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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울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茶泉김환기
조선시대 서소문은 용산 마포와 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나가는 한양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칠패시장이 번성했다. ‘서소문 밖 만초천변 민생이 어지럽던 조선 후기에는 실학·서학·동학 등 새로운 사상·종교가 일어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도 끊이지 않았다.
1811년에는 민중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 목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 걸렸다. 이곳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치명(斬首致命)을 당했다. 한국 교회의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서소문 순교자들이다.
지난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감동적인 기도를 올렸다.
이곳은 동학(천도교)에도 중요한 성지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이 서소문 밖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1898년 서소문 감옥에서 재판을 받은 뒤 순교했다. 동학 농민군의 3대 지도자 김개남이 전주에서 참형된 뒤
머리만 압송돼 효수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에 반대해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의병으로 활동한 것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서소문 근린공원이 돼 있는 서소문 밖의 슬픈 역사다. 그런데 이런 서소문공원이 요즘 종교 갈등의 중심에 섰다고 한다.
천주교가 이곳에 자신들의 순교성지를 만들기 위한 사업을 과도하게 밀어붙인 탓이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범국민대책위원회까지
꾸려져 천주교의 ‘땅뺏기’라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서학 천주교, 동학 천도교, 민족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공원이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본다. 정부와 서울시, 중구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특정 종교에 치우치면 곤란하다. 서소문에서 종교 간
평화와 상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마침 올해가 천주교 전래 230주년, 동학농민운동 1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 경향신문 (2014.11.22) -
[왜냐면] 서소문 천주교 성지화는 중지되어야 한다 / 이이화
요즈음 전해지는 소식을 들으니 서울 서소문 일대에 천주교 성지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곧 국가와 서울시와 서울 중구청에서 총 51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서소문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지하에 성당을 세우고
천주교 순교성인을 위한 기념전시관을 건립하며 도보 순례길을 만든다고 한다. 이 계획은 천주교 교황 프란치스코
서울 방문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나고 황사영이 순교한 곳에 성역화를 시도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역사를 사랑하는 학자로서, 양식을 지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아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번 돌아보기로 하자.
서울의 서대문 일대는 조선시대 풍수설에 따라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고 하여 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으며 감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첫째 충신으로 꼽는 성삼문과 개혁사상을 외친 허균 등이
이 언저리에서 처형되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안교선, 최재호 등이 효시(梟示)된 곳이었으며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이 처형되어 한때 묻힌 곳이기도 하였다. 황사영의 순교도 그런 사례에 하나일 뿐이다.
또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처형을 당한 서대문 감옥이라 불리는 서울형무소도 이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서소문 일대는 명백한 민족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역사유적을 보존해야 할 의미도 있을 것이다.
또 민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터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특정 종교의 성지로만 조성해야 한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에는 명백하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불교든 국민 누구나 믿고 전도할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특정 종교를 국교로 하거나 편향된 종교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는 항의도 담고 있다.
한때 기독교를 국교로 하자는 주장이 일었을 때도 말할 나위도 없이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꾸지람이 따랐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유재산을 불법으로 사용하게 편법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사항이다.
천주교 순교자 황사영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천주교 탄압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에 백서(帛書)를 써서 함대를 파견해달라는 비밀 편지를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했다. 그는 천주교 처지에서 보면 분명히 순교자일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순교자이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순교자들도 이 범주에 들 것이다. 당연히 천주교 교단에서는 이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기릴 수
있지만 모든 국민에게 강요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그러니 특정 종교만을 위하거나 강요하는 일은 헌법 위반이요, 민족사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대구 관덕정에 천주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였을 때 말썽을 빚은 적이 있었다. 이곳은 천주교도가 순교한 곳이면서
동학의 1대 교조 최제우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사례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또 교황이 방한하였을 때 행사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벌인 일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양식 있는 천주교
교도들이 이를 반성하는 목소리도 있어 왔다.
