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시와 역사가 머무는 경남 통영에서
금주에는 박물관대학 답사가 휴무였다.
마침 경주신라문화진흥원에서 마련한 경남 통영 문화답사가 있어, 봄빛 어린 길을 따라 남해의 고장 통영으로 향했다.
가끔은 계획된 쉼이 또 다른 배움의 문을 열어 주듯, 이번 길 또한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통영은 오래전부터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먼저 푸르러지는 도시였다.
한려수도의 바람이 스쳐 간 자리마다 역사와 예술의 숨결이 묻어 있고,
파도 위에 비친 햇살처럼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의 흔적이 반짝이는 곳.
이번 답사는 그 통영의 속살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안정사(安靜寺)였다.
이름부터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한 사찰, 안정사는 법화종 계통의 도량으로 전해지며, 신라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라 한다.
지금은 산자락에 조용히 깃든 아담한 절집의 모습이지만, 그 고요 속에는 천년의 시간이 눕혀져 있었다.
절 마당을 천천히 걷다 보니, 화려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깊은 품격이 느껴졌다.
사찰의 크기로 불심을 재단할 수 없듯, 도량의 가치는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정신으로 빛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과 영산회괘불도가 전해지고,
또한 금송패와도 연관이 있다는 해설을 들으며, 작은 절집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역사와 전설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는지 마음으로 더듬게 되었다.
안정사에는 우물 설화 또한 전해진다.
당동마을 벽발산 가섭암을 창건한 한 도승이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어허, 한없이 편안해지는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하여, 이 물을 **안정수(安井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전설은 사실보다 오래 남고, 물은 이름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산을 내려오며 그 安井 우물 인근의 소박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쳤는데,
어쩌면 그 한 그릇의 따뜻함 속에도 오래전 그 우물의 맑은 기운이 스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관람을 마치고 나니, 오전은 어느새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답사의 시간은 늘 그렇다.
발은 분주한데 마음은 자꾸 뒤를 돌아보고,
눈은 다음 장소를 향하는데 가슴은 방금 지나온 풍경 앞에 오래 머문다.
이어 찾은 곳은 통영의 역사적 자부심이라 할
세병관(洗兵館)이었다.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큰 규모의 건축물로,
경복궁의 전각과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위용을 나란히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공간으로서 수군을 통솔하던 상징적 장소였다.
‘세병(洗兵)’이란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병기를 씻어 두고 다시는 칼을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얼핏 장엄한 군영의 이름 같지만, 실은 그 속에 깃든 것은 승전의 환호가 아니라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었다.
돌아보면 역사는 늘 피로 쓰였지만, 사람의 바람은 언제나 평화로 귀결되었음을 이런 이름 하나가 조용히 증언해 주는 듯했다.
삼도수군통제사와 관련된 수많은 비석 앞에 서니, 통영의 바다가 단지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라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물결로 다가왔다.
이후 도착한 곳은 내 마음을 오래 붙든 장소, 청마 유치환 선생 문학관이었다.
통영기상대 아래 자리한 이 문학관은 2000년 2월 14일 개관하였으며, 유품 100여 점과 문헌자료 3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바다는 풍경이 되고, 안쪽의 문장은 파도가 되었다.
시인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공간은 언제나 그렇듯, 말보다 침묵이 더 깊고, 설명보다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청마의 시혼이 깃든 자리에서, 통영이 왜 수많은 예술인을 품어낸 도시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해설사의 설명 속에는 시인 구상, 음악가 윤이상, 시조시인 이호우 이영도남매. 시인 김춘수, 화가 이중섭 등, 그 시절 통영을 스쳐 간 문인과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 도시가 바다를 품으면 항구가 되고,
한 도시가 예술을 품으면 전설이 된다.
통영은 그 둘을 함께 지닌, 드문 도시였다.
문학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초정 김상옥 기념관 또한 뜻깊은 공간이었다.
김상옥 선생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조시인이자 서예가·서화가·수필가로, 우리 전통문학의 결을 현대적으로 곱게 이어 온 분이다.
같은 학교에서 윤이상 선생은 1년 선배, 김춘수 시인은 2년 후배였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한 학교와 한 지역이 어떻게 한 시대의 예술적 자양분이 되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유품과 서화, 자료들을 바라보며, 통영은 참으로 바다가 키운 예향(藝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답사의 마지막 무렵, 우리는 당포성지를 찾았다.
고려 고종 23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당포성은 자연석을 이용해 이중 기단을 형성한, 여말선초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축진성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곽은 말이 없지만, 그 돌 하나하나에는 당시 사람들의 절박함과 결연함이 스며 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이, 그 바다를 넘어오는 침략 앞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나라와 마을을 지켜냈는지, 성벽 위를 스치는 바람이 대신 말해 주는 듯하였다.
그렇게 하루의 답사를 마치고 다시 경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과 바다의 빛이 겹쳐질 때, 오늘 하루가 단순한 견학이 아니었음을 조용히 깨닫게 되었다.
