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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이론: 비결정/무규정/혼성/혼재/혼동(Apeiron, indéterminé)
F. Caujolle-Zaslawsky,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p. 119-120. (P.3299)
- 꼬졸-자스라브스키(Françoise Caujolle-Zaslawsky, 1938-) 아리스토텔레스전공,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가이 없다’: 갓, 긋, 끝, 가장자리, 둘레, 경계, 한계, 좀 더 확장하여 규정, 결정, 단언, 판단, 정의(定義) 등이 없다는 것은 아페이론과 같은 의미로 쓰일 것이다.
불교에서 ‘저 넘어’든,
프랑스어에서 저편에(par delà)든,
니체의 저편에(jenseits)는 가의 경계가 없다는 의미로 쓰일 것이다. 니체의 “선과 악의 저편에”에서 ‘저편에’라는 용어는 불교의 경전에서 빌어 왔다고도 한다. 이런 공간적 의미에서 ‘가이 없이’ '가'는 과정에서 ‘가이 없다’는 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기보다 실재성이다.
철학의 시초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카오스에서 페라스로, 즉 혼돈(엉킴, 혼잡, 모호함, 무규정, 무질서, 잡동사니, 카오스, 필연)으로부터 질서(정돈, 배열, 분류, 배치, 규정, 정의)로 간다고 하는 데, 이는 행동을 쉽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또한 들뢰즈가 벩송의 회로이론을 빌어서 설명한 것으로, 뇌의 회로를 고정시키려는 노력일 수 있다.
고정시켜 쉬운 것에 중독이 되어 정태적으로 머물 때, 오만, 방자, 착각, 환상, 광기, 야만이 등장한다. 이를 경계하는 것이 자연 자체를 직관하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전체(브라만)에도 부분(아트만)에 머물지 않고(불이), 중생들과 더불어 선업을 쌓기를 노력하라고 할 때, 전체라는 선가정에도, 정태라는 편리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리라.
실재로 삶은 어떤 가(끝)도 없다. 그리고 그 가의 기원(시초)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아페이론(경계 없음)이다. 그러면 벩송이 말하듯이 “수 전체는 하나”이듯이, 생명 전체가 하나이고, 그 하나는 시작에서 가이 없는 다양체이며, 아직도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이며, 방향이든 목표이든 가이 없다는 점에서 미래 또한 가이 없다(아페이론)이다. 이런 추론에서 시초의 아페이론과 미래의 아페이론을 구별한다면, 전자의 아페이론은 지금도 영향(권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실재성이고, 미래의 아페이론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으로 설정된다는 의미에서 개념(용어, terme 끝, 가)이며, 그 대상을 고정(정지적 표상, 관념)으로 추상화할 경우에, 상징으로서 기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차이와 반복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실재적 성질을 생산하고 되기하는 것을 ‘차히’라고 하고 싶어하며, 추상화에서 의미의 대상 사이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경우에 ‘차이’라고 한다. 전자(차히)는 생명과 의식에 해당하며, 후자(차이)는 기하와 수에 해당한다.
추상에서는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실재로서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 추상화된 대상들 사이에 계산하고 표상하여 사태(만들어진 것들)를 배열하고 배치하여 이용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체계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에서 나왔다. 의욕이 안녕과 편리에 묻혀서 이익에 전념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생명은 일회적이고 과정이 불가역적이다. 그럼에도 생명체들 사이의 연관도 배치와 간격 그리고 속도 사이에서 활동과 활용을 달리한다. 생명은 이런 과정에서 자기의 작동을 활동과 활용에 맞도록 노력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배치를 창안하고 창발하여 자기 성취의 노력을 한다. 벩송은 이런 성취의 노력이 편안의 노력과 다르다고 한다. 후자(편안의 노력)의 노력에서는 이기심과 오만이 만든 사회성(socius)이 있는가 하면, 전자(성취의 노력)에서는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타인도 아제인간도 성취의 길을 가는 길이 어렵지만, 또 드물지만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드물다는 의미에서서 보면, 규정화 또는 결정화 방식과 간격이 있다는 점에서 아페이론 속에서 드물다. 그럼에도 아페이론 속에서 연관있는 삶을 살아가는 노력은 귀하고 보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서로가 산다.
