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영향권에서 독자 외교 노선을 천명한 동구권 지도자가 있었다.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침공하여 ‘프라하의 봄’을 와해시키려 했을 때 그는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때 그의 인기는 자국은 물론 서방에서도 최고조였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후 개인 우상화, 언론 탄압, 족벌 체제, 공포 정치 등 유례없는 악행을 저지르며 혹독하게 루마니아를 유린했다.
1971년 그는 아시아 순방 중 접한 북한의 주체사상과 김일성 개인숭배에 경도되어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을 겸해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된 그는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멋대로 임면했으며, 남발한 포고령에 의존해 통치함으로써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인권유린의 극단적인 예가 ‘포고령 770’이다. 출산율 저하가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피임과 낙태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강제했다.
출산 정책에는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여성이 다달이 산부인과 검진을 받아야 했고, 비밀경찰이 병원을 감시했다.
어쨌든 그 법안의 단기적인 효과로 베이비붐이 일어나긴 했다.
수십 명의 친인척을 동원한 그의 족벌정치는 독재자들 특유의 배신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했다.
2000만 국민을 감시하기 위해 300만개의 도청기를 설치하고, 친위대를 만들어 공포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며 정규군보다 우대했다.
무리한 공업화 경제 정책은 엄청난 외채를 낳았는데, 언론을 장악해 경제 파탄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통치는 연례행사였던 1989년 대통령 지지 대회에서 무너졌다.
대열의 후미에서 야유가 시작됐고, 곧 군중은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급변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이 생방송으로 나갔고, 군대마저 시민 세력에 가세해 결국 차우셰스쿠는 몰락했다.
속결로 처리된 그의 공개처형도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루마니아 국민이 받은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