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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세가지 명제
(출처: 네이버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적인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즉 세가지 명제를 만족하는 삼위일체가 정확한 삼위일체가 되어지며, 이 세가지 명제가 동시에 만족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2) 각 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일한 신적본질을 공유하신다
(3)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상호 구별되며, 동시존재하시며, 서로 교류하신다
위 성경적인 세가지 명제를 그대로 정리하고 요약한 것이 곧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의 용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성경본문의 "본체"란 말은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로 원래는 "실상, 본질, 실체(confidence essence, of person)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라는 논리에서 출발한 것으로,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는 것으로서, 이 용어가 처음에는 실체를 뜻하였지만, 나중에는 삼위일체라는 용어의 “삼위”가 된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란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진 세 실체의 위격을 말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니케야회의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삼위일체의 초석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삼위일체(Trinity)는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어느 회의에서 급조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걸친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정립되고 발전되어온 성경적인 내용입니다,
정통조직신학자들의 삼위일체
그렇다면 정통조직신학자들이 정의하며 요약하는 삼위일체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정통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확실히 알기 위함입니다,
정통삼위일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 본질의 단일성과 (2) 인격의 구별성을 전제로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신성(godhead)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셋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해하여야만 본질의 동일성과 이 셋의 구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이종성박사의 삼위일체론, 81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같은 책, 333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자는 본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시지만 인격적 실체에 있어서는 그들과 다르다.(하지 조직신학 303쪽)
“I and the Father are one. - 웨슬레는 사벨리우스나 아리우스의 설을 아래와 같이 반박하였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는 본문을 웨슬레는 “are가 복수형이다” (are)는 인격의 복수를 실증함으로서 사벨리우스는 반박하는 반면에, 하나(one)는 하나님 안에 본성의 일치를 실증함으로서 아리우스를 반박한다.”(웨슬레 조직신학, 50쪽. John Wesley's Theology Today 1960. P91)
삼위일체가 동시에 언급되는 성경적인 증거
성부하나님은 성자를 파송하시고, 성령을 파송합니다. 또 성자는 성부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성령을 보내십니다. 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렇게 삼위는 상호교류를 갖으며, 동시에 공존하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은 삼위가 각각 구별되어 동시에 언급되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인격적 관계와 그 각각의 사역이 잘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For Jesus Christ(말미암아), by Spirit(의하여), to Father(께)를 의미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이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위 본문은 삼위를 말하지만, 이름은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 한 인격이시라면 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4)
윗문장은 믿는 성도들과 함께 서로 교통하는 삼위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입니다.
또 아래의 본문은 성도들과 삼위의 사역적인 관계가 각각 구별되어 있습니다.
미리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피로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벧전1:22)
양태론이란 무엇인가?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양태론을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물과 얼음과 수증기로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물이 세가지의 양태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양태론적입니다.
또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된다는 사역적인 양태론이 있는데, 이것은 대표적인 양태론이며, 또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이 되었다는 승계적인 양태론이 있습니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었던 견해로서, 양태론적인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승계론적인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 역시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양태론입니다. 예를 들어 중학교 시절의 본인과 고등학교 시절의 본인과 대학교의 시절의 본인이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없으며, 그 세 본인은 한 인격이므로 양태론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 자신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초대교회의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등이 있었으며, 캘빈과 논쟁을 하였던 세르베투스가 있었고, 신비주의자였던 스웨덴보그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등이 있었으며,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형제교회의 분파와 그들로부터 전파된 구원파교회도 양태론이며, 베뢰아 김기동목사와 그 계열들의 주장이며, 양태론도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지만, 결국 그 유형은 모두 동일하며, 결국 단일 인격의 세 양태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정통신학적인 양태론적인 개념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 삼위일체이며,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 즉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한 인격이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고 하는 견해도 양태론입니다.
양태론자 위트니스 리(지방교회)와 김기동목사(성락교회. 베뢰아)의 실제주장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6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하나님의 경륜, 16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지방교회는 언제나 자신들이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한다고 위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세 인격을 구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보면 그러한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곧 알 수 있습니다.
