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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선 홀 가족과 조선
오늘의 한국 크리스토교는 서양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와서 크리스토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선교사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 한국 선교사들의 과오를 크게 과장하여
그들의 공헌을 과소평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조선에 와서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바친 홀 박사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조선을 위해서 어떤 사랑을 실천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윌리암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은 1860년 카나다에서 출생하여
의학을 공부하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891년 조선에 와서 의료사역을 하였다.
그는 청일전쟁이후 평양에서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걸려 1895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남편 보다 1년 일찍 조선에 와서 조선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병원(현 이대부속병원)에서 일했다.
셔우드는 남편의 사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일하면서
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홀 부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이질로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셔우드 홀인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에 와서 해주 구세병원에 일하면서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결핵퇴치 사업을 벌였다.
셔우드 홀의 부인도 의사로서 함께 조선에 와서 일했다.
그러다가 1940년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추방을 당한 뒤
인도에 가서 계속 의료선교를 하였다.
셔우드 홀은 자신의 부모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묶어서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1978년 출판하였고, 이것은 동아일보사에서 출판되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초기 조선 선교사들의 신앙과 삶과 헌신을 읽을 수 있다.
본고는 셔우드 홀이 쓴 [닥터 홀의 조선회상] (서울: 동아일보사, 1978)을 중심으로
작성되었고, 본문 괄호 속의 숫자는 [닥터 홀의 조선회상]의 페이지를 뜻한다.
뉴욕 빈민선교 사역에서 싹튼 사랑 이 분야에 대한 개관으로는 Norris Magnuson, Salvation in the Slum: Evangelical Social Work 1865-1920 (Madison, NJ: The Scarecrow Press, 1977)을 참조하시오.
윌리암 제임스 홀은 18세가 되던 해, 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는 경험을 하였다.
아무런 일도 못하고 죽는 줄 알았던 홀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치유를 경험했다.
그 후 어떻게 하면 뜻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이런 그에게 고등학교 선생님은 의사가 되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권고하였다.
그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홀은 카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887년 인도지역을 위한 학생자원운동 담당자인 존 포먼목사의 권유로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카나다를 떠나 미국 뉴욕에 있는 벨레뷰 병원 의과대학으로 옮겨와서
공부를 하고, 1889년 졸업을 하고, 의사 자격을 얻었다.
의사가 된 홀은 선교사로 갈 준비를 하면서 당시 감리교가 운영하고 있던 뉴욕 메디슨가의 빈민의료사역에서 일하였다.
당시 그의 모습을 상급자였던 스톤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닥터 홀은 자기 주인 예수가 행한 것 같이
날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낫게 해 주고, 걱정을 덜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밝고 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철학적, 신학적 이론을 캐는데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상냥함과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남이 질문 동안 그는 일했다.”(63)
홀은 이곳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될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셔우드는 펜실바니아여자의과대학을 다니던 중, 인도선교의 이야기를 듣고,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 준비로서 뉴욕의 빈민의료선교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이 곳에서 두 사람은 같은 비젼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홀이 셔우드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셔우드는 망설였다.
그 이유는 셔우드는 감리교 여선교사로 지원했는데,
감리교여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취임 후 5년은 결혼할 수 없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은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약혼을 하게 되었다.
원래 두 사람은 중국선교 후보자였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선교사로 파송된 것은 셔우드였고(1890년), 그 선교지도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었다.
이때부터 홀도 조선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셔우드는 조선의 선임선교사 스크랜톤에게 자신의 약혼자를 소개하였다.
그래서 홀은1891년 말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선교사 파송식에서 홀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한 유태인은
홀을 “돈을 받지 않고, 우리를 치료해 주었으며,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는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고 감사를 표했다(69).
또한 이 자리에는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 화니 크로스비가 참석하여
홀을 위하여 찬송가를 지어 주었다. 최근 화니 크로스비에 대한 훌륭한 연구로는 Edith L. Blumhofer, Her Heart Can See: The Life and Hymns of Fanny J. Crosby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2005)가 있다.
조선여자에게 살을 떼어준 여자
한국의 의료선교는 장로교선교사 알렌이 시작하였다.
조선크리스토교의 의료선교를 위해서는 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 (서울: 아카넷, 2003)을 참고하세오.
이것이 광혜원이며, 나중에는 세브란스가 되었다.
곧 이어서 들어온 감리교선교사 스크랜톤도 병원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서양남자의사들에게 치료받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1887년 여의사 하워드가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다.
하지만 하워드는 2년 후 건강이 나빠져서 조선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오게 된 것이 바로 셔우드였다.
셔우드의 보구여관에 화상으로 손가락 셋이 붙어버린 16세의 조선소녀가 찾아왔다. 이 붙어버린 손가락 때문에 16세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간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는 큰 흉이 되었다.
