 323-324).
주후4세기의 삼위일체논쟁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진행된다.
제1기 318-325: 논쟁의 시작과 니케아 신경의 채택/Nicaea
제2기 325-361: 아리우스파의 반격과 정통파의 수난
제3기 361-381: 정통파의 재기와 삼위일체교리의 확정/Nicaea Constantinople
삼위일체논쟁은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250/260-336)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재직312-328)가 정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아리우스논쟁이라고도 한다.
가. 7대 공의회
1 | 325 | 제1차 공의회 니케아회의(제1차 니케아회의) 니케아신경(구 니케아신경) | 4대 공의회 |
2 | 381 | 제2차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회의(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 |
3 | 431 | 제3차 공의회 에베소 회의 | |
4 | 451 | 제4차 공의회 칼케톤회의(칼케톤신경) | |
5 | 553 | 제5차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 |
6 | 680-681 | 제6차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 |
7 | 787 | 제7차 공의회 제2차 니케아 회의 |
나. 고대에 있었던 중요한 교회회의
고대의 4대 교회회의는 일반교회회의(一般敎會會議) 혹은 공의회(公議會)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들 회의의 결정사항은 보편교회(普遍敎會)의 공식적인 결정사항으로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속력(抱束力)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교리(三位一體敎理)와, 그리스도에 관한 양성교리(兩性敎理)는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김광채 2003, 36).
1). 니케아 회의 (제1차 니케아 회의/325년)
삼위일체논쟁(318-381)의 초기단계에 있었던 회의로, 니케아(Nicaea)에서 열림.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가 “동일본질"(同一本質)이라고 선언. 아리우스의 학설 배격. 니케아 신경 채택.
2) 콘스틴티노플 회의(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
삼위일체논쟁을 종료시킨 회의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림. 테오도시우스 대제(재위 379-395)가 소집. 주후 360년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337 -361)가 폐기시킨「니케아 신경」을 부활시 켜, 콘스탄티 노플 신경(Constantinople 信經)을 채택. 삼위일체교리가 이 회의에서 확정됨.
3) 에베소 회의(431년)
네스토리우스논쟁(Nestorius論爭 428-433)을 해결하기 위해 동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재위 408-450)가 소집.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1?)를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다는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재직:428-431)에서 축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감독 퀴릴의 학설 수용됨.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여인”이라 선언됨.
4). 칼케돈 회의 (451년)
에우튀케스논쟁(Eutyches論爭/448-451)을 종료시킨 회의로, 칼케돈에서 열림. 동로마제국의 여제(女帝) 풀케리아(Pulcheria/재위 450-453)와 그녀의 남편인 마르키안 황제(Marcian 皇帝/재위 450-457)가 소집 칼케돈 신경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양성교리(兩性敎理) 확정.
중세 초기에 열린 교회회의지만 일반교회회의(一般敎會會議/concilium generale) 혹은 공의회(公議會)로서의 성격을 갖는 세 회의에 대해 추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세 회의는 위의 4대 교회회의와 함께 7대 교회회의가 된다. 7대 교회회의는 모두 헬라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로마제국 동부 내지는 동로마제국(396년 이후)에서 개최되었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553년)
단성론논쟁(單性論論爭)을 종료시킨 회의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림.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안(재위527-565)이 소집.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교리(兩性敎理)를 부인했는데, 이들이 정죄를 받음. 양성교리 재확인.
6)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681년)
일의론논쟁(-意論論爭)을 종료시킨 회의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림. 비잔틴제국(Byzantine帝國) 황제 콘스탄틴 4세(재위 668-685)가 소집. 일의론자(-意論者)들은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신적(神的)인 의지(意志) 하나만 가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정죄를 받음. 이의론(二意論) 승리. 이로써 기독론논쟁(基督論論爭) 종료됨.
7) 제2차 니케아 회의 (주후 787년)
성상논쟁(聖像論爭)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로, 니케아에서 열림. 비잔틴제국 황제 콘스탄틴 6세(재위780-797)의 모후 에이레네가 소집. 삼위일체의 하나님만 참된 예배의 대상이고, 성상(聖像)은 예배의 대상은 아니지만, 원형(原型)이신 하나님의 모형이므로,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성상숭배(聖像뿔拜) 공인. 성상논쟁은 이후에도 843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희랍정교(希願政敎)와 로마가톨릭에서는 성상숭배가 유행하게 됨.
2.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었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약 107년경에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나신분이면서도 나시지 않은,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죽음 안에서의 참 생명이신, 마리아와 하나님 모두에게서 나신, 감동적(感動的)이면서 다감하신 한 육체(사람), 곧 우리 주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에 대한 고백이다.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은 먼저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당시 일부 사람들이 그는 150년전 키레니우스(Cyrenius)시대에 자연 출생하여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가르쳤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저스틴에게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 되시는 분”이라고 했다. 로고스는 하나님 다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즉 지혜와 권능과 영과 능력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의 삼위일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과 비슷했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견해였다. 저스틴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이 홀로 계셨고 아들은 없었으나 그 안에 이성 혹은 로고스(Logos)가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다른 신적 존재(divine being)를 낳았는데, 이것을 로고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이 로고스는 나신 존재이기 때문에 아들이다. 그는 이성 또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로고스이다. 저스틴과 다른 변증가들에게 이 아들은 신적 존재지만 피조물이다. 그러나 세계를 창조하기에 충분한 피조물이다. 이 로고스는 인간을 만드셨으며 인간의 고난에 참여하셨고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 때문에 인간 안에 거하시는 로고스이신 이성의 씨(the implanted seed of reason)를 통하여 희미하게나마 진리를 볼 수 있다. 저스틴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사물의 씨는 하나이지만 은혜에 따라 주어지는 씨의 공유정도에 따라 사물은 매우 다양하다고 말했다. 이런 저스틴의 로고스 해석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평을 받았다.
안디옥의 변증가 데오필루스는 삼위일체(trinity: trias)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저스틴, 타티안, 아테나고라스처럼 삼위의 제2위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변증가들에 의하여 약간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 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한 하나님 창조주가 계시는 데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시는 분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곧 그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해 계시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영원히 존재하신 아들은 옛적부터 아버지를 천사들과, 천사장, 권세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로 뜻하신 모든 자들에게 항상 계시하셨다. 이레니우스는 창조주가 성자(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시며 영원하심)이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아들은 “곧 사람이며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믿었다. 변증가들이 아들을 제2의 하나님으로 가르친 반면, 이레니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고 가르쳤다. 인류에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기독론은 속사도들이나 변증가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상당히 진보된 모습이었다. 삼위일체를 지원할 수 있는 제 2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는 결코 시작이 없으신 분이다.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존재하셨기 때문에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다는 후대에 전개된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일축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속량설을 주창한 이레니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고유한 대속의 사역을 수행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로고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은 하나님께 값 주고 사신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를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는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자가 어떻게 성부에게서 나셨는가는 이레니우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신비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성자가 성부로 말미암아 나셨는가를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성자의 나심과 출생과 소명과 계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실제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의 출생에 대하여 그 누가 그 무엇이라고 하든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공존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성자의 신성을 확증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숙제를 터툴리안이 좀 더 분명하게 정립하였다.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의 한 본성(one substance).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그의 가르침이 325년 니케아 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하나의 신적 본질(one divine nature)이 있다고 가르쳤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 신적 본질을 공유한다. 인격에 관한 한 성부와 성자는 분리되고 구분된다. 따라서 한 신적 본성에 두 신적 위격(two divine persons)이 존재한다.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역할을 하신다. 영원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그가 아들을 낳으셨기 때문이다. 후에 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터툴리안의 한 본성 두 위격 사상과 오리 겐의 아들의 영원한 나심(the eternal genera tion of the Son) 사상을 연합하였다. 비록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성자가 성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성자의 신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성부와 성자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한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 하나님이 존재하는 다신론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때문에 노바티안은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런 문제는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이었다. 성부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약화시키려는 잘못된 사상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 모든 신학자들은 한 면이나 또 다른 면에서 성자가 성부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주후 250년 경 로마의 디오니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사이의 논쟁은 서방과 동방교회의 접근 방법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그 논리가 강했지만 삼위의 영구한 구별에 대해서는 약하였다. 동방교회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3. 단일신론
우리는 삼위일체 논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관련된 오류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단일신론(Monarchianism)
단일신론(Monarchianism)
|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or Adoptionism | Patripassianism 성부고난설 Sabellianism 사벨리안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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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대표적인 오류는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다. 단일신론은 다시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나뉜다. 양태론적 단일 신론은 다시 성부고난설과 사벨리우스주의로 나뉜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에 속한 초기 지도자들은 서머나의 노에투스(Noetus of Smyrna;210)와 프락시아스(Marimus Praxeas of Rome; 195)이다.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동일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서만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쓰는 비유가 태양과 열과 광선이다. 성부가 태양이시고 성자는 광선이시며 성령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이라고 본다. 이들은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따라서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성부자신이 고난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양태론적 단일 신론자들은 성부 고난설주의자(Pa tripassianist) 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사벨리안주의이다. 이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사벨리안주의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소아시아에서 발생하여 로마로 발전했던 사벨리안주의는 초대교회 기독론에 위협적인 이단중의 하나였다. 사벨리안주의는 약 215년경 로마에서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에게서 기원되었다. 디오니시우스는 그 무렵 새로이 일어나 확대되고 있었던 사벨리우스의 이단에 관해 ‘지금 펜타폴리스의 톨레마이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견해는 불경한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으로 가득 차 있고, 또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피조물의 첫 열매이시며 성육신하신 말씀에 관해 불신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또 성령도 불신하고 있다.’고 했다.