# 아버지, 아들, 영 가운데서 <첫째분과 마지막 분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 아버지, 아들, 영에서 마지막 분인 그 영은 삼일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시다. 하나님은 <셋이 아니시다>. 그 분은 하나이면서 셋인 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6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아예 위트니스 리는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합니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그렇다면 이제는 성락교회 김기동목사의 주장을 보겠습니다.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났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성령을 알자 88년도, 74쪽)
양태론이 명백하며, 한 인격 하나님의 세 가지의 형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며, 그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시면 본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성령받고 우리도 성령받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만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늘로 가신 다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교회 안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성경을 알자, 96쪽)
김기동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함께 공존한 하나님의 신(Spirit) 혹은 여호와의 신(Spirit)에 대해서 성령이 아니라 천사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신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108 페이지)
“구약시대에는 모두가 천사에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마귀론 61페이지)
“창세기 1장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 할 때의 그 신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65 페이지)
아예 예수님 이전에는 성령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예수를 알고 최초로 하나님을 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성령이 내주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세상에 임하셨습니다.”(마귀론 상 65쪽)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또 아버지의 뜻이 없었다면 아들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성령을 알자 46-47쪽)
이제 베뢰아의 강의 일부의 녹취록을 보겠습니다. 그의 삼위일체가 양태론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줍니다.
"베뢰아에 와서는..... 여기는 장로교도 아니교 침례교도 아니고 베뢰아 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히 일단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종이에다 그려야 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객체의 인격을 두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이 있고 예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가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가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인격, 성령의 인격, 3위의 인격이 각각 세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인격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면 인격이 각각이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지금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인격이 따로 있고 아들의 인격이 따로 있고 성령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학적으로 굉장히 무식하고, 성서적으로 굉장히 무식하고, 언어학적으로 굉장히 무식한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따로 생각하고 인격을 셋으로 만들면 큰일납니다. 아버지의 인격이 따로 있고 성령의 인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볼 때 성령의 인격, 이쪽에서 아들의 인격, 이쪽에서는 아버지의 인격, 오직 인격은 하나입니다. ……각각 보는 방향에서 다른 것같이 이쪽에서 볼 때 얼굴, 뒤쪽에서 보면 뒤통수, 옆에서 보면 볼인 것 같이 인격은 하나입니다. 지금 객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은 한 인격이십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따로 따로 되는 것이 아니고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바로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이에게 하시는 겁니다."(베뢰아 강의 9-1. 1983. 6. 25. 참고: 교회와 신앙. 최삼경목사의 베뢰아 비판 참조)
위트니스 리와 김기동목사의 주장은 양태론이 분명합니다.
지방교회와 성락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을 합니다.
캘빈의 시대에는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과 지방교회의 주장을 비교함으로, 여러분은 지방교회의 삼중적인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이 아니며 이단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메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지방교회는 세 위격을 삼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 셋이 언제나 함께 한 공간 안에만 국한되어있고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지방교회는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사역하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예수로 오셨다고 보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결국 육신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며, 죽음과 부활 후에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한 인격 안에 상호내재하는 세 인격은 실제의 구별이 아니며, 단지 개념상의 삼중적이라는 명칭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거치고 변화되는 단계와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상호내재란 삼중적인 요소이며,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인격이 아니고, 즉 양태론을 위장하기 위한 추상적인 변명일 뿐입니다.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성경이 서로 부딪히면, 성경의 권위를 더 인정하여야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양태론자들에게 아래의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입니까?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습니까?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하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양태론을 주장하게 되면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의 개념이 이상하여 집니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습니까?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입니까?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집니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입니까?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을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직접 설명하신 구절입니다. 신약에서 마22:43, 눅20:43-44. 행2:34-35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여호와와 구별되는 예수님이며, 이것을 예수님이 직접 유대인에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합니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습니까?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킵니까?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입니까?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입니까?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입니까?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합니까?
아래 성경구절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인격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면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첫댓글 또 양비론 양시론에.. 언어유희에 불과한 철학적 명제만 제시하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군요.. 성경을 통해 님의 논리를 제시해달라고 했건만... 마3장에 대한 해석적 제시는 못하시면서.. 철학만 반복하시고 아무런 권위도 되지 못하는.. 역사만 반복하시는듯 싶으시군요... 마3장을 통해... 님의 논리를 논리적으로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신있으시다고 하시면서... 어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계시된 마3장에는 님의 논리를 접목시키지 못하시는지요? 마3장 해석이 그렇게 어려우신가요?
