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본문 주해)
1~4절 : 구약의 제사장 역할은 율법으로 심판을 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혹된 백성들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무식’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을 말하고, ‘미혹’이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치 못함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사장은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들을 용납할 수가 있다. 제사장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장은 아무나 될 수 없고,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존귀한 자이다.
5~9절 : 하나님의 택하심과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시편을 인용하여 증거 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110:4)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7절)는 십자가 죽으심의 두려움과 고통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속을 위한 간구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순종이며 고난이다. 그 순종의 완성이 십자가의 죽으심인 것이다.
이로써 여호와를 경외하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10~11절 :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대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갑자기 나타나 축복을 한다.(창14:14~24)
이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원하여 나타난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믿는 자의 조상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이다. 아브람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가 나타나서 일방적으로 축복을 하는 이런 방식의 제사장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성경이 그 이후로 계속 침묵을 한다.
모세가 율법을 받고 율법에 의하여 제사제도를 수립하고 제사장 제도를 말하는 그 수많은 제사제도 속에서 단 한번도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다윗에 이르러 시편에서 멜기세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110:4)
다윗이 이 시편에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 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에 대하여 예언함으로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중간에 있는 율법과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영원한 제사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그 기능상으로는 영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될 수는 있으나,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나타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은 흔들리지 않는다.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늘 흔들리고 항상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어린아이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12~14절 : 그러므로 젖을 먹는 자란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는 수준을 가리키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것이 젖을 먹는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로의 성장이라는 것이다.
이 장성한 자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직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을 아는 자들이다.
(나의 묵상)
오늘 멜기세덱의 반차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니 참 기쁘다.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지각을 사용함으로 주님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된 것, 즉 조금 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기쁨이랄까.....?
예수님은 레위지파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서열, 계열)를 따라 오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흠 있고 연약하고 죽음으로 인해 계속 바뀔 수밖에 없는 제사장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계열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치해 주신 대제사장, 즉 인간의 족보가 아니라 신적인 탄생을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인간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서 세상 물결에 흘러 떠내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받는 여러 가지 고난으로 인해 영적으로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지만,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온전하고 완전하며 영원하신 대제사장-가 부족하여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어떨까 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흐른 세월로 본다면(그들은 AD 60년대를 살고 있었으니 예수님 공생애 30여 년을 뺀다면 최대 30년의 믿음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벌써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젖이나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그들의 신앙 상태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가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나고,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 성장은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닌 햇수가 10년... 20년...이 되어가고, 집사, 권사, 장로 등 직분도 받게 되고, 교회의 일까지 맡아 제법 잘 처리하게 되니 믿음이 성장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은 교회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그 공동체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아가며, 예수님께 더 잘 붙어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복음을 모르고 지낸 30여 년의 세월 동안, 나 스스로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각종 예배나 성경공부모임이나 기도회 등에 빠지지 않았고, 때에 맞는 직분도 받았으며, 헌금생활도 열심히 했고, 퇴직 후 자비량 선교사로 아프리카에서 3년의 세월을 주님을 위해 드리겠다고 나섰으니 이런 나의 믿음의 성장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앙꼬 없는 진빵’이었다.
성경 전체가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정작 너무도 무식했으니, 30년을 그저 변죽만 울려대는 자였던 것이다.
복음 생명 캠프를 통해 창세전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고,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는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매일 말씀 묵상의 자리에서 성령님께서 영생의 복음에 대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조금씩 더 깊이 가르쳐주시고, 일깨워 주셨다. 내 작은 눈은 점점 더 크게 떠지니 나의 죄인됨에 절망한다. 그러나 그 죄를 다 덮고도 남는 주님의 보혈에 감격하여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가 날마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달려가니,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된다.
세상에서는 장성할수록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을 나타내보이고 그것을 자랑하며 또 칭찬한다.
복음을 몰랐을 때 이러한 세상 사고방식을 믿음의 세계에서도 적용하였다.
믿음이 좋은 자라면 세상에서도 보란 듯이 성공을 이루어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지나갔고(나의 구원은 이미 이루었고), 이제 내가 나서서 어떤 일을 행함으로 주님께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언뜻 기특한 생각 같지만, 그것은 철저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주님을 알면 알수록, 말씀을 알면 알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꼭꼭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니,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욱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독립에 박수를 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그 독립의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아들에게 있다.
나는 그 아들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 아들은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분이시니 온전하고 완전하며 영원하신 나의 대제사장이 되신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에 대해 여러 가지 말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예수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7장에서 다시 주님을 묵상할 때 더 깊이 알게 되는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복음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2:1)는 말씀을 명심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Fix your thoughts on Jesus’(3:1)는 말씀을 명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저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속에 거하니
날마다 주님을 향한 새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이 새노래를 부를 때
성령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