양태론과 같이 사벨리안주의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보호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상당히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 세 가지 방법 또는 양식(modes)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성부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의 과업을 맡으셨을 때는 성부하나님이 친히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아들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했다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벨리우스는 성부가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사벨리안주의는 성부 하나님이 친히 성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일체를 강조한 나머지 삼위의 구별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평가 절하시키고 말았다. 사벨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 의해 260년에 추방되었다.
반면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려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켰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신성이 충만한 인간일 뿐이었다. 역동적 단일신론의 대표적 일파인 에비온파(Ebionites)는 예수가 세례시부터 신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믿었다. 260년경 안디옥 감독이었던 사모사타 바울(Paul of Samosata)도 역동적 단일신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역동적 단일신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박해를 피해 비잔티움을 떠나 195년경 로마로 온 데오도투스(Theodotus)이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세례 시에 신(神)으로서 양자로 입양(adoption)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동적 단일신론을 양자설(adoption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의 특징은 세례 전과 세례 후의 예수를 구분한다. 예수가 기적적으로 동
정녀 마리아에게서 났으며 선하고 의로운 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그에게 권능으로 임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례전의 인간 예수와 세례 시에 강림한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그러나 예수가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데오도투스는 로마의 감독 빅토에 의하여 파문을 당하였다.
데오도투스 사상은 데메트리아누스(Demetrianus)를 이어 안디옥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에게 계승되었다. 하나님의 로고스 또는 이성이 인간 예수에 강림하여 그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이 로고스는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 안에도 있었다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으시고 그에게 일종의 신성을 주셨다. 예수 안에 로고스가 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로고스는 예수 안에서 하나의 위격을 이룬 인격적 로고스는 아니다. 이런 견해는 로고스를 위격(persona)으로 보는 터툴리안이나 로고스를 성부와 동질로 보는 오리겐의 견해를 동시에 거부한다. 그 결과 유세비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해 교회의 교리와 어긋나는 저급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은 본질상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더구나 “이 사모사타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단을 덮고 감추려했으며, 반면에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 이단의 탈을 벗기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대해 뱉은 모욕의 말들을 폭로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261년 사벨리우스의 교훈이 정죄됨에 따라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세 번에 걸친 안디옥회의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토론되었고 286년에 소집된 세 번째 안디옥 회의에서는 바울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런 역동적 단일신론 또는 양자론은 아리우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단일신론은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합리주의(Neology), 유니테리안니즘(Uniterianism),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을 통하여 지금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대 아리우스(Arius) 논쟁
삼위일체 논쟁은 서방 못지않게 동방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에서 발단(發端)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디오클레티안 박해 하에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베드로를 승계하여 아킬라스(Achillas)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고, 다시 아킬라스를 이어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그가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하면서 야심적이고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감독은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했다. 아리우스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며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아들의 존재는 성부와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장로라고 언급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12교구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를 담당한 수석 사제였다. 아리우스의 스승 루시안은 260년부터 272년까지 안디옥 감독을 지낸 사모사타의 바울의 학생이었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아리우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는 성부가 유일무이한 신성을 가지고 있고 성자는 성부에게 영원히 종속한다는 오리겐의 이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영원한 종속은 시간적 미래만을 향해 뻗어 있는 순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아리우스는 보았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과거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없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오리겐이 주장한 바라고 말하지만, 성부와 성자가 기원상 차등이 있다는 아리우스 사상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영원 전부터 나셨다는 오리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물론 오리겐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자가 어떤 점에서는 두 신격 중 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시인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리우스가 볼 때 오리겐은 성부와 성자 간의 명칭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본질의 차이를 함축한다고 보았다. 성부는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들은 다른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성부와 성자를 기원상 차등을 두어 이해하지 않았다. 오리겐의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차이를 극대화한 아리우스는 성자가 사실상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고 믿었다. 하나의 존재로서, 아들은 천사들보다 높지만 성부 하나님보다는 낮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나아가 아리우스는 아들이 인간이 되어 고난과 죽음 등의 인간적 슬픔을 맛보기 위해서는 하나님보다 열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무감각한 존재라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사고를 따라 아리우스도 고난 받으신 구주가 하나님일 수 없다고 추정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생존 사이에는 공통적 부분 혹은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피조물이라야만 인간과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리우스의 사상은 321년에 그가 니코메디아 감독에게 보낸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서신에 잘 나타난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주 신실하고 정통적인 하나님의 사람 유세비우스에게, 당신이 수호하고 전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그 진리로 인하여 감독 알렉산더에게 부당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아리우스는 주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 우리가 말하고 가르쳐왔고 현재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들은 비출생자가 아니요. 어떤 경우에도 비출생자의 일부도 아니요, 그렇다고 비출생자의 어떤 본체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요,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counsel)에 의해 시간 이전에 그리고 모든 세대(times and ages) 이전에 완전한 하나님, 독생자(only-begotten), 불변적인 존재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출생하시기 이전 혹은 창조되시기 전, 혹은 작정되거나 세움을 받기 전에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출생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박해를 받는 것은 “아들은 시작을 가지시고 하나님은 시작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같이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부분도 아니요 또는 어떤 그런 본체로부터 이루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에 관해서는 당신이 다 알고 계십니다.….
서방의 양자론자들과 같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시작이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아들(또는 로고스)은 시작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로고스를 창조하셨다. 이 로고스는 만물 중에 첫째며 가장 높은 자이기 때문에 로고스는 하나님이지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지, 로고스는 실상 피조물에 불과하다. 스스로 물질계를 창조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로고스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로고스는 창조주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면에서 아리우스의 사상은 헬라의 중기 플라톤주의를 반영한다. 결국 이 로고스는 무에서(ex nihilo)창조된 첫 피조물(first born of creature)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성부와 같은 동질 homoousios)이 아니고 유사 본질 (homoiousios)이라는 것이다. 이런 아리우스의 입장은 320년에서 323년경에 이집트 종교회의 때 알렉산더에게 제출된 아리안 고백서에도 나타난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은 서방의 데오도투스(Theodotus)나 동방교회의 사모사타 바울의 기독론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모사타 바울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완전한 인성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리우스가 가르친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님도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다. 로고스가 성부와 동질이 아니기 때문에 종속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성부의 본질과 다른 무에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다. 또한 이 로고스가 지상의 예수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대신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로고스를 지니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혼 없는 이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도 완전한 사람도 아니다. 더구나 로고스가 성부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 있으며 죄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고백하는 사람들로부터 일련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 감독은 로고스를 피조물로 만들
어 버리는 아리우스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리우스주의
아리안 주의 | Anominiism(급진적 아리안주의)
아리안주의 1. 아들은 피조물이다. 2. 아들은 시작이 있다(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3. 아들은 아버지와 교통이 없고 아버지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4. 아들은 변할 수 있고, 죄를 지울 수 있다.