왜 삼위일체이론이 마3장을 해석 못하는지 아시나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맞지 않고 다른 이론이기 때문에... 마3장을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것입니다.. 왜 솔직하지 못하신지 참으로 이해가 않되시는 분이십니다.. 철학책이나 사전이나 신학자들의 글들은 지금까지 충분하지 않나요? 님이 구지 않올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젠 그만 이런 글들은 내려놓고.. 말씀으로 증명하고 입증해주시길 바랍니다.. 했던말 또 하고 똑같은 말 또올리고.... 이젠 좀 그만합시다.. 더이상 진전된 논거가 없으시면... 저도 님과의 토론은 접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장로교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장로교 신학도 살짝 접한적도 있습니다만... 삼위일체론은 이미 파악이 끝난 사람입니다.. 님은 아직 삼위일체론의 언어유희에 속고 있는 것일뿐입니다.. 님의 단계는 10여년전에 이미 다 통과한 사람이랍니다.. 귀를 닫는다던지.. 모른다던지 이런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전 님이 알고 있다는 것과 주장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다 꿰뚫은 사람이랍니다.. 제가 주장드리는 것은... 님의 이론이 이해가 않된다는게 아니라.. 이해를 했기에... 이 이론이 거짓된 궤변에 불과하다고 진단을 내리는 것입니다..뭔말인지 이해가 되시겠는지요? 그래서 마3장을 통해 입증해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학자들의 엉터리 궤변만 반복하지 마시고... 말씀과 비교해서 검정을 해보시라는 것이랍니다.. 이 철학적 용어만 반복하는 삼위일체론이... 과연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역시나 님도 문법책이나 낭독하실뿐... 말씀은 전혀 해석지 못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론자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보이는 구절만 찾아다니니.. 이런 신론에 직접적인 말씀은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 거짓된 철학에 불과함을 님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소개드립니다. 꼭 깨달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행17:11 -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는 베뢰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한량없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시나요???
말씀을 해석드리지요.. 베뢰아 사람들은.. 비록 사도들이 증거해주는 말씀 조차도.. 그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증거한 증거일지라도..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과 말씀을 가지고 검정하고 재 확증해보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으로 재 확정하고 재 검정하는 것이... 오히려 칭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겠습니까? 비록 사도들의 증거일지라도 그러하거늘... 사도들에 비해 완전 유치수준에도 못미치는 신학자들의 글과 정의를 그렇게 맹신해서야 되겠는지요? 말씀으로 재확정하시길 바랍니다.. 신학이란게 말이에요.. 얼마나 조잡스럽고 유치한줄 무엇님은 아직 잘 모르고 계십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자는.. 안량한 신학에 목숨걸고 맹신하고 절대적 권위를 두지 않는답니다.. 말씀을 모르고 말씀이 분별이 않되니... 이런 신학들에 어떤 무엇을 두는 것이랍니다..
님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신학은 거시기하고.. 말씀만 신뢰한다면서.. 말씀을 완전 초등수준의 저급한 관점외에는 못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둘다 엉터리입니다.. 말씀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신학일뿐.. 말씀의 영적 깊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못되는 허접문학입니다.. 저는 왠만한 신학은 않본게 별 없답니다.. 그래서 신학이 뭔지를 누구못지 않게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학을 위에 두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깊은 생명의말씀을.. 육신적이고 초등적 껍데기적으로 밖에는 못보는 자들이나.. 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영과 생명을 만지지 못하면.. 아무
리 난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더라도.. 소경에 불과하고 귀머거리에 불과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는 법이며.. 소경이나 소경이 봤다는 것에 신비감이나 경외감이나 돌깨지는 소리를 할뿐이지.. 눈떤 자의 입장에선.. 둘다 너무나 측은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제발 좀 이러지 맙시다.. 말씀을 목숨걸고 연구하시길 모든 분들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참여하여 토론하겠다고 변론하겠다, 판단하고 비방하며 큰 소리치며 난채하는 자들중.. 이런 이들이 보이지 않음이 참으로 한탄스런 일입니다. 초급과 초등적인 말씀과 초등적인 철학은 이제 좀 그만둡시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내재적으로 삼신론을 지향하는... 삼위일체론이 무스거 정통이라고?? 웃기지도 않습니다.. 긑2천년간 마귀의 속임수에 의해 정통으로 가장된 지상 최대의 이단사상이지요.. 소경들이 분별도 없이 맹목한 마귀의 창조물이지요.. 삼신 일체 신론이지요.. 사실 룰라님이 삼위일체론자이고.. 무엇님은 가장된 삼위일체론의 언어유희에 아직 분별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 머리 세개 한 몸뚱아리 이론인 삼신론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길 전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님이 정말 삼위일체론을 발견하게 된다면.. 룰라님을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직 제대로 이 이론을 발견하질 못한 것이랍니다.