셔우드는 손가락을 펴는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피부를 이식하여 흉터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의 피부를 떼려고 하였으나 환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셔우드는 자신의 피부를 떼었고,
같이 사역을 하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도 자신들의 피부를 제공하였다.
그러자 그 환자도 자신의 피부를 이식하는데 동의하였다.
이후부터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셔우드는 “조선여자를 위해서 피부를 떼어준 여자”(78)로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의 의술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스크랜턴박사는 백내장 수술을 성공했는데,
이것을 보고 조선 사람들은 “의사가 장님에게 눈을 주었다.
모든 직업 가운데 으뜸 가는 것은 의술”이라고 말하였다(78).
평양개척선교사 홀 김승태, “1994년 평양기독교인 박해사건,” [한국교회사연구], 15/16호 (1987년 8월), 19-20.
한국교회사에서 홀의 공헌은 평양의 개척선교사라는 것이다.
1892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선교연회는 홀을 평양의 개척선교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조선의 내륙지방에는 전도가 금지되었으므로
의료봉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 후 장로교의 마펫도 장로교의 평양개척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평양에 장기적으로 거주하지 못하고,
임시 처소를 마련하고 서울에서 왕래하였다.
하지만 평양사람들은 서양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홀의 통역이었던 노병선은
마을의 굿을 위해서 헌금하라는 평양사람들의 요청을 거부했기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평양은 돌팔매로 유명한 장소였다.
홀도 여기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노병선은 분하여 홀에게 불평을 하자
홀은 그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이 괴벽하뇨. 우리 주 말씀이 아이 마음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어찌 아이 마음을 본받지 아니하리요.”라고 충고하였다(454).
보다 본격적인 박해는 1894년 5월에 발생하였다. 홀은 평양에 거주하기로 작정하고, 아내인 셔우드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은 큰 논란을 야기하였다.
아직 법으로 외국인이 내륙지방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은 의료행위를 위해서 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홀은 막 태어난 자기 아들, 셔우드 홀을 평양시민을 위한 구경거리로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홀의 집에 몰려들었다.
일부에서는 홀의 평양거주를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서양을 위해서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당시 외국인은 내륙에 주택을 구입할 수 없으므로
홀은 조사 김창식의 이름으로 집을 구입하였다.
평양감사는 홀이 외국인이므로 외국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김창식을 대신 체포해서 구금하고, 구타하였다.
이 때 마펫의 조사 한석진도 함께 구금되었다.
관리는 김창식에게 크리스토교 신앙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만일 거부하면 사형이라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김창식은 거부하였다. 거의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고, 미국과 영국의 공사관이 노력하여 이들을 석방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관리는 김창식을 회유했지만 그는 크리스토를 배반할 수 없었다.
“나는 크리스토교가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크리스토교 신자로 살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전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관리들은 창식을 더욱 고문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를 석방한 후에도 사람들을 시켜서 김창식에게 돌팔매를 하도록 했다.
홀은 김창식을 “조선의 바울”이라고 부르며,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신앙인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은혜라고 말했다(115). 홀은 훌륭한 조선의 동역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 크리스토교의 역사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남긴다.
첫째는 조선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사람들은 김창식과 다른 사람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고
이제 평양감사도 선교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주를 믿는 다는 것은 때로는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닥터 홀의 죽음
1894년 여름 조선반도는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동학의 봉기와 여기에 따른 청일의 개입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아시아의 역사가
이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힘은 바로 서양의 문물에서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를 보고, 서양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토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특별히 청일전쟁의 가장 큰 격전지였던 평양에서
크리스토교가 크게 발전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크리스토교를 믿은 것은 단지 이런 외부적인 힘만이 아니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사랑의 모습이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는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일본은 승리하고, 청국은 패배하였다.
평양은 전쟁의 피해로 황폐해졌다.
전쟁을 피해 서울로 와있던 홀과 장로교선교사들은 10월 1일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홀은 즉시 부상자 치료에 나섰다.
당시 평양은 시체가 썩는 냄새로 진동했고, 위생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당시 홀의 활동에 대해서 홀이 전도한
평양최초의 신자인 오석형은 “난리가 나매 --- 의원이 착한 마음이 무궁한지라.
평양에 내려와 총에 맞아 상한 자를 많이 고치고, --- 우리를 가르쳤으며,
지금까지 몇 사람이 모이면 의원의 참 사랑과 진실한 행동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455).
이런 가운데서 홀 자신이 병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질이었으나 나중에는 발진티프스로 바뀌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인의 교통수단을 사용해서 홀을 서울로 옮겼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1월 19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24일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125).
