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9
7월2일[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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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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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uJx0-glXik
(박정우 후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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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십자가가 다가올 때면>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심야에 병자성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위독하신데,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어서요."
사제들에게는 담당구역이 확실하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병자성사는 관할 본당 신부님들이나 원목신부님들께 부탁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정 상황이 안 될 때는 사제 양심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데…. 신속히 가방을 챙기고, 재빨리 시동을 겁니다. 신호도 어깁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러 부랴부랴 집중치료실에 도착해보니 한 형제분께서 거의 임종 직전에 도달해 계셨습니다. 온 몸은 응급조치를 위한 각종 호스며 전선들로 복잡했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신 숨을 가삐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숨이 너무도 가쁜 나머지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환자분을 바라보는 가족들 역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발 저 답답한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시켜 주셔서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계신 형제님,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형제님 얼굴에 예수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지독한 호흡곤란 증세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꽝꽝' 대못이 박힌 손과 발의 통증도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체중이 아래로 쏠리는 현상으로 인한 심장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호흡이 곤란했던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을 위로 뻗으셨습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호흡곤란 증세가 완화됐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다시 내리누르는 체중 압박으로 되풀이되는 호흡곤란…. 십자가 위에서 몇 시간은 정녕 혹독한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상이 통곡하던 그 성 금요일로 되돌아가 봅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셔서 호흡곤란에 헐떡이시는 예수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전지전능하셨던 분, 죽은 사람마저도 다시 살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 죽음, 피하고자 마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그 고독한 길, 죽음과도 같은 형극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니다. 그 치욕의 십자가 위에 자진해서 매달리십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을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실천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세상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동반한 십자가 외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물론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결국엔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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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6lB82TRH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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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님이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 예언자들임을 왜 믿어야 하는지 묵상해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파견하시면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시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고 하시며 교회를 받아들여야 교회가 받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면 되지 교회를 파견하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로 교회 안에 묻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추운 어느 겨울날, 연료가 소진된 미군의 트럭이 한 다리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군인들이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자기 옷으로 감싸고 죽어있는 한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다리 주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전쟁 후 한 군인이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아기가 청년이 되자 양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들에게 친어머니의 무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날도 아기를 발견한 날처럼 매서운 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자기 겉옷을 어머니 무덤에 덮어주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웃을 위해 나의 겉옷을 벗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이고 미군은 교회이며 아들이 우리들입니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죽으셔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고 믿는 사람 곧,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존 오리어리는 어렸을 때 불장난을 하다가 자신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집을 전소 시켰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그것은 너의 선택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지기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수는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존 오리어리가 사고를 극복하고 훌륭한 강연가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된 이유는 어머니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방식은 예언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소위 개혁 갈멜회를 만든 인물들입니다. 이전의 수도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주님 뜻을 따르는 수도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커다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를 위해 물 한 잔을 주는 모습입니다. 과부의 헌금처럼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분명 교회를 예언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와 권력으로 교회가 타락해 갈 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모범으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죄를 용서해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를 부정하였습니다. 교회를 받아들임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교회로 가서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비록 잘못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교회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개혁에 힘썼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걱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구원과 직결됨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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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오면서 버스와 가이드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가이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주변의 경치도, 분위기도 비슷했기 때문에 가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다리만 하나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이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변의 경치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가이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종교’였습니다. 터키에서는 ‘성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이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는 97%의 국민이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스에서 ‘당신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 사람입니까?’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온 우리들에게 터키에서 그리스로 온 것은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하지 않느냐는 의미였습니다.
순례 중에 터키가 이슬람 국가라서 크게 힘들거나 어색한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순례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가능하면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대 사회의 유적지를 보면서 세상은 돌고 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대 신전의 주춧돌은 초대 교회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고, 초대 교회의 주춧돌은 이슬람 사원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터키에서 머무는 동안 이슬람의 율법과 전통을 강요받았다면 불편함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들도 없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20년이 넘게 성전을 지키면서 순례자를 맞이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석”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보석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석은 제도와 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보석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을 위해서 성당을 지키고 있었던 수녀님의 환한 미소가 ‘보석’이었습니다.