참으로 민주가치의 기본인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소문 천주교 성역화 계획은 중지되어야 하며
정부 당국과 천주교에서도 반성의 계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면 현대 한국은 특정 종교만을 강요하는 중세 사회가
아니며 민주국가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민족사를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야 한다. 이 일로 하여 종교간의 불신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다른 종교와의 화해와 공존을 위해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한겨례신문-
무늬만 역사기념 공원, 특정 종교의 시설은 재고되어야 한다
채길순 / 소설가,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교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연초부터 각종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한 해 동안 여러 사업들이 기획되어
지역 곳곳에서 많은 관련 행사가 열려 전날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어떤 행사는 보수단체나 기관에 의해 계획 단계부터 밀고 당기다 흐지부지된 사업도 있었다.
불편하지만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종교의 역사공원 조성은 심각한 역사 왜곡
이런 중에 심기 불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서소문 밖 역사기념 및 보전사업”이 514억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되어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한 복판인 중구 의주로 2가 16-4 번지로, 국유지(공원면적의 94%)의 무상사용 허가로, 예산 문제를 보면 사실상 국가사업인
셈이다. 2013년 2월 8일 김현기 외 607명이 서명하여 제출한 ‘서소문 역사공원 조성에 관한 청원’을 ‘6월 25일 제3차 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채택하여 본회의에 부의하였다’고 되어 있어서 사업이 시행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서소문 밖의 길거리는 참수형을 집행하는 행형지로, 천주교 박해 시기에는 많은 신도들이 참형을 당한 역사적인 장소이며,
천주교 박해는 조선후기 민중들이 성리학 중심의 지배이념과 사회질서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사상을 요구하여
나타난 사건으로 특정 종교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조선후기 사상계의 일대 변화를 주도한 한국 근현대사 발전에 기여한
사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서소문 밖 거리에 남겨진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새롭게 하기 위한
장소로 서소문공원을 재조성하기 위하여 특위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많은 의문이 따른다. 역사적 고찰 과정에서 ‘조선 시대의 행형지’라면서 조선시대의 역사, 특히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역사기념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순교 성지 관련 시설 건립에 필요한 예산 확보”와 같은 구체적인 용어를 써서 특정 종교의 배경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역사 보전은 보편타당한 역사 해석으로부터
역사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서소문 밖은 어떤 장소인가? 역사의 시계를 조선 초로 되돌려보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처형된 곳이고, 1811년에 홍경래가, 1871년에는 영해 문경 등지에서 동학 교조신원운동을 벌였던
이필제가 처형된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5년에는 황해도 해주의 동학두령 성재식 최재호, 경기 대접주 안교선
등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동학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이 처형되었다. 이들이 효수된 장소는 서소문 밖
(칠패시장) 부근이다. 특히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김개남의 머리를 내걸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당시 이 광경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독일인 비숍이 지은 『한국과 이웃나라』를 보면 비감(悲感)을 넘어 모골이 송연해진다.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교주의 머리(김개남)가 충성스런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 대처럼 나무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 두 얼굴 모두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곳에 고장 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들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천주교 신자 박해 사건만을 내세우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더욱이 이를 근거로 역사공원을 조성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갈등과 분쟁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널리 아는 대로 조선 말기는 삼정문란의 시대로, 민중의 핍박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투쟁의 역사는 공유하고 함께 기려서
보편타당한 역사적 가치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현재 진행되는 특정 종교의 역사 기념 공원화 추진은 재검토 되어야 한다.