半(semi)아리안주의-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하다. |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아리우스에 대한 알렉산더감독의 반박 내용은
저들은 성경과는 전혀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시며, 아버지가 아닌 때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부터 계신 것이 아니었고, 무로부터 만들어지셨다. 즉 항상 실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실재하지 않으셨던 그를 무로부터 만드셨다. 그러므로 저들에 의하면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고, 아들은 한 피조물이요 한 작품이었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지 않으셨고, 그 천성이 아버지의 참 말씀도 아니시고 그의 참 지혜도 아니요, 다만 그의 손으로 만든 것들 중의 하나요, 피조물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를 말씀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지혜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물을 만드셨고 아들도 또한 만드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다른 이성적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가변적 성질을 가지며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며 아무 상관이 없으며 배제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신다. 대개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히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그를 완전히 보지도 못한다. 아들은 자기 자신의 본질도 알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고 그를 통해 우리가 창조되기 위해 마치 한 도구로 말미암음 같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아들도 실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저들에게 묻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변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을 때 저들은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출생한 자요 만들어진 자로서 그의 성질은 변화를 받을 수 있다고 저들은 말한다.
아리우스 논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출현했다.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했으며, 그것을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니케아 정통신앙의 동의어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오리겐을 오해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전투적으로 공박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이 영원한 존재임을 항상 역설하였었다. 아타나시우스가 볼 때 오리겐의 영원성은 곧 성부와의 동등성을 의미하였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oJmoousios/호무우시오스)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회의 신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용어의 엄밀한 의미는 니케아 회의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더욱 열띤 논란거리였다.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같은 半아리우스(semi-Arian) 동조자들이 니케아회의의 ‘동질’이라는 표현은 아들이 아버지와 유사한 본질(oJmoiousios/호모이우시오스)을 가졌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면서, 아들은 수적으로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의 각 신격이 하나님의 단일성 (oneness)을 공유하며 세 신격이 본질상 별개의 존재로 간주될 수 없다고 응수하였다. 그리고 3위격의 차이점은 그들의 이름에 나타나며 이 이름들은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321년 알렉산드리아에 회의를 소집하고 아리우스 및 그의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아리우스가 하나님이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사상을 주저함 없이 수용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는 전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수리아에서는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졌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서 있으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알렉산더 역시 동료 감독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입장이 정당함을 알려주었다.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와의 논쟁 때문에 동방에서는 제국의 통일성이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황제는 문제가 확대되기 전에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 고문 코르도바의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감독을 시켜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견 조정을 시도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Donatus 논쟁과 같은 쓴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5. 니케아 회의와 신조
호시우스의 이견 조정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문제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5월 니케아에 회의를 소집하였다.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은 하나였지만, 신학적으로는 동방과 서방 두개로 나누인 종교적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콘스탄틴 대제는 자체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하나로 통일시키기로 했다. 따라서 회의를 소집하는 그의 목적은 정통주의 견해(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정립하려는데 있지 않고 그의 관심은 연합된 제국을 만드는 데 있었다. 회의가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325년 5월20일부터 7월25일까지 열렸는데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대부분이 동방교회의 감독들이었고 단지 소수만이 서방 교회에서 왔다. 로마의 감독은 두 명의 대표를 파견했다. 서방에서는 로마의 주교 실베스터(Sylvester)를 포함하여 6명만 참석했다. 감독들보다 신분이 낮은 수백 명의 성직자들 및 평신도들이 참석했다. 콘스탄틴의 연설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회의가 개막되어 논쟁자들에게 그들의 견해들을 제시하라고 허락하자 곧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최초의 발언자는 안디옥 감독 유스타티우스였다.
니케아 회의는 의견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주도하고 있었다. 첫째가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교회사가(敎會史家)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내심으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정하면서도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대표자들로 反아리우스 입장이었다. 알렉산더 감독은 젊고 유능한 아타나시우스를 비서로 동반했다. 300년이 좀 지난 얼마 후 상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에게 발탁되어 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그가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니케아 정통신앙을 변호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다.
니케아회의에서 처음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의 황실감독 호시우스(Hosius)의 개입으로 니케아 신조에 동일본질(oJmoousios/호무우시오스)이 삽입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교회사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섭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고백을 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우리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 하나님을 믿사오며, 하나님의 아들,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즉 성부의 본질(ousis)로부터 나신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요, 나셨으나 지음 받지 않았고 성부와 동질(oJmoousios
호무우시오스)이시며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는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사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셨으며,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리고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거나 ‘태어나기 전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그는 무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다른 본체(hypostasis) 나 본질(ousia)로부터 나신 것이라거나 혹은 ‘피조되었다거나 혹은 ‘변경’과 변화’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이를 정죄한다.
사실 본질과 실체(위격) 사이의 상호관계 문제가 쟁점이었다(김광채 2003, 247).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하였던 신앙고백은 내용을 기준으로 볼 때 다음과 같다.
a. 기독론적 신앙고백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b. 이부신앙고백 → 성부 하나님과 성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c. 삼부신앙고백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동질”oJmoouvsios/호무우시오스)이란 성자가 성부보다 그 신성에 있어서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이다. 니케아 회의의 중요 관심사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본질(oJmo/호모는 same(동일한)을, ouvsia/우시아는 nature(본질), substance 또는 being을 의미한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신조는 결국 오랜 논쟁의 장본인인 아리우스의 사상, a. 나시기 前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b. 그는 무에서 피조되었다. c. 성자는 성부와 다른 본질이다는 것을 모두 거부했다. 이로 인해서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시들지 않았다. 아리우스 세력은 황실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우스 세력을 지지한 대표적인 황실 실력자는 아리우스주의자였던 Constantinople의 유독시우스(Eudoxius)였다. 니케아 회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품은 유독시우스로 인하여 니케아 회의 이후 수많은 지역이 니케아 신앙을 떠나 아리우스주의로 기울고 말았다.
6.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신조가 니케아 회의의 대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니케아 회의 이후 서방교회와 아타나시우스를 따르는 자들만이 니케아 신조의 동질(homoousios)에 만족했기 때문에 니케아신조가 교회의 교리로 정착하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 본격적인 아타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은 니케아 회의 이후에 진행되었다. 논쟁의 3단계는
제1기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인 337년 5월 22일까지.
제2기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까지.