축구에서 중요한 3가지 요소가 있다면 '체력, 기술, 조직력’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90분간의 경기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체력이 좋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선수들의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축구는 체력만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음은 조직력입니다. 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것도 필요하지만 선수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서 팀을 이루어야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한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들에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가을이면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3가지를 말한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악, 죽음’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는 그분을 따를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 머물고, 교회에서 교리를 배우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죽어서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알던 사람도 성경책을 몇 번 읽었고, 종교서적을 연구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하여도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고 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며 삶속에서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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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2열왕 4,9). 그 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녀가 아들을 갖게 보답해 주셨다. 나그네 대접은 그것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므로 생명의 행위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신앙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인다는 말은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으로,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때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파견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덕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우리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세례로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선과 악이, 하느님의 뜻과 세상이 원하는 것이 끝없는 갈등을 벌일 것이다. 이 갈등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로 나타날 것이다. 이 갈등을 겪어야 하는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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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7-39)
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에 대한 사랑’은 글자 그대로 실제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나란히 비교 대상으로 놓고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가족은 신앙생활과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끝까지 함께 가야할 ‘인생의 동반자’이고, ‘영적 동반자’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족을 더욱 사랑하면서,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많은 경우에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애착심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면, 그래서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서 노동을 하고, 그 과정에서 세속 사람들과 어울려서 세속 생활을 하게 되고, 취미 생활도 하게 되고,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나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 세상의 모습이고, 그런 일들이 죄는 아닙니다. <잘하기만 하면 그런 일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속 생활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또 취미생활에만 너무 몰두하다가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면, 여러 가지 창작 활동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은 무시해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쪽으로 가버리는, 즉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죄’와 ‘허무’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제 십자가’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뜻합니다. 작은 어려움이든지 큰 어려움이든지 간에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일들은 모두 십자가인데,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 승리,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상관없는 고통들까지 전부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십자가라고 판단되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참고, 견뎌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십자가가 아니라면 막거나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을 혼자서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은데, 그래서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라는 뜻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만을 원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19장에 나오는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
그 부자가 슬퍼한 것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채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 때문인데, 재물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슬퍼했을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슬퍼했을까? “재물과 영원한 생명 가운데에서 하나를 포기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가? 많은 사람은 머리로는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으로는 재물을 선택합니다. <신앙생활은 생각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즉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40절의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의 신원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인데,반대로 생각하면,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자신의 삶으로, 또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예수님의 대리인이 되어야 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의 신앙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교회를 알게 됩니다. <만일에 어떤 신앙인이 신앙인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신앙인 한 사람 때문에 예수님을 오해하게 될 것이고, 교회 전체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언제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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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뒤에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과,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을 알려 주시는 부분이 섞여 있습니다.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씀은 가장 큰 계명의 첫 부분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22,37). 어쩌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여야 하는지 묻는 데에 대한 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비교 대상이 됩니다. 실행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비교입니다.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첫째가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16,24)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초대는 목숨을 잃고 얻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으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분을 충실히 따르도록 가르치셨으며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 생애의 요약과도 같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보여 주신 사랑에 대한 응답과도 같습니다. 신앙인은 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세례는 그 응답의 시작이고, 그 응답은 일상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지속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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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과는 다르게 사
는 사람입니다. 발은 땅을 딘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하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입니다. 하늘의 시민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대로 세상과는 대조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물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홈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심시오."(필리 2,14-15)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성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레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줍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 6.4 1, 제2독서)
세레를 통해 이루어지는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전환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동시에 과제도 안겨줍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계속 새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은총의 선물인 새로움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밝게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란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를 통해 전해지는 그분의 손길에 의탁하고, 그분을 닮도록 부지런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아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세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복음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28.19-20) 제자들은 스승의 명에 따라 만방에 가서 복음을 선포함니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 서는 세상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가족도 뒤로하고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를 하라고 하십니다.(마태 10,37-12 1 복음)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힘들고 험한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제자들을 돕는 이들을 보내주시는데, 그들에게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사 예언자를 도와주었던 여인이 큰 축복을 받았듯이(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를 예언자로. 의인으로 받아들여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를 통해 계속됩니다. 사제와 평신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확신 있게 세상에 북음을 전하고, 그 북음의 힘으로 인간이 거룩하게 되고 현세 질서가 개선되도록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분이 교황님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님께서 말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시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협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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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님]
<세심한 배려와 정성>
어린 시절, 저녁 식사 후 거실에 가족이 모여 앉아 TV를 보면 어머니께서는 사과를 깎아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두터운 과육 부분은 접시에 놓아 가족들이 먹게 하고 당신께서는 귀퉁이를 살살 베어서 잡수셨습니다.