역사에 대한 분별력도 없이 역사공원조성 계획을 내세우고, 특히 국회의원과 같은 실력자(?)들을 앞세워 여론몰이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고 동조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는 앞으로 종교간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서소문 성지, "천주교에 너무 치우쳐" 서소문역사공원 대책위, "민족사 현장" / 가톨릭뉴스 (12.3)
천주교가 서울 시내 대표적 순교성지 중 하나로 성지 개발을 추진 중인 ‘서소문’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지난 11월 4일 발족한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 대책위원회’의 정갑선 실행위원장은 12월 3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전화 통화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 중구청이 진행하는 것은 천주교 순교 성지화에
너무 치우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천주교 성인을 추모하는 것은 좋지만, (서소문은) 사육신을 비롯해 홍경래, 근대사에 들어오면
동학혁명의 지도자들도 수난을 당했던 장소”라며 “국민의 혈세로 그런 장소를 천주교 순교성지로 조성하는 것은
너무 종교 편향적이지 않은가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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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공원의 ‘성지화’는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재선된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관광사업 가운데 하나다. 이미 중구청은 2012년 1월 9일 내놓은 보도자료 제목에서 “서소문공원 성지화로
세계적 관광지 만든다”고 했으며, 2012년 6월 18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는 “새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해
서소문공원을 2015년까지 인근의 서울역 국제컨벤션센터 조성과 연계해 세계적 천주교 성지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정갑선 위원장은 서소문이 천주교뿐만 아니라 동학과 민족역사를 아우르는 역사공원이 돼야 한다는 것이
대책위의 의견이라며, “굳이 서소문을 역사공원으로 만든다면, 한국의 역사, 근대사를 정확히 재정립해서
반듯한 역사공원을 만들어 후손에게 남겨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곳의 공식 명칭은 "서소문 역사공원"이지만 공원 한가운데 천주교의 커다란 순교자현양탑이 자리잡고 있다.
한편 정 위원장은 몇몇 언론이 대책위에 대해 ‘천도교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을 쓴 데 대해
“종교간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은 우리도 대단히 걱정하는 사항”이라며, “(대책위에는) 역사학자, 스님도 있고,
사회단체들도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 대책위원회는 11월 16일 발표한 성명에서
“서소문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라면서
“민족의 사적지이자, 국민들의 역사공원을 천주교만의 성역으로 개발하는 것은 철회돼야 한다”고 했다.
또 대책위는 “(서소문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홍경래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또한 동학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수급이 효시되었고,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순국순도-순교 직전
한 달여 옥에 갇혀 온갖 고문과 고통 속에 재판받던 곳으로서 동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학의 성지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 서울로 호송되는 전봉준 (사진 제공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한국 콘텐츠진흥원이 제공하는 웹사이트 문화콘텐츠닷컴의 ‘최시형 순교 터’에 따르면,
동학 제2세 교조로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최시형은 1898년 관군에 붙잡혀 서소문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서소문 밖’ 항목에 따르면 천주교 순교 사적지인 이곳에는 한국의 103위 성인 중 44명이 순교한 곳이다.
서울대교구 약현성당 근처로 중구 칠패로(옛 의주로)에 있다. 현재 세워져 있는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은 1999년 축성됐다.
지난 8월 16일 시복된 124위 중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강완숙(골롬바) 등 25위이며,
광화문 시복미사에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자 현양탑 앞을 방문하고 기도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뉴스포커스] “서소문공원 천주교성역화 중단하라”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65602
▲ 16일 출범한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정부와 서울 중구청이 추진하는 ‘서소문밖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에 관해 특정종단 특혜의혹을 제기하며 사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범대위
교황방한 뒤 성역화 경계
타종교 역사 지우면 안 돼
아우르는 역사공원 바람직중구청
1동 1명소 프로젝트 일환
특정종단만 위한 사업 아냐
종교적 성격 일부 가미한 것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서울 중구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서소문밖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 특정종단 성역화 사업이라는 지적과 함께 심각한 역사왜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가 순교한 곳이자, 2014년 8월 시복된 124위 가운데 27위가 순교한 곳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는 오래 전부터 서소문공원의 단독 성지화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 형장이었던 서소문은 사육식(성삼문 등)을 비롯한 홍경래, 전봉준 등이 처형된 장소이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수급이 효시된 곳이다.