제3기 줄리안의 즉위로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의 통치하에 아리우스주의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였던 Constantine 대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니케아 신조는 정상적인 신앙의 규범으로 만인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아리우스 추종자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 당시 상실된 세력을 곧 회복할 수 있었다. 아리우스주의의 지도자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 덕분이었다. Constantine은 니케아회의가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호시우스를 자신의 교회고문 자리에서 해임시키고 대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임명했다. 열렬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니코메니아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회의가 끝난 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성급하게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켜 Constantine 대제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화가 난 Constantine은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를 유배시켰다. 그러나 Constantine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유배에서 돌아와 니케아 신조에서 동질(homoousios)교리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연합하면서 아리우스 반대세력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을 위해 Constantine 대제의 후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오리겐 신학을 격렬히 비판했던 안디옥 감독 유스타스(Eustace)였다. 유스타스는 Constantine의 모친 헬레나가 326년 순례 길에 성지를 방문했을 때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썼는데, 이것이 유스타스의 혐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빌미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Constantine은 유스타스를 유배시켰다. 유스타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의 천적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감독직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아타나시우스는 Constantine 대제로부터 이제는 아리우스가 니케아 신조에 서명도하고 자성하고 있는 듯 하니 다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주라는 명령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를 찾아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설득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무위로 끝나자 이내 섭섭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분파주의적인 멜리티우스주의자들이 교회 내에 말썽을 일으키자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강경하게 다루었다. 강경책에 반발한 그들은 불평을 하면서 이집트에 있는 콥트 교도들이 아타나시우스를 고발하자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유세비우스 일당은 335년 8월 두로 대회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감독직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혐의를 들어 감독직을 박탈하고 파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정통주의 신학자가 교회의 정치에 휘말려 부당하게 회생된 첫 케이스였다. 유세비우스는 Constantine 대제를 선동해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혐의를 씌워 335년 안디옥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축출하고 고울의 트리에르로 유배시켰다. 유세비우스는 여세를 몰아 자기와 신학적 입장이 다른 앙크라의 감독 마르셀루스도 제거시키려 했다. 아타나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모욕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파문시키고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성공했다. 336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파문당한 마르셀루스 역시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 즈음에 두 명의 인물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아리우스 논쟁의 장본인 아리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Constantine 대제가 337년 오순절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틴 대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리우스 대 아타나시우스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1세가 즉위한 동안(337-361)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맞았다. 세 아들과 조카가 전국을 4등분하여 다스릴 것을 제안했던 Constantine 황제의 소원과는 달리 군부의 요청에 따라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친척들이 살해되고 그의 세 아들이 제국을 물려받았다. 콘스탄틴 2세가 영국, 고울 그리고 스페인 등 서부지방을, 콘스탄티우스 1세는 마게도니아, 그리스, 트레이스(Thrace), 소아시아,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일리리아(lllyricum)등 동부지방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가장 어린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차지했다.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다. 340년 콘스탄틴 2세가 콘스탄스 군대와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제국은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타나시우스, 마르셀루스와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구축에 나섰다.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것이고,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정죄를 지지했던 이들은 헬라 측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337-352)는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를 유배지에서 후원했다.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 양측의 논쟁은 열기를 더해갔고 공방전이 끊이지 않았다. 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341년에서 342년 겨울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죽었다. 340년 서방의 전권을 장악한 콘스탄스는 동방의 콘스탄티우스황제에게 그곳의 헬라 측 감독들을 자제시켜주도록 압력을 넣었다. 얼마 후 헬라 측 감독들과 로마 측 감독들의 대결이 정치적으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는 342-343년 동서방을 다 포함하는 대규모 종교회의를 현재의 불가리아의 소피아인 세르디카에서 개최했다. 동서방 양측은 회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불꽃 튀는 공방전을 계속하다 황제의 강한 압력에 못 이겨 양측 모두 고통과 희생을 분담하는 모종의 화해 안을 받아들였다. 동방 측에서는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키고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346년 열광적인 지지 속에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아타나시우스는 복직했다. 그러나 350년 콘스탄스가 고울 지방에서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해 전권이 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1세는 마그넨티우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전투가 계속되었고 콘스탄티우스가 무르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면서 사태는 또 다시 급변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유배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콘스탄티우스 1세는 아르레스(Ar1es 353)와 밀란(355)에서 일련의 종교회의를 열어 뚜렷한 명분 없이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하고 서방 강국들이 아타나시우스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1세는 칼라리스의 루시퍼, 베르셀라이의 유세비우스, 밀란의 디오니시우스, 로마의 감독 리베리우스와 같이 자신의 계획을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콘스탄티우스와 서방교회는 356년 2월에 군대를 알렉산드리아로 파송하여 강압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감독직에서 몰아내고 그 후임에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조오지를 임명했다. 357년에는 안디옥도 극단적인 아리우스 지지자인 유독시우스(Eudoxius)가 감독직에 오르는 등 중요한 교구들이 아리우스 주의자들의 수중에 넘어 갔다. 357년부터 360년에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357년 일리리아의 시르미움(Sirmium)에서 개최된 회의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본질(ousia)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으로 니케아에서 결정한 동질(homoousios)은 사장된 신앙고백이 되는 듯했다. 외관상 아리우스주의의 완전한 승리처럼 보였다. homoousios(동일본질)대신 homoiousios(유사본질)를 주장하여 성부와 성자의 실질적 관계를 거부한 “콘스탄티우스는 누구든지 아리우스주의를 따르지 않는 신자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아타나시우스와 다른 니케아 신조 추종자들은 왜 아리우스주의가 잘못되었고 왜 정통주의가 옳은가를 진지하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공통된 관심사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바실 및 그의 친구들과 동맹했다. 그 즈음에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아리우스 논쟁은 또 다시 새로운 차원이 되었다. 줄리안이 즉위하고 데오도시우스 1세가 즉위하기까지 아리우스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아타나시우스 및 니케아 신조에 호의적이었던 줄리안이 콘스탄티우스를 계승하여 361년에 즉위하면서 아리우스주의는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데오도시우스 황제 하에 끝내 배척을 당했다. 줄리안은 콘스탄틴 대제가 사망하고 발생한 권력투쟁의 여파로 콘스탄틴의 친아들 외에 거의 대부분이 살해될 때 살아남은 두 명의 친척 중에 하나였다. 줄리안의 아버지도 이때 살해되었으며, 줄리안은 당시 단지 6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양육을 받고 동방 교회식을 따라 엄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내심으로 기독교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줄리안은 황제가 된 후 기독교내의 서로 다른 집단들이 자기들 간에 싸움으로 인해 모두 자멸하기 원했다. 그는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니케아를 지지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중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3차 유배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소환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소환되자 다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얼마동안 논쟁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니케아 신조 옹호자들 가운데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대두되었다. 그중에 하나는 성부와 성자의 동질을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동질은 부정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57년에서 358년에 천사주의자들에 보내는 편지들“(Letters to Serapion)을 통해 그런 주장은 잘못된 이설이라고 강력히 논박했다. 또한 성부와 성자의 구분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의 차이를 세 본체(hypostasis)로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이론은 마치 사벨리안주의의 再版인 것처럼 보였다. 자연히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본체냐 세 본체냐 하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중에서도 의견이 달랐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런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362년에 알렉산드리아에 소회의를 회집하였다.
이런 일련의 논쟁의 와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타나시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15년 동안 정통신학의 대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가 쓰는 용어와 그가 말하는 사상이 상당한 권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 세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던 유명한 이들이 그에게 와서 자문을 구했으며 비록 그가 쓰는 용어는 구세대에 속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답변을 결정적 권위라고 생각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철학을 자료로 삼는 대신 성경을 유일한 원천으로 삼았다. 367년 부활절 서신에서 신약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것임을 확인한 인물도 아타나시우스였다. 정경형성에 대한 업적 못지않게 아타나시우스의 지대한 공헌은 역시 아리우스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쏟은 정열과 그 작업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시고 로고스요, 지혜요 아들이시오, 하나님의 능력이시므로 성경에는 한 하나님이 선포된 것이다. 로고스는 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결국 그가 나온 그에게 귀착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시나 그 신성의 단일성은 분열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성의 원천은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두 원천을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정확히 말하여 단일신이 계신다라고 할 수 있고 본질(ousia)과 위격(hypostatsis)이 모두 하나이다. ‘사람들의 출생의 경우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시었다고 하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 경우에는 인간들의 경우와는 달리 비물체적인 분으로부터 어떤 유출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또는 그에게 어떤 것이 유입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단순하시며, 그는 하나이시요 유일하신 아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이 아들은 아버지의 로고스로서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기원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으며 분열도 없다. 더 나아가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구원관과 관련시켰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아리우스의 로고스 피조사상은 피조물을 경배의 대상으로 하는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사상이 정통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들(Cappadocians)이다.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330-379)-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335-394)-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330-390)등이다. 바실은 364년 그의 출생지인 소아시아의 가이사랴에서 사제로 안수 받았으며 370년에는 갑바도기아의 대주교의 교좌인 가이사랴 감독이 되었다. 바실은 소아시아의 정통 감독들 가운데 지도자로 부상하여 발렌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뛰어난 행정적 수완을 동원하여 “교회의 갈기갈기 찢어진 외투”를 성공적으로 수선하기 시작하였다. 맥도날드(H. Dermot McDonald)가 지적한 것처럼 “공적 연설과 교회의 정치적 수완과 신학적 통찰력에 있어서 그의 많은 은사들이 발휘되었고 사회적 관심과 수도사적 삶의 방식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이었던 바실은 삼위일체를 논하는데 사용되는 용어들을 정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위한 길을 닦았다. 그는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 본질(substance, ousia)과 삼위(three persons, hypostasis)를 확정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373년에 아타나시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은 동방에서 정통신앙의 수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발렌스가 죽은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청빙 받아 그곳에서 2년 동안 니케아 정통신앙에 근거한 설교를 통해 정통신앙을 확산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케아 신앙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발렌스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니사의 그레고리는 발렌스가 죽고 그라티안이 황제가 된 후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니사로 돌아왔다. 니사는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신학적인 영향을 미쳤고, 데오도시우스에 의해 니사의 교좌로, 정통신앙의 표준교좌로 인정을 받았다.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 사용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곧 “한 본체 안에 세 위격”이라는 용어이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라틴어 본질(substantia)과 동등한 의미의 헬라어로서 우시아(ousia)를 신학적인 용어로 정착시켰고, 삼위(three persona)에 해당하는 가장 가까운 헬라어는 세 얼굴(three prosopa)이었지만, 이 용어는 사벨리우스파에게 인기 있는 단어였기 때문에 더 강한 의미의 용어인 “세 위격”(three hypostasis)을 사용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우시아와 위격을 나타내는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차이가 없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인들은 이 둘 사이를 구분하여, 우시아는 일반 개념으로 신성본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히포스타시스는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한 우시아(ousia)의 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로서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그 결과 그들은 삼위일체론의 각 위격의 사역을 구분하였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나시지 않은(not generated) 신성의 근원(source)이며,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나신, 사역을 수행하시는 자이며, 성령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사역을 완성시키는 자이다. 이들의 삼위일체가 성서적 근거에서 출발한 것임을 발견한다. 삼위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 하나님으로 하나(일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령의 경우도 동질을 주장하였으며 아폴리나리우스에 반대하여 성자의 완전한 인격을 주장하였다.