삶을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지성을 통한 편리와 안전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연을 이용하고 연속 가능한 것으로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생태와 어우러져야 하며, 공감과 공감을 이루며 자연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을 지속하는 이들이 더 많아야, 그나마 하나 뿐인 지구(토양)와 생명(생태)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창안해야 한다. 이 후자의 창안에 노력하는 이가 51퍼센트, 이익과 편리에 49퍼센트가 혼성되어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립된 견해들이 혼성되어도 이 세상에서 꾸려져 나가는 삶. 이런 삶이 운명일 것이다. (1:40 54MMB)(2:11, 54M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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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페이론/무규정, 비결정, 비규정, 혼성, 혼돈(Apeiron, ἄπειρον)
실사로 된 중성 형용사(adjectif neutre substantivé)
이 단어는 페라스(péras(πέρας): 한계 limite)라는 단어와 아(a, 없는 결함 있는privatif)라는 접두사가 결합한 단어이다. 즉 물리적(자연적)으로도(끝없는, 경계없는) 논리적으로도(개념적 형태에서 멈춤 또는 정지 없는, 비규정적인) 한계를 한정할 수 없는, 또는 한계가 박달된 의미이다.
1) 형용사로서 아페이로스/아페이론(ápeiros, on, ἄπειρος, -ον)은 통상적으로 형상에게 특별한 허식적인(장식적인) 자격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그 허식적인 형상[형태]의 원은 가장 단순한 이미지이며, 소위 그 이미지가 어떠한 분명한(명석한) 점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 그이미지(둘레)를 주파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선택된 출발점이 어떤 점이라고 하더라도 - “끝이 없다(san fin)”.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끝나는 점을 보지 못하는 모든 대상은 “끝이 없다”고 말해질 수 있는데: [예로서] 깊이를 잴 수 없는(insondable) 어둠[모호함], 끝이 없는(interminable) 지속, 셀 수 없는(innombrable) 많음[군중], 척도 없는(démesurée, [절도없는 잴 수 없는, 측정할 수 없는]) 불의[부당함] 등, 이런 “끝 없는(san fin)” 질적인 추상은 그 추상이 성질을 부여하는 대상의 범주에 따라서 다른(차이) 가치를 지닌다.
2) 실체적 형상으로서 ‘토 아페이론’(tòápeiron, τὸ ἄπειρον)은, 절대적으로 이용되었는데[절대적 의미로 사용되어], 모든 사물의 기원에서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전 610-546)에 의해 자리 잡았던 원리(le principe)를 지칭한다(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I, III;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자연학자들에 반대하여(Πρὸς φυσικούς Contre les physiciens, III 30; 학자들(수학자들)에 반대하여, X 360). 여기에서 한계[경계]의 부재는 논리적으로 정의(définition, tò ápeiron: l’indéterminé)의 부재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질[소유할] 수 없을 것 같다. 플라톤이 필레보스편에서, 아페이론(l’ápeiron)을 페라스(le péras)에 보완적 방식으로 대립시켜 썼으며, 누스(le νοῦς, 지성)와 메이크톤(le μείκτόν)과 함께 원리의 역할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실체화된 형상은 ‘타 에이데’(tà eídê, [형상들])(종들, les espèces)와, 수적으로 한정되어있다는 의미에서, 대립관계로 사용되었고(아리스토텔레스, 변증론Topika, I 1, 109b 14, 등), 따라서 그 의미는 문맥상으로 분명하게 되는데, 즉 ‘타 아페이라’(tà ápeira)란 “셀 수 없는 것들(les innombrables)”, “나눌 수 없는 것들(les individus)”이 된다. 이것들의 수는 종들의 수와 반대로 한계(제한)이 없다.
3) 에이스 아페이론 프로이에나이(eis ápeiron proiénai; 무한히 진행하여) 등등과 같은 정식들은, 끝에 이름이 없이 무한히 추구하거나 또는 반복되는 과정, 논리적 추론을 서술하기 위해 이용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VI 1, 209a 25, 니코마코스 윤리학 V 7, 1113a 2 등등;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자연학자들에 반대하여, I, 179, “무한 퇴행에 관하여(de la régression à l‘infini)” 말했던 회의주의적 양식에 관하여.)