조선시대의 사형장이자 한국근현대사의 수난과 아픔을 간직한 서소문공원 일대를 세계적 역사공원 및 순교성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대대적인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이 국유지인 서소문공원에서 사업이 가능토록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유지 관리 사무를 서울 중구청장에게 위임하고 사업비 50%를 국비로 보조할 예정이다. 서울시도 시비 30%를 지원, 각종 행정적 절차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지난 16일 출범한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는 “현 정부가 서소문공원을 천주교성지로 만들려하고 있다. 이는 심각한 역사왜곡이다”며 “이번 사업에 막대한 국민의 혈세(520여억 원)가 들어갈 예정이다. 특정종단의 성역화사업은 반드시 철회하고, 한국 역사의 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민족의 성지로 다시 거듭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범대위에 따르면 한국천주교에서 순교자로 인정받는 황사영은 조선을 청나라로 편입시키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 정벌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소문에서 처형됐다. 이에 대해 범대위는 “천주교에선 순교라고 강변할지 몰라도 국민 입장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바친 친일매국노와 다를 바 없다”며 “특정종단만의 사업은 중단돼야 한다. 천주교, 천도교, 민족역사사적지 등 국민이 인정하고 함께할 수 있는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천주교 성역화 사업의 추진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창익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불교평론이 지난 9월 개최한 ‘열린 논단’에서 한국 천주교가 전국 곳곳에서 추진하는 성역화 사업을 거론하면서 “이 땅에 새겨진 타종교의 흔적에 천주교의 순교사를 ‘덮어쓰기’한 전력을 갖고 있다”며 “우리는 교황의 방한 뒤에 감추어진 이러한 이율배반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어 그는 “‘나의 역사 만들기’가 ‘남의 역사 지우기’라는 것을, ‘나의 성지 만들기’가 ‘남의 성지 지우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서울 중구 서소문역사공원 전경. |
◆서울 중구 “세금으로 특정종단 지원 못해”
서소문공원의 순교성지가 교황 방문의 계기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과 강복 기도 등으로 서소문 성지는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천주교 순례지’로 거듭나게 됐다. 이곳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재로 서소문의 천주교 순교자 44명이 시성(성인으로 추앙하는 것)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30년 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고, 서소문의 천주교 순교자 27명이 시복(복자로 추앙하는 것)됐다. 현재 서소문 공원 현양탑에는 순교 성인 44명과 ‘하느님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2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에 서울 중구는 적극적으로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구는 동마다 꼭 찾아야 하는 명소 1경을 만드는 ‘1동 1명소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서소문 순교성지를 기념하는 서소문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다.
서울 중구 도시관리국 도심재생과 김기헌 담당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문제를 제기한 분들이 서소문 사업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국민의 세금으로 특정종단의 성지를 만들 수 없다”고 특혜 의혹을 일축했다. 이어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발현과 탄압이 한국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주었기에, 그 사상을 일깨운 역사적 인물들을 추모하고 정신적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순교성지와 연계된 부분에 대해선 “세계 천주교 신자가 12억 명에 달해 향후 1600만 외국인 관광객 유치와 서울의 경쟁력 향상이라는 목표 실현을 위해 이 사업에 종교적 성격을 가미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 호도해선 안돼… “역사왜곡 바로잡겠다”
▲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대위 정갑선 실행위원장 |
일부에서는 순교성지로서의 의미를 필요이상으로 강조할 경우 특정종교에 치우쳐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이 점차 커지고 있다.
서소문공원 범대위 정갑선 실행위원장은 “역사적인 사실을 (서로 논의하고) 조명해서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그런데 편향된 행정을 하거나 특정종단과 사업을 연계한다면 국민이 호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사업에 대한 문제점과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데 목소리를 알려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느 종단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뜻을 같이하는 역사학자와 단체 등과 연대하겠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정부와 국민이 바로 잡아 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서소문공원은 분수대와 정자, 궁도장, 게이트볼장, 체력단련장 등이 있으며 시계탑과 기념비, 조각작품 등이 설치돼 있다. 본래는 서문 밖 순교지로 불리는 천주교 성지였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됐다. 이 중 44명이 성인이 돼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 자리를 잡았다. 공원의 명물은 천주교기념탑이다.
2014-9-18 불교신문 -
한국천주교 국토 성지화 욕망, 어제 오늘 일 아니다
이창익 한림대 HK연구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서 주장
성지화, 명소화는 관광으로 위장된 종교의 ‘흔적 남기기’와 ‘힘겨루기’의 현장입니다.