자꾸 귀퉁이만 드시던 어머니께 접시에 놓은 것을 잡수시라고 말씀드리면, ‘응, 알았어.’라고 얼버무리셨지요. 물론 과육 부분을 잡수시긴 했지만, 귀퉁이 부분을 더 많이 드셨습니다.
이때 철딱서니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과의 귀퉁이만 좋아하시는구나! 어머니는 귀퉁이만 드셔도 돼!’라고 말이지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아실 겁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서로 합당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한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무에 대해 짚어주시는 듯하니 받아들이기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합당한 사랑’에 대해 다른 각도로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합당한 사랑을 드리는 것은 무엇일까, 무조건적인 희생을 드리는 것이 전부일까? 삶의 여러 가지 즐거움을 꺾어버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면 충분할까?
여기서 잠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지요? 대개 우리는 주님께 양보를 요청합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러한 연유로 못 한다라고 말이죠. 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이러한 것쯤은 눈감아주실 거라는 태도가 주를 이룰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 천 걸음을 가자는 요구에 그대로 응하시듯 수많은 것을 양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성 어린 봉헌을 한다면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성이 깃든 봉헌처럼 미사에 갈 때 시간을 내는 것부터 단정한 옷차림 같은 외적인 준비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당을 향하는 내면의 준비까지. 이처럼 예수님께 드리는 것에 우리가 최선의 정성을 다하면 얼마나 바람직할까요!
한데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께는 양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 못해 예수님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하는 합당한 사랑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을 콕 짚는 것보다 우선 그 바탕을 논하는 게 더 유익하겠습니다.
그것은 제 어머니도 우리가 흔히 먹는 두터운 과육 부분을 잡수실 줄 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권해드리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가 세심한 정성을 드리면 즐겨 받으실 줄 아는 분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면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이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어버이이시고 온 누리의 임금이십니다.
우리가 이 모든 점을 아우를 수 있다면, 자연스레 합당한 사랑을 드릴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을 해드리기에 하느님도 우리도 무한한 기쁨 속에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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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임영민 안드레아 신부님]
<교황주일을 지내며>
쿼바디스 도미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을 때 예수님의 환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피신을 뉘우치며 로마로 다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하게 됩니다.
교회의 반석으로 뽑혔던 첫 번째 교황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묵상하며,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라크를 방문하여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순례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아버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의 아버지, 이슬람인들에게도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이라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평화롭게 살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코로나와 테러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목 방문을 하시는 교황님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올해 성유 축성 미사 강론에서 주교님께서는, 교황님께서 하신 사제와 신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하셨습니다. 즉, 양의 냄새를 잃지 않고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의 답변으로 하느님과 주교, 동료사제와 하느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참 사제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교황님께서는 현대 교회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의 실천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 참 사제의 길을 제시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삼중관을 쓰신 교황님의 화려함의 내면에는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가장 보잘것없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측은한 시선으로 가득 찬 교황님의 고뇌가 있습니다.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가난한 이웃에게 내미는 교황님의 손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전 세계 교회는 정성되이 봉헌의 대열에 함께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은 로마의 주교요,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며, 세계 주교단의 단장으로 현세 교회의 통괄적 사목자입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짊어져야할 직분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크고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황 주일을 지내며 우리는 모두 교황님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시간을 가집니다.