홀 부인은 홀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하려고 했던 말은
“내가 평양에 갔던 것을 원망하지 마세요.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125)였다.
선교사들은 홀을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다.
사실 이런 홀의 헌신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893년 홀이 네 번째로 평양에 여행할 때 그는 노블선교사와 함께 갔다.
당시 평양에는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하였다.
사방에서 돌맹이가 날아왔다.
그래서 노블은 홀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물어 보았다.
홀은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기를 피하지 않겠다.”(96)고 대답하였다.
홀은 이미 평양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각오하고 있었다.
홀의 죽음은 평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크리스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다. 노병선은 홀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어떤 시골 여인이 서양의사에게는 첩을 떼는 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패물을 팔아서 사람을 보내어 그 약을 사오도록 했다.
하지만 그 약을 먹은 남편은 첩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분하여 홀에게 와서 당신의 약이 효험이 없으니 그 약값을 물어내라고 요청하였다.
깜짝 놀란 홀은 약을 전해 준 사람을 불러 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도망가고 없었다.
후에 이것을 안 홀은 이유야 어쨌건 이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으니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돈을 물어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성중사람들은 “이런 돈을 다 물어 주면 돈이 산과 같이 많아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착하다 성인 하락(홀의 한국이름)이여, 천당에 가리로다.”고 칭송하였다(454).
우리는 1866년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 사건은 해석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1894년 홀의 죽음은 토마스의 순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사람을 사랑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한 알의 썩는 밀알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 복음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홀 부인의 조선 사역
셔우드와 홀은 1892년 6월 조선에서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2년 남짓 지난 다음에 남편 홀은 세상을 떠났다.
이 기간에도 대부분 홀은 평양에 있었다.
홀부인은 혼자 조선에 남아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1892년 12월 다시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그는 임신 중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출산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잊을 수 없었다.
3년 후 1897년 11월 다시 조선에 나와 다시금 평양으로 갔다.
하지만 조선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는 또 다른 아픔을 겪어야했다.
그것은 1898년 5월 딸 에디스 마가렛트를 잃은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큰 슬픔이었다.
하지만 홀부인은 이것을 다시금 조선을 위한 사랑으로 극복했다.
홀 부인의 업적은 그의 남편을 능가한다.
그는 조선에 수많은 최초를 기록한 사람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는 조선에서 최초로 애기를 낳은 서양사람이며,
최초로 평양에서 산 서양여인이다.
그는 맹인-농아학교를 최초로 설립했고, 점자를 도입했고, 한글점자를 개발했고,
어린이 병동을 설립했고,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세웠고, 여자의학교(현 고대의대의 전신), 동대문이대병원, 인천기독병원, 인천간호전문대학등은 다 직간접으로 그와 관련이 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미국에서 “뛰어난 미국 여성”(Natable American Wome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으로 인정받았다(455).
그의 많은 사역 가운데 맹아학교를 살펴보자.
홀이 평양에 갔을 때 첫 번째 신자가 오석형이었다. 그에게는 봉래라는 맹인 딸이 있었다. 당시 맹인여성은 결혼할 수 없고, 점장이나 무당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돈이 있어야 했다.
홀부인은 맹인 봉래를 보았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맹아학교였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인이 조선아이 눈을 빼 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봉래의 아버지가 신자이기 때문에 오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래를 데리고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개발했다.
아마도 홀부부가 맹인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들이 맹인 찬송가 작가 화니 크로스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로스비는 맹인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찬송가 작사자였다.
하지만 맹인학교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홀 부인은 1898년 평양에 최초의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만들었다.
이 병원에 자신의 딸을 기념해서 에디스 마가레트 어린이 병동을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맹아학교를 만든 것이다.
홀 부인은 먼저 뉴욕 점자를 조선말에 맞게 고쳤다.
그는 점자로 조선어교재를 만들어서 봉래를 가르쳤다
. 교재는 한글 알파벳, 조지 존스여사가 지은 조선어 기도서, 십계명등이었다.
기름먹인 한지를 점자 책 용지로 사용했다.
봉래가 이렇게 조선어를 배우는 것을 보고, 다른 맹인들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조선 최초의 맹아학교가 생긴 것이다. 봉래는 이 학교의 특수교사가 되었다.
홀 부인의 이런 사랑의 사역에는 그의 깊은 아픔이 있었다.
남편과 딸을 잃은 홀 부인은 한 차례 큰 신앙의 회의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이삭, 곧 남편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딸을 데려가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남편은 자신의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고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남편 대신 더 열심히 일했다.
그는 딸을 잃었지만 더 많은 조선의 딸들을 치료해 주었고, 사랑한 것이다.
홀 부인과 에스더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낳는다.