서소문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성인가운데 44위가 순교한 곳이자, 2014년 8월 시복된 124 위 가운데
27위가 순교한 곳입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서소문 공원의 단독 성지화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형장이었던 서소문은 전봉준, 홍경래 등이 처형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역사 만들기’가 ‘남의 역사 지우기’라는 것을, ‘나의 성지 만들기’가 ‘
남의 성지 지우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한국천주교의 ‘국토 성지화 욕망’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일례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 성지’는
천주교 수원교구의 주도로 10년 계획의 ‘천진암 대성당’를 공사를 진행중입니다. 천진암은 조선 시대의 암자로
과거에 박해를 피해 찾아온 천주교 신자들에 피난처를 제공했다가 그 여파로 불탄 곳입니다. 불교 일각에서는 교황의
이번 방한에서 천주교 전래 초기에 불교가 준 도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섭섭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보호했던 불교 암자에 천주교 성지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진풍경’, 아니 ‘살풍경’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대구 관덕정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인 ‘관덕정 순교기념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처럼 한국천주교의 성지화 작업은 땅에 새겨진 타종교의 흔적에 천주교의 순교사를 ‘덮어쓰기’한 전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
리는 교황의 방한 뒤에 감추어진 이러한 이율배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
순교자 기념은 잘 하는데, 순교는 언제 하려는고? /한겨례 2013.7.7
서소문과 새남터 성지를 단장할 때 우리가 사육신을 기념하는 비석 하나라도 세우고,
전봉준 장군의 동상 하나 정도는 함께 모시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250여 년 전, 사육신들이 능지처참을 당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교황 방문과 서소문 공원 / 법보신문
김형규 kimh@beopbo.com
서소문공원 순교성지화 추진은 국민정서 반한 가톨릭의 독선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부정선거 의혹에 휘말렸다.
검찰 조사결과 국가기관이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이 사실로 확인됐다.
이런 박근혜 정부를 가장 강력하게 성토한 곳이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시국미사를 열어 철저한 조사는 물론 대통령 퇴진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 방한이 무르익자 정부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세월호 참사에도, 친일을 찬양하고 논문을 표절하는 등 함량미달의 총리 및 장관 후보들로 나라전체가 들끓어도 유독 가톨릭은 잠잠하다.
교황은 과거에도 두 번이나 한국을 다녀갔다.
군사정권이던 전두환과 노태우 때였다.
당시를 군부독재의 정당성 홍보에 종교가 이용된 사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교황 방한이 박근혜 정부의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우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구심이 이는 이유다.
가톨릭에 대해서도 침묵의 대가로 정부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확장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교황 방한을 계기로 추진되고 있는 서소문 역사공원의 가톨릭 순교성지 추진은 납득하기 힘들다.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 총사업비 513억 원 규모의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설계공모까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의 주장처럼 서소문 공원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 동안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장소다. 홍경래와 전봉준 같은 백성과 나라를 위해 숨진 숱한 의인들이 유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인 곳에 단순히 가톨릭 신자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나서서 가톨릭 순교성지 조성에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이곳에서 처형된 대표적인 인물 황사영은 조선을 청나라로 편입시키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 정벌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인물이다. 가톨릭에선 순교라고 강변할지 몰라도 국민들 입장에서 일본에 나라를 바친 친일매국노와 전혀 다를바 없다.
한국 가톨릭은 권력과 불의에 항의해 온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그 기억들이 퇴색되고 있다. 가톨릭이 점차 정치 권력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서소문 근린공원이 역사 공원이자 순교 성지로 탈바꿈할 밑그림이 그려졌다. 서울시 중구(구청장 최창식)는 올 해 2월 27일부터 6월 27일까지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를 진행했다. 국내 건축사 대상 공개경쟁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설계공모에는 총 296개 팀이 참가 신청을 했으며, 79개 팀이 작품을 제출했다. 심사위원회는 지난 6월 30일 입상작 7점과 입선작 8점을 최종 선정했다. 실시설계권이 주어지는 당선작에는 인터커드(대표 윤승현) 컨소시엄의 ‘En-City’가 선정되었다. 서소문공원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조선 후기 44명의 성인이 순교한 성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크게 주목받던 곳은 아니다. 따라서 이번 설계공모의 목표는 기존의 근린공원을 역사 공원화하는 동시에 기념 성당과 전시관, 광장 등의 종교 시설을 마련하여 성지라는 장소의 의미를 사회적으로도 공고히 하는 작업이다.