주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힘과 지혜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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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황영삼 마태오 신부님]
<십자가를 물려주다>
오늘 제1독서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 예언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알아본 한 여인의 가정이 엘리사를 자신의 집 안으로 모십니다. 오직 엘리사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 살고 있으니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살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를 받아들이는 이유도, 내가 살고 있는 이유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에 의해서’라는 하느님 중심 사고, 그 신앙의 기억이 남아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명한 MC 김성주 씨가 작년 말 시상식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룩할 성(聖)’, ‘기둥 주(柱)’라고 밝히며 소감을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성주(聖柱)는 ‘십자가’를 의미한다며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합니다.
오랜 무명의 시간, 살면서 찾아오는 수많은 시련과 답답한 상황에서 어쩌면 그 부모가 물려준 신앙이 십자가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현재 방송인으로 성공하며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된 지금,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얻게 될 약속의 부활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며 살고 있으리라는 기쁜 마음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이름을 물려준 부모가 기대했던 믿음에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우리의 생각, 판단은 모두 하느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4천 년 동안 우리 신앙인이 받은 교육의 핵심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시는지 기대하며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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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드시 걸맞은 상을 받을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자녀로 뽑아주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의 목자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도시에 공부하는 스님과 술 파는 여인이 나란히 이웃에 살았답니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했고 여인은 열심히 술을 팔았습니다. 여러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지옥에 떨어졌고 여인은 천상 극락에 들어갔습니다. 마음속으로 진정 부러워했던 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하고 예불을 드리면서도 ‘아! 부럽다. 맛있는 술에다가 어여쁜 여자, 춤추고 노래하고 얼마나 신날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 부럽다 부러워!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고 꽃을 바치며 경전을 읽고.. 얼마나 행복할까?’ 하며 늘 거룩함을 갈망했습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다윗에게 기름 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3)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하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항상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 앞에서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출가와 가출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죠? 출가는 세속의 집을 떠나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고 가출은 집이 싫어서 그냥 나와 방황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출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걸으신 길을 함께 살아갑니다. 출가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을 길에 나와 있으나 집을 떠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집을 떠났으나 길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하늘의 상을 받겠습니까? 술 파는 여인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먼저 사랑하는 것이, 부모, 자녀, 형제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은 새로운 양식으로 자기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자기 소신, 주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나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냥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게 됩니다.
완전한 헌신, 순종이 신적인 사랑의 힘으로 충만한 새로운 마음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사랑의 진가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사랑에는 생가지도 못한 보답이 옵니다. 지금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며 사랑하는 그 자체가 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이 길을 따라가지 않을 때 잘못을 저지르고,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많은 이들이 특히 성직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명예, 사치, 세속의 길을 찾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지만, 그저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길,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시며 출세의 도구로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지 않는 은총을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헛된 명예 따위를 위하여, 재물을 위하여, 자기만족을 위하여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적잖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의 자부심과 복음 정신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자기 포기와 희생, 헌신의 정신이 우리 교회는 물론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좋은 소식, 맑고 밝은 소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둠을 탓하기에 앞서 하나의 빛을 밝혀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여 있고 그분이 원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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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머니의 생전에 두 번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의 하나입니다. 93세로 2021년에 돌아가셨는데 2005년 교포사목할 때의 편지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출가시켰고, 아들은 주님 안에서 어머니를 늘 사랑했습니다.
“부족한 어미가 신부님께 드림.
고향을 떠난 지도 두 달이 넘는군요. 낯선 곳에서 사귀느라 맘고생이 크지요? 모든 고난 참아 받고 건강 조심하세요. 건강이 첫째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요. 조석 굶지 마세요.