--->삼위일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하는 이론(이론이라고 하기도 어렵죠)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제한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정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신론"이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으로서 지지된 이유는 이른바 "신론"(양태론, 삼신론등)을 기반으로 등장한 이단들을 배격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교리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하기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존재의 규명을 시도하는 신론들의 허점을 반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합니다.
양태론같은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신과 성부, 성령을 구별하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지극히 비성경적입니다. 또한 양태론에 따르면 지금은 성령의 시대라며 성령 하나님을 대상으로 기도하는 괴이한 이단들도 합리화시켜 줍니다. 이는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합니다(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 기도드렸기 때문입니다.) 삼신일체론 같은 경우는 참인간이자 참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킵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으로 온갖 육신적 고통과 고뇌를 감내하신 예수그리스도가 몰각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앙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도 따라갈 필요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가는데따른 인간적 고뇌와 고통의 의미를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구태여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인데도 (신적인 부분만 강조하면) 그 의미가 퇴색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한다는 "신론"이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도 의문(결국은 성경적근거도 없이 유한한 인간의 사유로 채울 것이므로)이지만 오히려 역사를 봤을때 이단이 발호하는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나하는 점입니다.요컨대. 삼위일체가 맞다고 생각합니다.(사견)
님의 사견이라 하시니.. 저도 님의 해석적 관점을 님의 사견 정도로만 취급하겠습니다.. 당연 님의 해석에 대하여는 제 어떠한 관점으로 말씀드리면.. 몇몇은 맞는 부분도 계시지만 부족한 정보나 혹 잘못된 정보의 지식으로 말미암는 오해와 오류의 문제점이 대략 없진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님의 사견이라고 마지막에 언급하셨으니.. 저도 더이상은 님의 사견에 대하여 말씀드리진 않으려 합니다..
지적을 해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님의 말씀이 설득력있고 배울점이 있다면 충분히 수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사실 일일이 다 그렇게 하긴 쉽진 않을듯 싶어요.. 제가 위에 글쓰기로 올려드렸으니.. 참조하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만, 님께서 올리신 부분에 한해서 설명드리면.. 삼위일체론이 님께서 언급하신 잘못된 고전적 양태론을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님이 언급하신 고전적 삼신론을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삼위일체론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표현은 않맞지만 다소 긍정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는... 약간의 점수는 드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 자체가 삼신론을 내재하고 지향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론도 본질적으로는 삼신론으로써 머묻은 개가 머묻은 개를 판단할 수 없다는 오류적 모순이 있습니다.. 더불어.. 고전적 양태론이나 고전적 삼신론은 언어유희를 가미한 삼위일체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바른 신론 곧 삼위일신론으로도 반박할 수 있고.. 그들의 거짓된 정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삼위일신론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삼위일체론도 삼신론에 불과한 이론으로써.. 역시나 삼신론이나 양신론과 하등 다르지 않게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삼위일체론자이신 무엇님과.. 삼위일체론이 궁극적으로는 삼신론이라는 것을 변론하여 밝혀드리고자 했는데.. 무엇님이 정면도전을 끝까지 피하시는군요.. 저는 단계별로 변론을 진행하지.. 단계를 건너띈 토론은 서로간에 아무런 이득이 없음을 알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되게 토론에 응한다면.. 저도 진실되게 응합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영혼들을 다루신 방법이시기도 합니다.
더불어 혹 삼위일체론을 그래도 지지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신(일신론)이면서 동시에 삼신(삼신론)이시기도 하다"라던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혹은 "내가 지지하는 삼위일체론은 일신론인지 삼신론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고 나도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상 모르겠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양심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삼위일체론이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며 피를 마시는 일에 일등공신으로 활용되더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마귀에 의해 세워진 철학이기 때문에.. 결코 피를 마시고 즐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