이번 설계공모는 과정과 형식면에서 한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보인다. 우선 공개심사를 통해 소통에 열린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다. 설계공모 운영위원회는 7팀의 최종 결선작을 선정한 후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심사 과정 중 일부를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유도하고 설계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 공모로 진행된 점도 의미가 있다. 그간 해외 디자이너가 설계해 장소의 맥락이나 역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독특한 형태만 남았다는 논란에 휩싸인 공공 공간이 많았다. 물론 이는 단순히 외국 작가가 설계를 맡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설계자가 대상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조차 마련되지 못했다거나, 스타 건축가의 참여가 몰고 올 세간의 관심과 브랜드 효과에만 연연한 주최 측의 탓도 크다. 그에 비해 이번 공모는 최대한 많은 국내 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서소문 밖’의 역사적 의미와 도시적 조건
설계공모의 대상지가 자리한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조선 시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외래 문물이 유입되는 경로였다. 이곳에는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동측은 중국으로 통하던 육상 교통로인 의주로에 접하고 있어 도성 밖의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또한 조선 시대 국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서소문 밖 형장’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형장의 위치는 지금은 복개된 만초천변과 서소문 밖 네거리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홍경래의 난,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등 국사범들이 주로 참형되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이 이 형장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새남터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밖은 평신도들의 순교터였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1년) 40위,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41위가 순교했으며, 병인박해(1866년 이후)에도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해, 세계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주목받고 있다(이곳에서만 1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했고, 이중 44위가 성인이 되었다).
1891년 박해가 끝나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서소문 성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인근 언덕에 약현성당(1892년, 사적 제252호)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로마네스크, 고딕 혼합식 건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서소문이 철거(1914)되고, 경의선(1920)이 지나가고, 북쪽의 서소문로를 따라서는 고가 차도(1966)가 놓인다. 또한 고층 건물에 둘러싸이면서 이 대지는 점차 도시적 맥락에서 고립된 섬이 되어간다. 이렇게 뚜렷한 장소의 특색이 없는 가운데 1976년 서소문공원이 개원하고, 지하에는 쓰레기 처리장(1999), 공용 주차장, 꽃 도매상이 들어서는 등 이후로도 많은 것들이 덧붙여졌다. 그 결과 현재 서소문공원은 철도의 소음과 쓰레기 처리장의 악취가 뒤섞여 있는 열악한 환경의 공원이 되었다. 이곳이 성지임을 알리는 표지는 순교자를 기리는 현양탑(1984, 1999)이 유일하다.
‘서소문 밖’의 성지화 배경
이렇듯 현재의 서소문공원은 인근의 상인들이나 주민, 노숙자들이 찾는 근린공원으로 역할하고 있지만 성지에 걸맞는 천주교 행사를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 설계공모는 3년 전 서울대교구가 중구청에 제안하면서 시작된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서소문공원의 성지화는 기초 지방자치단체인 구청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로, ‘관광자원화사업’의 형식을 빌어 사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법적인 요건을 갖추게 된다. 이를 통해 국비와 시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울성곽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 600년 성곽도시 서울의 재발견 사업 및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지난 해 선포한 서울의 도보성지 순례길과 연계할 예정이다. 더불어 기념 성당과 전시장 같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 본래 근린공원이었던 설계 대상지를 역사 공원(2014.02.06)으로 도시계획시설 변경을 진행하는 등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쳤다. 공공 공간에 성당을 짓는 일은, 이곳이 기존 사회 체제의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특정 종교를 위한 공간이라는 오해와 비난을 피해야 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당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성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성’과 ‘속’의 공존
이런 복잡한 땅의 상황과 기능적 요구, 그리고 사업의 진행 배경 때문에 설계지침은 일견 모순된 혹은 함께하기 어려운 요소의 공존을 주문하게 된다. “모든 순교 기념 공간은 역사 공원과 함께 공공에게 열린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성지로서 엄숙함과 경건함을 표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든 순교 기념 공간은 외부 방문자들과 인근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가운데 성스러운 경험을 일상화시키는 기제로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 공간과 일상적인 공원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이번 공모전 심사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러한 설계지침은 대부분의 참여자들에게 무거운 숙제로 다가섰음이 분명하다. 천주교 박해와 순교는 150년 이상 지난,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은, 이미 ‘기억’이 아니라 ‘역사’화된 죽음이다. 따라서 설계자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와 우연하게 방문한 비신자 모두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체험하고 추모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인가가 주요 과제가 되었을 터다.