이 못난 어미한테 태어나서 공부할 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돈 한 푼 제대로 주지 못하고 살아온 어느 날 신학교 간다고 할 때, 반대를 하였더니,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신부가 되어서, 머나먼 외국을 간다고 하니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쇠털같이 많은 고난을 참고 살아왔지요. 그러나 앞날을 기대하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몸조심하세요. 훌륭한 신부님 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쁩니다. 여기 생각하지 말고 몸 건강 챙기세요. 신부님은 나한테 너무 신경 쓰십니다. 나한테는 다른 아들딸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부님 건강을 조심하세요. 늙은이 글씨 말도 안 되니 잘 읽어보세요. 이만 줄입니다. 마지막 날 신부일 수 있게 지향 두어 기도하고 영성체 했네요.”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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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매년 원로 신부님들이 오셔서 고해성사(총고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러 갔다가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성사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나가!!!”
결국 쫓겨나서 다시 성찰한 뒤에 무서워서 그 신부님이 아닌 다른 신부님께 가서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고해소에서 쫓겨난 것이라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성사라는 고해성사를 이렇게 공포 분위기로 만드는 신부님이 잘못이고, 신부님께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즉, 부족한 저를 위해 신부님께서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올해 초, 우리 성당 난간에 한 아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간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사다리 올라가듯이, 난간에 올라가 있던 것이지요. 너무 깜짝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장 안 내려와!!” 그 아이가 미워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난간 위로 올라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에 다급하게 큰소리친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상대를 위해 큰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이나 시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니 그분 뜻을 100%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역시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자체이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또 아들이나 딸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우리나라처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고 상처까지 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를 통해,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밝히십니다.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합당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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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제 생각에 연중 제13주일의 주제는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이 받아들임은 억지로 받아들임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요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물론 단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쓴데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게 받아들인다고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쓴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쓴소리를 해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인다고 자주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쓴소리를 왜 달게 받아들입니까? 그것이 진정 우리에게 약이기 때문입니다.
약을 먹어야 우리의 몸의 병이 낫는데 미성숙한 어린애는 쓰다고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의정 곧 약에 단 것을 바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어른이라면 쓴소리를 당의정처럼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쓸지라도 몸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쓴소리뿐이 아닙니다. 죽음과 고통,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실패와 같은 것들도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그것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인데 사랑 특히 하느님 사랑으로 달게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랑의 수난이야말로 당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예언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별개로 생각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예언자나 가난한 이들을 별개가 아니라 동일시하는 것이며, 예수님 사랑으로 제자들과 예언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하나의 약속을 하십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이들은 예수님으로 받아들이면 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도 사도들처럼 나의 제자들이라면 뭐든지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죽음을 달게 받아들여 생명을 얻고,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영생을 얻고, 주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상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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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삶의 길>
- 주님 사랑,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형제 사랑 -
어제의 세 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수련자 수업시간에 수련수사는 마침 저에게 한가지 말씀을 드리겠다며 많이 눈치를 보며 주저하길래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달 했고 내심 긴장했습니다. 무슨 스캔들이나 악습같은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것은 알아 개선해야하기에 꼭 듣고 싶었습니다.
“수사님에게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가끔 어쩌다가 체취, 땀냄새, 노인냄새가 난다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야기 해줬고 저도 올해 들어와 가끔 느낍니다. 집무실에 방향제를 비치해야겠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매일 속옷을 갈아입고 기상하면 샤워에 하루를 끝내면서 샤워를 하는데 무슨 냄새가 날까, 사실 속옷도 삶지 않고 오래 입다보면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나긴하는데 알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안도했습니다. 악습이나 악행의 죄가 아녔기 때문입니다.