7. 콘스탄티노플회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은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즉위할 때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황제에 오른 다음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래 동로마에선 최초의 열렬한 서방신학 지지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죄를 받은 셈이며, 이것은 곧 아리우스파의 종말이었다. 이처럼 니케아 정통신앙이 승리하기까지는 황제의 공헌이 지대했지만, 일련의 역사적 환경이 맞아 떨어진 것도 있다. 정통의 주자 아타나시우스가 373년 세상을 떠난 후 바실이 새로운 정통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그레고리는 니사의 감독이 되었으며, 380년경에는 나지안주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反아리우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니케아 정통신앙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회복되었다. 더구나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그곳에 들어오자 나지안주스는 열렬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콘스탄티노플 주교 데오필루스에게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콘스탄티노플을 떠날 것인지 양자택일 할 것을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한 데오필루스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황제는 2년 동안 충실하게 니케아 정통신앙을 뿌리내리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나지안주스를 콘스탄틴노플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다음 해인 381년에 황제는 니케아 신앙을 확인하고 만약 그 신앙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단으로 규정하고 벌을 가한다는 법령을 발표하여 로마-알렉산드리아 정통을 동방에도 수립하였다. 이 법령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아리우스 감독들은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황제는 이어서 법령을 제정하던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앙을 확인하고 아리우스주의 문제를 종결지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나이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 모든 세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나셨으나 지음 받은 것이 아니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라. 이를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고난 받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사오니. 이는 주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니.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며. 곧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경배 받으시며, 함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오신 분이시니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나이다. 우리는 죄의 사유를 위한 한 세례를 고백하나이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내세의 영생을 믿나이다. 아멘.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독립된 별개의 신조가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재확인이었다. 이 신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구별을 명시하여 위격을 무시하고 각 위의 개체성을 제거해버린 사벨리우스의 단일신론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의 본성을 구분하여 성부와 성자가 다른 본성을 가진다는 유노미니안주의자들(Eunominians),. 아리우스주의자들(Arians), 성령 훼방자(Pneumatomachi)들과 같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배격한다. 성자와 성부가 동질이라는 호모우시우스가 구체적으로 한 신성과 능력과 본체를 의미한다는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결정은 콘스탄티노플 신앙을 밝히는 콘스탄티노플의 공한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의 니케아 신앙의 확인으로 325년부터 381년 동안 무려 50년이 넘게 끌어온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현대적인 의미로 총체적으로 정립. 발전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8.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란 실로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이신 삼위(三位)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교리는 겉으로 보기에 자기 모순적인 교리처럼 보인다. 이 교리는 성경에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신앙인들이 성경의 증거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때 이르게 되는 결론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사역하시며,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큰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포함되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론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깊은 영향을 준다. 또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입장은 실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그 대답을 준다.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해야 하는가? 성부 하나님께만? 성자, 성령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각 위(位)의 사역은 다른 위격들의 사역과 분리되어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성부의 사역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다소 낮은 신분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등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Millard J. Erickson 2001, 159).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람으로 되었다는 명제가 성립되었다(John Murray 2001, 143).
삼위일체는 4세기가 되어서야 기독교 신학에서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각각 뚜렷한 별개의 인격이라는 세 가지 사실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기초를 이룬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가 이교도의 환경 속에서 그 위치를 지켜야만 했으므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제공될 수 없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유일신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성령님이 창조(창 1:2,3)나 이스라엘과 상대하는 일(사63:8-10) 등 ‘공동 원인자’로 함께 나타난다. 성령님은 메시아의 사역(사61:1)과 그의 백성들의 그에 대한 영접(욜2:28)을 준비시키신다.
삼위일체란 의미는 한 신적 본질 속에 3개의 영원한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구별은 세 인격인데 삼위격(三位格)이라 언급한다(Henry C. Thiessen 1975, 209).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차별이 없다. 성부도 나(I)라고 말씀하고, 자도 나(I)라고 말씀하며, 성령도 나(I)라고 말씀한다. 성부는 성자에게 당신(Thou)이라고 말씀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당신(Thou)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똑같이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그(He, Him)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며, 성령은 성자에 관해 증거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자에 대해 주체이자 객체이다. 그분들은 행위하고 동시에 행위를 받는 곧 행위의 대상들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된 인격(person:위격)들이라고 말해질 때, 이 사실들에 대해 덧붙여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격은 나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으로 말해질 수 있고, 또 행위 할 수 있고 행위의 객체가 될 수 있는 지성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는 하나만이 존재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신적존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된 인격들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따르면 성부가 제일위격, 성자는 제이위격, 성령은 제삼위격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속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속해 있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작용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 작용하신다(Charles Hodge 2002, 547-548).
하나님에 대해서 실체에 관한 말은 각 위격에 대해서 따로 따로 하는 말이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함께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한 본질과, 헬라어로 세 hypostaseis(휘포스타시스), 라틴어로 세 위격(personae)이 있다(Augustinus 2004, 178).
9. 삼위일체의 세 가지 논점
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에 대한 공의회가 묘사한 것은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세 가지 논점을 제기했다. a. 삼위일체에 있어서 “위격”(person)의 의미, b. 하나의 신적 본질과 세 위격들 간의 관계, c. 니케아 교부들이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던 교리적 도구, 즉 성부께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셨다(generation)는 표현의 타당성 등이다.
가. “위격”의 의미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설명에서 위격(person)이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했는데, ‘~을 통하여’라는 페르(per)와 “말하다”는 소나(sona)가 합쳐진 말이다. 당시 로마의 배우가 연극을 할 때 쓰고서 말하는 ‘가면’과 그 배우가 묘사하는 구체적인 “인물’을 뜻했다. 그 단어 자체가(per se) 니케아 신조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를 교리적으로 터툴리안(Tertullian) 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단어는 한 하나님 안에 계시는 세 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각각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세 분을 하나의 신적인 본질과 구분하기 위해서 교회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문맥에서 위격을 하나의 “의식하는 자아’ 다시 말해서 하나의 ‘자기의식의 중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persona’라는 단어가 4-5세기에 의미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맡으셨던 역할들만을 언급했다. 위격이 개체성의 자의식적(self-conscious) 중심으로 정의되었던 것은 데카르트와 로크 이후이다. 그 단어의 근대적 변형(divergence)으로 인해 최초의 근본적인 뜻과 분리됨으로 인하여 위격이라는 단어는 신학적 용어로서의 유용성을 상실했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John Calvin이나 John Murray 등의 신학자들이 또 다른 용어가 나타나서 교회를 보다 잘 섬기기 전까지는, 교회가 계속해서 ‘위격’이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 안에 참되고 구별된 자의식적 자아들(real and distinct self-conscious Egos)로 존재하는 성부, 성자, 성령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삼위와 일체의 관계
하나님 안의 세 위격들과 하나의 신적 본질과의 관계는 단일성(“하나”)이라는 본성과 다양성(여럿)이라는 본성에 대하여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하여 숙고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Gordon H. Glark)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들과 하나의 신적 본질과의 관계를 만약 (구별되는 ‘개인적인 특성들’에 의해 위격들로 구분되는) 세 위격들이 신성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 완전하게 동일하다면, 그분들은 실제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이시다. 세 위격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신적본질은 위격들의 구별될 수 있는 특성들만큼이나 실재하는 것이다. 동일한 편재성(遍在性)을 갖고 있는 세 위격들은 하나의 편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전지성(全知性)을 갖고 있는 세 위격들은 하나의 전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전능성(全能性)을 갖고 있는 세 위격들은 하나의 전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원한 목적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세 위격들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적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세 위격들은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각 위격들이 개별적인 위격임에도 불구하고, 신적본질에 있어서의 동일한 실재이기 때문에(니케아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모우시아이기 때문에) 세 위격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성부 하나님은 영원히 ‘성자의 아버지”이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의 아들”이시고, 성령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삼위일체의 단일성(신적 본질에 속하는 단일성)과 그들의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존재”(being), “본성”(nature)의 동일성을 인식해야 한다. 각 위격들이 하나의 신적 실체, 본질, 존재,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각 위격들은 본질적으로(essentially) 전지하시다. 각 위격들은 모든 것들을 아신다(성부/요일3:20: 성자/마11:27: 성령/고전2:11). 하지만 자의식적 자아들의 구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상응하는 신적존재의 한 가운데에 참된 자의식의 주관적인(subjective) 차이점들(differentia)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위격”(또는 ‘hypostas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그 분들의 공동전지성(co-omniscience)의 실례를 가지고 계속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이는 하나님의 각 위격들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동시에 또한 각 위격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즉 주관적으로(subjectively) 그러한 것들을 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성부와 성령 모두 성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았지만”, 그분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직 성자께서만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셨다. “성부와 성자 모두 성령님께서 보호하시고 능력을 주심을 통해서 마리아가 처녀로 성자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았지만”, 그분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마리아를 보호하고 능력을 주어 그녀가 처녀로 잉태하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셨다. “성자와 성령 모두 성자 예수님의 의로운 삶이 신자들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았지만”, 그분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신자들을 의롭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직 성부께서만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안에 하나의 객관적인 전능성이 존재함으로 인해 각 위격들은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신다(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전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안에는 세 주관적인 개인적(personal) 이해력이 존재하는데 이 이해력은 하나의 개성(personality)으로 환원될 수 없다. 즉 각 위격들은 자기 위격만의 분명하게 독특한 방식으로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다. 만일에 개성(personhood)이라는 것이 참된 주관적 자기 이해, 민감성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비자아(all that is objectively nonself)에 대한 반응성에 의해 판단된다고 한다면,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우리같이 죄성을 가진 개인적 존재들보다 더 개인적이시다.