이 균형추는 한쪽으로 쏠리기 마련인데, 7개의 입상작 중 일부는 탑이나 메모리얼 등과 빛의 제어를 통해, 또 지상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걷기(순례)를 통해 추모의 과정을 공간적 경험으로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또 한편의 작품들은 강력한 오브제 없이 지형의 높낮이를 섬세하게 조직하거나 공원을 비워내는 전략을 취하기도 했다.
당선작인 ‘En-City: Engraving the Park’는 지하로 파고들어간 사각형의 두 개의 광장과 그 광장에 다다르는 동선을 추모의 여정으로 계획했다. 이 여정의 정점은 지하 37m 아래 자리 잡은 보이드void 공간(광장)이다. 공개심사에서 설계자는 이 광장이, 한 사람 혹은 서너 명의 사람이 침묵 속에서 그 공간을 둘러싼 벽의 존재와 함께 그 위의 하늘을 만나는 공간으로 구현되었으면 한다는 의도를 밝혔다. 반면 심사위원회는 “현재의 설계안은 지상과 지하의 연결이 너무 좁고 작아서, 앞으로 시민들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지하의 공간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발전시켜, 이를 통해 지상(시민들의 일상)과 지하(성지의 기념성)가 유기적으로 일체화되었으면 한다”는 보완 의견을 밝혔다.
한편 2등작인 ‘Memorial Wall: 추모의 벽, 역사의 현장을 기억하다’는 공원을 둘러싼 ‘경계(추모의 벽)’를 강화해 공원을 ‘분리(고립)’시켜 내부의 체험을 강화하는 색다른 전략을 취한다. 설계자는 로마의 광장처럼 중앙은 비어있으나 기실 건축물에 의해 빈틈없이 둘러싸이고 위요되어 있는 공간의 경험을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여러 안들이 도시와 자연스럽게 접하려고 했던 점과 비교해서 독특한 해결 방식이다. 기존의 경계가 도시와 단절되어 있고, 그러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할 수 없다면, 오히려 경계를 강화하는 접근이 가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공원 전체가 종교 건축물처럼 보일 수 있”어, 드러나지 않는 성당을 원하는 주최 측의 의도에 부합하기는 어려운 안이다.
3등작 가운데 하나인 ‘가시加時’는 ‘철제 구조물’을 건축 공간의 중정에 배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구조물은 지상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가, 지하로 내려가면서 실내외에서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안에 대한 시각은 확연하게 구분되는데, 가시 구조물이 성지를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심사평에서는 이 구조물이 “구조나 기능과 관계없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반면 단순하지만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제시하여 전체 대지에 유연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작으로 선정된 안 중 ‘Groundscape: 땅의 풍경'은 매우 섬세한 조경 처리와 도시 공간의 조직은 무척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았지만, 종교 시설이 너무 미미하고 재활용센터의 진입부와 주차 램프를 함께 이용하여 이 두 시설의 존치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역시 가작인 ‘홍예: 빛의 숲’은 서양식 건물인 약현성당과 서소문의 공통적 구조인 홍예 즉 아치arch를 기본 구조로 설정하여 지상과 지하를 매개하는 지붕 구조를 만들었다. 지하에 계획된 건축 공간의 아치 형태가 지상면의 굴곡으로 드러나면서, 이곳에 뚫린 창을 통해 밤에는 지상으로 낮에는 지하로 빛이 쏟아지는 아이디어이다. 결국 지상으로 드러난 구조물은 없는 셈이다. 복잡한 대지의 상황 속에서 입면이나 오브제를 만들기보다는 도시의 레벨에 지형을 맞추고, 빛으로 상징성을 확보하려는 생각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반면 심사위원회는 “지상과의 연결이 너무 소극적이고 제안된 구조와 재료 등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의문”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이번 설계공모의 주제는 명료했지만, 대지의 조건상 건축물과 공원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모 참여 팀의 대표 등록에서 조경가가 배제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소의 상징성을 건축적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제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공원하면 떠오르는 모든 요소들을 나열하는 대신 핵심 전략 중심으로 제안한 안들이 입상한 점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설계공모’ 형식에 적절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품을 뽑았나, 작가를 선정했나