이건 생리적 문제라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각별히 삼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맙다고 격려하는 말을 했고 사람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며 매일 미사에 강론, 끊임없는 기도로 내 마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이라 자부하며 새삼 인품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어제 15년만에 갑작스럽게 찾은 수녀님의 면담고백성사시 수녀님의 수도원 방문소감입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와 수도원길을 걷는 동안 예전과는 달리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활짝 펼쳐진 불암산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15년전이면 그때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없을 때입니다. 가로수길이 하늘길이라 하며 걸을 때 마다 감동했지 산과 하늘을 가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듣고 나서 후에 걸어보니 하늘도 산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새삼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을 가리는 삶은 아닌지 참으로 작고 투명하고 겸손하여 배경인 주님을 잘 드러내는 삶인지 반성했습니다.
하나는 ‘탈성장’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번 1년만에 복간되어 도착한 녹색평론을 읽고 많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고 지구와 인류에 대해 비관적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속성장은 환상이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며 절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며 자본주의를 끝내야 한다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문제는 나왔습니다만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답은 참 힘듭니다만 더 늦지 않게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참 삶의 길을 찾아 사는 것입니다. 이젠 혁명적 사고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고 과감한 정책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모든 일들이, 심지어는 강론을 쓰는 일도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대만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무수한 쓰레기를 양산하며 먹고 사는 자체가 죄송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참된 삶의 길이 절실합니다. 정말 치열한 가열찬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절박한 시점입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는 것은 주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가면서 끊임없는 자아초월로 이기적 탐욕의 무지한 나로부터 부단한 탈출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릉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참으로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눈밝은 이타적 가족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무사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례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삶이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으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더불어 기억해야할 말이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입니다. 참으로 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항구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요 책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 사랑의 결정적 표지가 내 십자가입니다. 비교불가한 내 고유의 십자가요, 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짐도 사랑의 선물로 바뀔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날마다 부단히 주님 때문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자기를 잃을 때, 비울 때, 버릴 때 비로소 목숨을 얻어 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요, 지금 여기서 구체적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형제 사랑없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도 받고,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도 받습니다. .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를 정성껏 한결같이 환대한 수넴의 부유한 여자는 득남할 것일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를 환대하는 이들의 환대의 사랑은 그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제자는 사도들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모든 제자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박해 때문에 기장 불우하게 된 이들, 그리고 가장 빈곤하게 된 이들이 될 것입니다. 넓고 깊이 보면 가난한 모든 이들이 주님의 제자이자 형제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제자답게 형제답게 살며 작고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의 가난하고 작은 제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두의 중심임을 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십자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입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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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고통 앞에서 기도하자!>
오늘 복음(마태10,37-42)은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과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부모나 자식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고통(십자가) 앞에서 넘어지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제 오후에 근처 적석산으로 잠깐 산책 다녀오면서, 참으로 오랜 만에 좋아하는 성가('아무것도 너를' 과 '태양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면서 고통을 이겨내자.'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를 다시금 묵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지 않은데서 찾아오는 것이 고통은 아닌지.
산책을 다녀와서 토빗기를 필사했습니다. 토빗이 참새 똥에 맞아 눈이 멀게 된 고통과 라구엘의 딸 사라가 겪는 고통과 그들이 고통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과 그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토빗 2,1-3,17)
'고통 앞에서 기도하자!
예수님도 고통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우리도 고통 앞에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기도로 고통을 이겨냅시다!
연중 제13주일인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살아가시고 사목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교황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잘 따라갑시다!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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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tHylUYYc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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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 38)
십자가 덕분에
칠월을
맞이하였고
회개 덕분에
거짓을 벗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주신
주님의 덕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삶의
가장 합당한
사랑의
기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기본이 기본을
치유하듯
십자가가
십자가를
치유합니다.
십자가의
가족이
되지않고서는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 자세이며
전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알아 듣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맛이
사람의
깊은 맛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변화의 참된
시작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람을 끝내
사랑하게 하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비껴갈 수 없기에
껴안고 가야하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모르는 이름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갑니다.
십자가를 지듯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임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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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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