다. 성자의 영원한 나심
루이스 벌코프는 영원한 나심에 대하여 “삼위일체의 제1위이신 분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행위로 인해, 그분(제1위 즉 성부 하나님)은 신적 존재 내에서 자기 자신과 같은 제2위의 존재의 근거이시며, 제2위(즉 성자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할이나 소외(alienation), 변화도 없이 모든 신적 본질을 소유하게 하신다.”라고 했다. 니케아 교부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신” “성부의 본질(ouvsiva"(우시아스)에서 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ejk 에크)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 등의 표현의 의도한바가 무엇인가? 흔히 복음주의적 목사들이 강단에서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하면서 “왕의 왕”이나 “주의 주”의 표현에서 유추하여 그 표현을 단지 최고의 정도를 의미하기 위한 문학적 관례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표현이 그러한 의도로 만들어졌다면, 두 번째 나타나는 “하나님”은 소문자 ‘g’로 쓰인 복수 표현(신들/gods)이어야 한다.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그 표현이 이렇게 변화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인간이 만들어 놓고 경배하는 모든 헛된 신들보다 우월한 분으로 성자를 높이는 것만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케아 교부들이 그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들의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사벨리우스주의로부터 멀어지도록 함이었다. 니케아 교부들은 성부와 성자는 구별되는 속성들(ijdiovthte"(이디오테테스)을 갖고 있으며, 이는 “성부”와 “성자”가 단순히 “하나의 구별되지 않은 신적 일자”(divine Monad)가 자기 자신을 창조에 명시해놓았던 계시적 양태들(revelational modes)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부만이 유일하게 나시지 않은 분이시라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성자는 성부에 의해, 그리고 성부의 편에서의 영원히 낳으시는(generation) 행위를 통해 나신다. 하지만 성자는 ‘나신 것이지, 만들어지신 것은 아니다.’ 이 모든 말의 성자는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필수적인 본질과 존재를 성부로부터 얻으며, 그러한 일은 성부의 편에서 ‘언제나 계속하시지만 동시에 이미 완료된” 낳으시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라고 니케아 교부들이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성부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며, 성자는 자신의 본질을 성부로부터 영원히 얻으신다는 것이다. 니케아 시대와 니케아 이후 시대에. 성부께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다는 이 교리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요 논증을 통해 지지되었다.
a. “성부”(Father)와 ‘성자’(Son)라는 그 이름 자체가 성부께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셨음을 함축한다.
b. 모노게네스(monogenhv")라는 용어는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는 것을 가르친다.
c.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성부께서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분 안에 생명이 있도록 하셨다”고 선언하는 요한복음5:26절은, 성부께서 신적인 본질을 성자께 전하셨다고 가르친다.
d.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요한일서5:18은 성자께서 성부에 의해 나셨음을 명백하게 가르친다.
“a” 논증과 관련하여,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들에는 한 쪽에는 존재의 근원과 우월성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종속과 의존이 있다는 식의 서구적 개념이 담겨져서는 안 된다. 그와는 반대로 성경적인 의미에서 그 이름들은 본성의 동일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경우에 그것은 신성에 있어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요10:30-36).
“b” 논증과 관련해서 20세기 학자들은 모노게네스가 어떠한 형태의 낳으심을 암시하는 “독생하신”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뿐인”(눅7:12: 8:42: 9:38) 또는 “오직 한 종류의” “유일한”의 의미라는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Warfield는 “독생하신”이라는 형용사는 파생(派生)이나 종속(從屬)의 의미가 아니라, 유일함이나 동일함의 의미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Jesus is all that God is)라고 말한다.
“c”논증과 연관해서 요한복음5:26절 말씀이 존재론적 부여(endowment)를 나타낸다는 것은 신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서 전혀 동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 말씀은 성육신하신 성자의 메시아직 부여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이 진실로 훨씬 더 그럴듯하며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요한복음5:22-23절은 그분께서 심판의 권위를 임명받으셨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메시아적 역할의 한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5:27 역시 그것과 비슷하게 생각된다. 이에 따라서, 5:27절과 유사하게 5:26은 성자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즉 그 말씀은 그분의 메시아적 부여의 특권 중 하나를 말한 것이다.
“d” 논증과 관련해서는 요한1서5:18절이 성부께서 영원히 성자를 낳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확실치 않다. 예를 들어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은 학자들이 제안했던 5가지 해석들을 논하면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라는 개념을 선택한다. 요한일서5장 18절의 표현이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요한이 본질적인 나심을 염두에 두었거나, 그가 성자의 영원한 나심을 언급했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또 실제로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니케아 교부들이 성부와 성자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었던 근본원리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니케아 교부들이 성부는 성자의 “근원”(ajrchv/아르케), “원천”(phghv/페게), “뿌리”(rJivza/리자)이시며 그에 따라 성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온(ek) 하나님 즉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을 때, 실제로 그들은 성자에 대하여서 신성의 필수적인 속성인 자존성(attribute of self-existence)을 부인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동일한 신적 본질이, 역설적이게도, 그가 성부냐 성자냐에 따라서 “나시지 않은 분”일 수도 있고 “나신 분”일 수도 있다는 점을 함축했다.
니케아 교부들이 호모우시아(homoousia)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성자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신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의 완전한 신성을 세심하게 지켜냈다고 만족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의 표현을 통한 교부들의 주장은 교회로 하여금 사벨리우스주의로부터 멀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예전의 오리겐식 표현을 사용한 것은, 비록 자신들의 생각에 있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operation)의 방식 뿐 아니라 존재(subsistence)의 방식에서도 성자가 성부에 종속한다는 의미를 암시한다. 이러한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늘날까지 니케아의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16세기에 성부만 자존하는 하나님(aujtovqeo"/아우토데오스)이라고 주장했던 발렌티누스 겐틸리스(Valentinus Gentilis)와 유니테리언(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단일신격을 주장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사람들)이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 논쟁하면서 칼빈은-니케아 신조 자체와 그 신학에는 아니라 할지라도-니케아식의 용어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종속설(subordinatinism)에 반대하였다. Augustine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of Himself)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칼빈은 고대의 “영원한 나심” 교리가 ‘거의 유익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짐이 되고, 무익한 골칫거리가 되는 어리석은 것 이라고 선포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교회의 건덕(健德)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낳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낳음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1권 13장 29절).