홀 부인은 동대문병원에서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하는 똑똑한 여자, 김점동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대부분의 한국 여인들처럼 이름이 없었다.
그녀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이름은 에스더였다.
홀 부인은 에스더를 의사로 키우고 싶었다.
에스더는 원래 수술이 두려워서 의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홀 부인이 언청이 수술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홀 부인이 처음 평양에 갈 때 에스더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평양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데는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평양에 길을 열어 주신다면 그리로 갈 것이고---.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라면 내 목숨을 내어 놓겠습니다.”(97)고 대답하였다.
우선 에스더에게 급한 것은 결혼이었다.
그녀는 16세였는데, 당시의 풍습으로는 14세를 넘기면 안 된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신앙을 가진 남자들 가운데서 에스더의 남편감을 찾았다.
그래서 선발된 사람은 박유산이었는데,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태도가 부드러웠다.
박유산 역시 선교사들과 함께 동역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의 신분이 에스더 보다 낮다는 것이다.
먼저 에스더의 어머니가 반대했다.
하지만 에스더는 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반대하신다고 할지라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거나 낮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줄을 당신은 아시지 않습니까?”(99)
홀 부인은 에스더의 신앙에 감복하였다. 결국 이들은 1893년 5월 24일 결혼을 하였다.
1894년 12월 홀부인은 미국에 올 때,
에스더와 그의 남편 박유산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에스더가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 해 2월 에스더는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고,
또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은 개인교사를 고용해서 특별지도를 받았다.
이때 남편 박유신은 농장에서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마련했다.
결국 1896년 10월 에스더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 홉킨스의대)에 입학하였다.
에스더가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남편은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를 도왔다.
그러다가 그는 폐결핵에 걸렸다.
결국 그녀의 졸업을 앞두고 박유산은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그는 아내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일하다가 죽은 최초의 한국남성일지도 모른다(144).
1900년 에스더는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공부한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돌보아 준 홀 부인과 광혜여원에서 환자를 진료했다.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어려운 환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에스더 역시 남편과 같이 결핵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1910년 4월 13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홀 부인은 조선최초의 여자의사를 잃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조선인 여의사를 양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환갑을 지낸 192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워 그 꿈을 실현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고대의과대학이 되었다.
대를 잇는 사랑의 이야기: 셔우드 홀과 크리스마쓰 씰
에스더의 죽음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홀박사의 아들 셔우드 홀이었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에스더는 나에게 친 누나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얼마나 에스더를 따랐는지 모른다. [에스더가 귀국한] 7년 후 에스더가 폐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폐결핵을 저주했고, 그래서 폐결핵전문의사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와서 결핵을 퇴치하는데 앞장설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451)
셔우드 홀은 1911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고,
결혼을 해서 다시 조선에 돌아왔다. 그것은 1925년이었다. 그가 조선에 와서 일한 것은
황해도 해주구세병원이었다.
해주구세병원에서 홀은 다시금 결핵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수많은 결핵환자들이 병원을 찾지만 조선에서는 결핵을 치료할 만한 전문병원은 없었다. 그 이유는 결핵은 치료와 요양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홀은 자신의 꿈대로 결핵 요양원을 설립에 착수했다.
감리교선교부는 반대했다.
하지만 선교부의 재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받았다.
모든 모금 책임은 셔우드 홀이 책임져야 했다.
해주시에서는 결핵요양소가 들어 온다는 것을 반대했다.
요즈음 말로, 혐오시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역경을 이기고,
1928년 해주에 결핵요양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결핵전문병원인 해주구세용양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병원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결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재정도 충당하고, 교육도 시키기 위해서
셔우드 홀은 크리스마쓰 실을 제작하여 보급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거북선의 대포가 결핵을 퇴치하는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당국의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는 남대문에 총을 걸고,
결핵을 쏘는 디자인을 만들었다. 결국 허가가 나오게 되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크리스마쓰의 보급과 함께 결핵퇴치 사업도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 처음 장에 보배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의 불쌍한 소녀 보배는 결혼을 앞두고 시집 준비에 바빴다.
그런데 보배가 점점 여위어 갔다. 알고 보니 결핵이었다.
어느 봄날, 보배는 가족과 함께 남산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보배는 산에 피어있는 진달래를 꺽어다가 가슴에 앉았다.
얼마 후 가족들이 보배를 찾았을 때 보배는 붉은 진달래 꽃을 앉은 채 죽어 있었다.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이 아름다운 남산 기슭, 보배가 결핵으로 숨진 그 자리에 조선에서는 처음인 결핵 요양원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 요양원의 설립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꿈과 역량을 펼쳐 보기도 전에 생명을
강탈당하는 비극을 막는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