아페이로스(ápeiros)가 “경험없는, 미숙한”(inexpérimeté, lat. imperitus)로 쓰이는 것과 혼동하지 말라. (F. Caujolle-Zaslawsky)
(54MMB, N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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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546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기원전 610-546): 무규정자(l'indétermine, apeiron) [니체의 아낙시만드로스를 들뢰즈가 에제키엘과 마치 문자의 대구(對句)로서 생각한 것은 흥미롭다. / 나로서는 하도의 시대에서 낙서의 시대의 전환이 587년쯤 될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 산술학적으로 경험의 수에서 추론의 수로 전환되는 시기라고.] [들뢰즈/가타리 만큼 흥미로운 철학자들이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한다. 아마도 철기시대를 지나, 규소에 의해 토대가 펼쳐진 다양체로서 생태는 같잖은 사유를 하게 될 것 같다. (54MLF)]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그가 18년 후에 배울 수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말기에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과(이데아)에 대한 존경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고민은 이데아가 아니라 아페이론이었을 것이라고 말년에 깨닫고 필레보스편을 쓰지 않았을까?]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4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예순 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창안하면서 앞 시대(이오니아)의 아페이론을 무시하는 누스((le νοῦς 지성)의 영광을 노래한 첫 철학자일 것이다. 인류는 결과를 전달하는 도구를 만들었다. 문자라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시기는 그래도 구전이었다(파이돈편에서 감옥 이야기에서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장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쓰여진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즉 결과물에서 역으로 추론(정의 내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지성이 추론상 결과를 먼저 생각하고 아페이론에게 명령(지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문자의 시대이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체계를 갖는 시기와 같다는 것인데, 영역이 달라도 유사한 사고 방식은 서로 만나지 않더라도 창안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아우구스의 황제의 성립과 크리스트교가 판단(심판)의 종교로 형성된 이 유사한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종교는 감성인데 지성(심판)으로 바꾸어 로마를 지배한 것이 서양사상사가 또는 역사과 억압과 광기로 흘러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54MLEF)
O
160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Σέξτος Ἐμπειρικός, 160경-240경) 알렉산드리아, 로마, 아테네 등에 살았다는 경험론 의학자, 철학자. 그의 철학적 저작은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회의론으로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 학자들(수학자들)에 반대하여(Πρὸς μαθηματικούς, Contre les professeurs(Pros mathêmatikous / Adversus Mathematicos : contre les savants) 자연학자들에 반대하여(Πρὸς φυσικούς Contre les physiciens(aussi intitulé Livres III-IV ou Contre les professeurs livres IX-X)
1938 꼬졸-자스라브스키(Françoise Caujolle-Zaslawsky, 1938-) 철학교수자격, 문학박사. 아리스토텔레스전공, 여고사범학교출신(L'École normale supérieure de jeunes filles, ENSJF). 언어 인식학의 역사(Histoire Épistémologie Langage 1985) / La méthode Des sceptiques grecs,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Etranger, 172 (2):371–381(1982)
(3:23, 54MMB) (4:26, 54M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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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1 : 구어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글자로 표기하면서 온갖 아이러니와 파라독스가 생긴다. 이를 넘어서고 하는 노력은 유머와 직관일 것이다.
<일본 사람 이름 중에 ‘平平平平’이 있어. 우리는 ‘평평평평’ 외엔 다르게 읽을 재간이 없지. 그런데 일본어로는 ‘히라다이라 헤이베이’라고 다 다르게 읽어요. 날 생(生)자 한 글자도 17가지 방식으로 읽지. 우리는 글자에 집착하느라 우리말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어요. 요즘 백, 천을 온, 즈믄이라고 하는 사람 있나? 글자는 겨우 5000년 전에 생겼지만 말은 50만년 된 거요. 말 교육이 중요해요.”> - <8> 한글학회 산증인 이강로(李江魯, 1918-?)씨의 첫 우리말사전 편찬기- 2013년 대담에서 // (une Vie): 살다, 살, 산(生, 생) 삶, 살림, 사람, 생생, 생애, 평생, ..
*출처 : 다음카페 마실에서 천사흘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