이 외에 워필드와 존 머레이의 견해가 있다.
10.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성령론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의 위격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는 일에 힘을 거의 소진하였다. 그리하여 성령에 대해서는 “교회가 성령을 믿는다”라는 단순한 선언 이상에서 나아가지 못했다. 교회가 성자의 신성과 위격적 존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야 성령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손상을 입힌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의 가르침과 함께 성령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다루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부가 성자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성자 또한 성령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던 아리우스주의와 반(半)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여 “교회는 주요,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사오니, 그분은 성부로부터 나오신 분이시오,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경배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는 분이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s)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성령의 유일한 특성(idiotes)을 강조하려 했다 또 위의 고백을 통해 공의회는 성자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영원히 성부에 의해 나시는(is generated) 것처럼, 성령 또한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s)는 점을 말하려 하였다.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는 후대의 “이중적 나오심”(double procession) 교리는 힐러리(Hilary), 암브로스(Ambrose), 제롬(Jerome), 어거스틴 등으로부터 그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교리는 또한 5세기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23절에 있는 at Filio(그리고 아들)라는 표현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에 따라 589년에 스페인에서 열린 제3차 톨레도공의회는 그 교리를 정통적 가르침으로 선포했으며, “그리고 아들”(라틴어로는 filiioque 필리오케)이라는 구절을 신조의 3항에 삽입했었을 것이다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신다는 사실을 통해 성자와 성부의 동등성(co-equality)을 선언했던 교리는 서방 기독교의 반(反)아리우스적 신학을 반영했다. Louis Berkhof은 성령의 “나오심”(spiration)에 대하여 “그것은 삼위일체의 제1위와 제2위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행위이다 그 행위로 인해 성부와 성자는 신적 존재 내에서 성령의 존재의 근거가 되시며, 제3위이신 성령께서 어떠한 분할이나 소외, 변화도 없이 모든 신적 본질을 소유하게 만드신다.”고 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성령만의 유일한 특성을 밝히고자 했지만, 사실상 성령이 성부로부터(후에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또는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라는 그 주장은 초대 교부들이 어떻게 성령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성경을 넘어가 버렸던 또 하나의 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대 교부들은, 이전에 니케아공의회가 성자를 종속시켰던 것처럼, 행동 양식에 있어서 뿐 아니라 본질적이고 위격적인 존재에 있어서도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시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성령에 대하여서 자존성(autotheotic, self-stence)이라는 속성을 부인해 버렸다.
성경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고”(요14:26/15:26/16:7), 또한 성자께서는 “숨을 내쉬며”(20:22) 오순절 날에 성령을 “부으셨다”(행2:17). 하지만 이 표현들은 성부와 성자의 구원 활동에 대한 묘사이며 성령께서 구속의 경륜 안에서 성부와 성자에게 복종하셨다는 것에 대한 묘사이지, 삼위일체 내에서 영원히 일어났던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실제로 신약성경 전체 중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para;…ejkporeuvetai/파라…에크포류에타이)이라는 구절을 포함하는 요한복음15:26절만 그러한 가르침에 접근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조차도, 요한복음14:26절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부로부터 나오셔서” 세상으로 오신다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한 의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웨스트코트(B. F. Westscott)는
나오신다(ejkporeuvetai/에크포류에타이)의 단어는 어떠한 근원으로부터의 나오심이나 어떠한 임무(mission)를 수행하기 위해 나오심의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하나를 취할 수 있다. 전자의 의미에서는 근원을 밝혀주는 out of(에크)라는 전치사가 당연히 필요했을 것이다. 반면 from(para)라는 전치사는 16:27절과 17:8절에서 볼 수 있듯이 성자의 임무를 나타내는 동사와 일반적으로 함께 쓰였다. 따라서 후자의 전치사인 para가 여기에 사용된 것을 볼 때 요한복음 15:26절은 영원한 나오심이 아니라 성령의 일시적임’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이 구절을 영원한 나오심에 적용시킨 헬라 교부들은 본능적으로 para를 ek로 바꾸었는데 이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
알프레드 플루머(Alfred Plummer)도
자주 논의되는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성령의 임무라는 사실을 표현한 또 하나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나오신다(ejkporeuvetai/에크포류에타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그 의미를 영원한 나오심(Eternal Procession)으로 한정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전치사 para는 임무수행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지해준다.
라고 했고, 버나드(J. H. Bernard)는
이 구절(요15:26)은 증거 하시는 임무를 위해 성령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절을 소위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이 요한의 생각 안에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복음서 안으로 4세기의 논쟁들과 교리들을 끌어들이는 꼴이 될 것이다(그 문장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에 존재한 신비스러운 관계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이놀즈(H. R. Reynolds)는
요한복음15:26은 서방교회와 그리스인들이 “성령의 나오심”과 관련된 자신들의 교리, 즉 창조 이전에 영원히 존재했던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의존했던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내재적인 관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단지 성령의 일시적인 임무를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에 찬성한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논쟁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동방교회나 서방교회의 견해 중에서 어느 하나를 확립하는 일을 진척시킬 만한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몬드 브라운 역시 브루스(F. F. Bruce), 레온 모리스(Leon Morris), 제임스 패커(J. I. Packer), 그리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는 카슨(D. A. Carson) 등의 학자들에 동의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녀희에게 보낼”이라는 문장에 대한 동의적 병행(synonymous Parallelism)으로 쓰인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라는 표현은, 어떠한 존재론적인 “나오심”이 아니라 성령의 임무를 의미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찬성하면서
칼빈의 삼위일체교리에 담겨 있는 원리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 그리고 성령과 성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한 개념, 즉 “나심”(generation)과 “나오심”(procession)이라는 두 개의 용어로 각기 표현되는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이 갖고 있던 신념의 요점은 위격들의 완전한 동일성이었다. 니케아 교부들이 만들어놓은 “나심”과 “나오심"”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것을 맞추는 그러한 관점은 칼빈에게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칼빈은 그러한 개념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칼빈은 “나심”과 “나오심”의 사실들은 인정했으나 그것들을 단지 단순한 사실들(bare facts)로만 다루었지, 그 사실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구성하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칼빈은 각 위격들의 완전한 신성 즉 참되고 유일하신 신성 안에 존재하는 세 위격 공동체에 모든 것을 맞추었다. 그가 니케아적인 추측 전체를 무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희생시키기까지 하려 했었다는 점에 대하여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Warfield는 이어서
삼위 가운데 제2격과 제3격이 자존하는 신이시다(autotheotes, “self-deity”)라고 확실하게 주장했던 것은 칼빈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매우 위대한 공헌이었다. 칼빈의 입장은 반대를 불러 일으켰으며, 하나의 무리(party)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입장은 진실로 하나의 무리를 창조했었는데, 그것은 개혁교회였다. 개혁교회의 특징은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동일한 본질을 함께 소유하고 계시는 위격들의 동등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개혁교회는 위격들 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소 종속론적으로 설명하는 모든 견해를 철저히 반대하였다.
뵈트너(Loreaine Boettner)eh 칼빈의 생각을 따랐는데, 그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는 교리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반대하였다.
헬라어 원본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나와서 왔다”(came out from/요16:28)라는 표현은 성령님과 관련된 “나온다”(proceed from)라는 표현(요15:26)보다 더 강력하다. 하지만 요한복음 16:28의 문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은 그분의 임무(mission)와 연관된 것이었지, 흔히들 말하는 그분의 영원한 나오심과 연관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나와서 세상으로 오신 것은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내심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임무는 그분의 나오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별 설교(Farewell Discourse)의 일부분이었고, 십자가 사건 직전에 말씀하셨던 요한복음 15장 26절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말씀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머지않아 시련을 경험하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이처럼 진실로 그것이 완전히 다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꽤 명확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요한복음15:26은 성령의 나오심이라는 교리와 관련하여 어떠한 결정적인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올리버 버스웰(J. Oliver Buswell Jr.)은 “고대교회가 요한복음15:26을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이 영원히 나오신다는 교리를 가르치는 구절로 본 것은 그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한다. 버스웰은 “그 교리의 유일한 가치는 그것이 성령과 성부 , 성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일 뿐 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오심’이라는 용어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물이다. 성경은 분
명코 삼위일체 내에서의 그분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나오심’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니케아 교부들과 니케아 이후 교부들이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를 구분했던 실수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작업은 삼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실제의 위격적 구분도 인정치 않았던 사벨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서 이루어져야만 했었다. 교부들이 실수를 범했던 부분은 어떻게 해서 성자가 성부의 아들이 되시며 또 어떻게 해서 성령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시도했던 영역이었다. 그들이 제시했던 설명에 따르면 성자께서는 나시는(being begotten) 영원한 행동을 통해서 그 분의 본질과 위격적 존재를 성부로부터 얻으시며(acquiring), 또한 성령께서는 나오시는(proceeding) 영원한 행동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과 위격적 존재를 성부와 성자로부터 얻으신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경의 범위를 넘어갔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성부만이 홀로 지존하는 신이셔서 성자의 원인과 성자를 “신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시며(이것은 니케아 교부들이 이끌어내려 했던 핵심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결과)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공동 원인이시고 성령을 “신으로 만들어주시는 공동원작자”이시다는 결론을 공식화하였다.