통영은 내게 단지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불교의 고요가 머무는 곳이었고,
호국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었으며,
시와 음악과 그림이 파도처럼 살아 움직이는 예술의 도시였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떠나 풍경을 본다고 하지만,
실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스며 있는 시간의 결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정사의 고요한 뜰에서 천년의 숨결을 보았고,
세병관의 웅장한 처마 아래서 평화를 바라는 옛사람의 뜻을 들었으며,
청마와 초정의 문학관에서 한 도시가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배웠고,
당포성의 돌담 앞에서는 나라를 지키던 민초들의 묵묵한 의지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 통영의 바다는 이미 눈앞에서 멀어졌으나
그날의 바람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어떤 답사는 길 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뒤에도 마음속에서 한참 더 계속되는 법일 것이다.
이번 통영 답사는
눈으로만 보고 온 여행이 아니라,
역사를 걷고, 문학을 만나고, 예술의 숨결을 품어 온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바다를 품은 도시는 많지만,
“통영은 바다만 푸른 것이 아니라, 그 바다 위에 시를 띄우고 역사를 새긴 예향(藝鄕)이었습니다.”
.
첫댓글 통영은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고장이지요.
통영의 이모저모 잘 보았습니다.
통영은 바다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예술의 향기가 골목마다 배어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부족한 제 글에도 따뜻한 눈길로 함께해 주시니
그 여운이 더욱 깊어집니다.
늘 건강하시고, 푸른비처럼 맑고 평안한 날들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단석님의
예향의 도시, 통영 답사 잘 보았습니다.
어쩌면,
천연 고도에 사시는 경주인 다운
단석님의 글에서
<여행을 떠나 풍경을 본다고 하지만,
실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스며 있는
시간의 결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말씀 새기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시인 유치환 선생님'은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교장 선생님이었음을 자랑하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깊이 읽어주시고
또 제 글 속 문장까지 새겨 주시니
제가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예향의 도시 통영도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따뜻한 공감의 말씀을 만나니
그 여운이 더 오래 남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유치환 선생님께서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이셨다니,
그 자체가 참 귀한 인연이고
부러운 추억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리며
늘 단아한 감성과 향기로운 날들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따뜻한 봄날 남쪽나라 통영을 가고싶은 마음을 대변해주는듯 찬찬히 잘 설명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단석선배님이 조용조용 잘지내고 계심을 글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자주 지역나름의 전통의 향기와 조상의 숨결을 알려주시길 기대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고장마다 스며 있는 전통의 향기와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 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걸음 닿는 곳마다
조용히 스민 시간의 결을 담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늘 따뜻한 관심에 감사드리며,
언덕저편님께도 봄날처럼 평안하고 향기로운 나날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통영 답사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정성 가득하고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한줄한줄의 글에 고개를 숙입니다.
글을 시작하면서 "사찰의 크기로 불심을 재단할 수 없듯, 도량의 가치는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정신으로 빛나는 것"이라는 말씀에 불교를 모르는 저도 말씀을 뜻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저도 청마 유치환님을 좋아해서
지난날 통영 문학관을 가파른 계단 올라 몇차례 찾은 기억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수필방을 찾다보니
단석님께서 대선배님인줄도 몰랐지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정성 어린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과분하게 읽어주시고 마음까지 헤아려 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사찰의 크기로 불심을 재단할 수 없듯…” 그 뜻을 함께 공감해 주셔서 더욱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도량의 가치는 결국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정신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을 좋아하셔서 통영 문학관을 여러 차례 찾으셨다니, 그 말씀만으로도 통영의 바다와 문향이 함께 느껴집니다.
대선배라는 말씀은 과분합니다.
저 또한 늘 배우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따뜻한 마음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말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예전에 통영에 가면 장군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라 그런지 왠지
든든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말씀처럼 삼박자가 다 갖추어진 곳이고
중학 수학여행 때 들런 곳이라
더 그런 느낌이 들었나보구나..
단석님 글 읽으며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글에 언급된 분들 중에 제 젊을 때
청마 유치환 선생을 많이 좋아했고
교과서에서 배운 이호우 시인의
'봄비'란 시의 첫 구절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고운 댓글 감사합니다.
통영은 말씀처럼 늘 든든한 기운이 감도는 고장이지요.
충무공의 얼과 예향의 숨결이 함께 서린 곳이라
찾을 때마다 마음이 괜히 깊어집니다.
중학 시절 수학여행의 추억까지 겹쳐 있으니
더 각별하게 남아 있으셨겠지요.
청마를 좋아하셨다는 말씀도 반갑고,
이호우 시인의 「봄비」 첫 구절까지 떠올려 주시니
댓글이 한 편의 시처럼 제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고운 공감, 깊이 감사드립니다.
딘삭님이 쓰신 통영 방문 글 귀절마다
숭고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어서
자꾸만 읽어 보게 됩니다 .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은것이지요 .
감사 합니다 .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에 오래 전에 가 본 적 있습니다.
명성에 걸맞는 아름다운 풍경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단석님의 또 다른 시각으로 보신 통영에 대한 글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