영원한 나심과 영원한 나오심 교리를 지지해주는 성경적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니케아 신학의 위와 같은 측면을 옹호한 사람들은, 삼위일체 신앙이 “삼신론적 경향으로 인식되는 것”을 막고 또 그리스도인의 삶이 “구원에 있어서 분열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전히 성부와 성자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그리려 하며 한 편에는 성부와 성자를 놓고 다른 한 편에는 성령을 놓고서 그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니케아 신학을 그대로 복사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신학을 닮게 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오리겐에 동의하여 주장하기를, 성부께서 동정녀 탄생을 통하여 성자를 세상으로 보내셨으며, 성부와 성자께서 오순절 날 성령을 “부어주시며” 그분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사실로부터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의해 제한된 수준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사건들이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에 존재하는 영원한 나심과 나오심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추론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대한 명백한 성경적 증거가 희미하거나 없다면, 그러한 접근은 형이상학적 추측이며, 그러한 추측은 언제나 특정한 부분이 의심되거나 무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행동 양식에 있어서의 일종의 관계적 종속을 반영하는 사건들은 하나님 안의 존재양식에 있어서의 선행하는 영원한 관계적 종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양식에 있어서의 관계적 종속이라는 것은 개혁주의 공동체가 영원한 구속언약이라고 불러왔던 신학적 관습의 결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지지해주는 많은 양의 성경적 증거가 존재하며 따라서 추측은 필요치 않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구속사역에 없어서 제한된 수준에서의 이러한 구별되는 활동들을 각 위격들은 자발적으로 떠맡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영원한 협의(agreement)에 일치하여, 성자께서는 성부에 의해 보냄 받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기꺼이 동의하셨으며, 성령 또한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냄 받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기꺼이 동의하셨다. 하나님 내에서의 존재론적인 종속관계를 지지해 줄 증거를 어디에선가 찾는 것 즉 영원한 구속언약을 뒤로 밀쳐내고서 모든 구속적인 고려들과는 “상관없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대해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해 생각하면서 존재하심이라는 빈약한 사실을 제외한 모든 내용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2장 3항에서 아타나시우스 신조 뿐 아니라 니케아신조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신앙고백서는 최근 학계에서 이의를 제기해 왔던 그 교리(성자의 영원한 나심과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라는 관점에 있어서 개혁주의적이기보다 니케아적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표현법을 살펴볼 때, 그 교리를 진술하는데 있어서 신앙고백서가 보여주는 그 절제력에 갚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신앙고백서는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한 두 문장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John Murray는
(2장 3항)의 간결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며 그것의 단순성은 오직 그것의 간결성에 의해서만 조화된다. 하나님의 위격들의 구별되는 특성들을 정의하면서 보여준 그 절제력은 놀라움과 만족스러움 둘 다를 불러일으킨다. 니케아적 전통은 성경의 증거를 넘어가는 신조들을 사용하여 그 교리를 특히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에 대한 교리를 화려하게 꾸몄다. 하지만 신앙고백서는 정의(definition)에 있어서 그러한 시도를 범하는 것에 빠지지 않는다. 천년 이상 동안 신학자들의 매력을 끌었지만 성경이 지지해주지 않았던 그러한 사변적인 관념들이 신앙고백서에 부가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 있어서 후대의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진술뿐이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신앙고백서의 2장을 공식적인 관점으로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존하는 신으로서의(autotheotic) 특성과 관련한 Calvin의 통찰력이 분명하게 주장되도록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진행했던 순간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사람들은 간단히 Calvin을 뛰어넘어 니케아-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신학적 정확성을 취할 수 있다. 비록 그 표현들이 간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전 신조들의 표현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다수는 니케아 신조의 표현을, 그 신조의 신학은 아니라 하더라도, 명백하게 인정했었을 것이며, 영국교회의 39개항에 서명할 때에 그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 제8항을 참고하라; ‘니케아 신조는 철저하게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들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토론은 총회기간 중 1주일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472차회기에 시작되었고, 1645년 6월 18일 금요일에 회의가 열렸으며, (월요일에는 회의가 없었기 때문에) 473차회기에 결정 되었고, 다음 수요일에 회의를 가졌었다. 만약 1645년 6월의 이러한 짧은 기간에 이 모든 중요한 교리들에 대하여 기사처럼 결론으로 돌진했었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39개항들을 개정하려는 노력과 관련하여 그 이전에 이 문제들에 대하여 처음 몇 주 동안(1643년 6월 8일부터 10월 12일까지) 긴 토론을 가졌을 것이다.
알렉스 F 미첼(Alex F Mitchell)이 말한 바대로 토론은 ‘신앙고백서와 관련하여 보다 간략한 의사진행 양식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데 있어 실패할 수 없었다. 또한 워필드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듯이 다음의 점들을 지적하고 싶다.
그 회기의 처음 몇 주 동안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39개항들의 개정에 착수해 있었을 때 그리고 세 신조들에 대한 저18항이 논의에 회부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ek theou)라는 문장에 대한 반대 주장이 제기되었다. 종속론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어떠한 항변이 존재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반대로 그 신조들의 유지를 옹호했던 사람들이 종속론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신조의 진술을 무효화시키는 데에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했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 신조라고 불리던 것은 정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라는 한 문장으로 줄어들었다”라고 선언한 Mitchell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들 되심의 양식(mode)에 대한 성급한 생각들이, 그것을 첨가함으로 인해 아일랜드 신학자들은 비난받았었던 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에 의해서는 통과되었다”는 그의 말 또한 참이다. 따라서 나는 다시 한 번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진술에는 실질적으로 어떠한 추측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나온(from, ek)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는 것 역시 분명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니케아-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지지하려 했었고, 성부께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는 고대교회의 교리를 주장하려 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시에, 그러한 주장들에 존재하는 난점들에 대하여이후에 Calvin이 제시한 보다 나은(나는 그렇게 믿는다) 통찰력들(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Calvin의 통찰력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을 반영하며, 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삼위일체 진술이 니케아적인 “추측”으로 이해되지 않고, Calvin의 더 나은 통찰력에 일치하여,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질서”만을 의미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되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결 론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 그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성이 건널 수 없는 그곳을 신앙은 헤엄쳐서 건널 수 있다. 이 오묘한 교리는 이성에 반(反)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초월(超越)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에 없지는 않다. 한분 하나님에 대해서 위격이 셋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다. 꼭 삼위일체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느냐?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교리가 없으면 사람들이 더 오해가 많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다보니 단일신론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두 분이라는 이신론자(二神論者)들,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 삼신론자(參神論者)들, 성자시대(聖子時代)에 성부는 계시지 않았다든지, 성령시대(聖靈時代)는 성부와 성자는 계시지 않았다고 믿는 사벨리우스主義(Sabellianism), 그리고 성자는 성부의 종속설(從屬說),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종속설, 한 분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어떤 때는 성령하나님으로 현현하신다고 하는 양태론(樣態論), 그래서 성부 고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하는 사람들, 반대로 신성만 강조하는 사람 등이 있다 보니 성경하고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이에 318년부터 381년까지 60년 이상의 세월동안 삼위일체논쟁이 지속되어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정통신학자들의 불굴의 의지로 오늘에 이르렀다. 동방교회에서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끝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칙령을 반포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제시된 삼위일체교리를 정통교리로 인정했고, 서방교회는 381년 이전부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같은 삼위일체교리를 신봉했다.
삼위하나님이란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성부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성자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신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오늘도 교회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참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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