다시 당선작으로 돌아가 보자. ‘서소문밖 역사유적지’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특정 종교를 넘어 우리 사회 공통의 역사로 수용할 수 있는 당위성을 가진다 해도,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해석의 문제는 남는다. 즉 구체적인 공간을 어떤 분위기로 구현할 것인가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현재 당선안을 지배하는 정서는 시종일관 고요하고 장중하다. 지상에서 시작되는 순례의 동선은 외부 공간의 다양한 층위를 경험하기보다는 설계자가 의도한 단일한 경험의 루트에 국한된 인상을 준다. 그 정점의 공간인 광장에서도 설계자의 의도대로 하늘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보다 건축 공간의 무거움에 압도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우기 힘들다. 공모전이 끝난 뒤 정림건축문화재단은 당선 팀을 초청해 묻고 답하는 자리를 ‘프로젝트 원project on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업의 운영위원장인 김광현 교수(서울대학교 건축학과)는 희망의 메시지는 ‘침묵’보다는 밝고 기쁜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또한 건축가의 극단적으로 절제된 조형 방식과 천주교의 조형 방식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범종교적인 방식이 아니라 천주교의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어서 때때로 대규모 미사가 집도되는 공간이므로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때 이를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 구성과 동선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서소문밖 역사유적지’는 설계공모 당선작을 바탕으로 내년 8월까지 기본 및 실시설계를 마치고 2015년 하반기에 착공하여 2017년에 기념 공간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앞으로 1년여의 시간 동안 당선안의 개념을 유지하면서 주최 측의 요구를 절충하는 일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설계공모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 중 하나인 ‘작품을 뽑은 것인가, 작가를 선정한 것인가’의 문제가 이 프로젝트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기우일까?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계공모라는 ‘공식적인 절차’에 의해 당선된 안의 개념을 존중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설계 문화 성숙에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또한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조성 과정에서 이 시대의 기념성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역사 공원이 어떻게 도시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종교 공간이 어떻게 일상과 만나야하는지 담론을 이어가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2017년, 과연 어떤 모습의 역사유적지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까? lalart@hanmail.net
서소문 ‘천주교 성지화’에 천도교 등 강력 반발
특정종교 지원중단, “한국 근대사 역사공원 만들라” 촉구
“종교계 스스로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고,
정교분리 원칙에 합당한지 돌아봐야”
서울서소문공원의 ‘천주교성지화’ 사업에 천도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와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서소문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강력 반발하고 나서 종교간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범대위는 11월 1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발족식을 갖고 서울 중구청이 시행 중인 ‘서소문밖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즉각 중단하고 한국 근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워 달라고 촉구하며 서소문 공원 일대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천막농성과 노숙을 지속하고 있다. 플래카드에는 ‘서소문역사공원을 시민의 품으로’ ‘순국선열의 서소문에 518억의 혈세로 천주교 성당이 웬말인가’ ‘서소문의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등의 문구가 담겨있다.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재, 역사적 의미를 내세워 예산지원에 대한 불만이 토로되고 있다. 결국은 돈이 문제가 되는 셈이다.
서소문공원은 천주교에선 빼놓을 수 없는 성지다. 1984년 시성(諡聖)된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가 순교한 곳이자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해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 반열에 든 27위의 순교터다. 그런 차원에서 천주교는 오래전부터 단독 성지화 작업을 추진해 왔다. 지난 5월 서울시와 함께 지정해 발표한 ‘서울 천주교순례길’ 코스 중 서울에서 가장 전통적인 천주교 역사를 간직한 코스인 제2코스에 들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광장 시복식에 앞서 먼저 찾았을 만큼 의미가 큰 곳이다.
한편 천도교를 비롯한 범대위의 입장도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형장 중 하나였던 서소문의 역사를 바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소문은 사육신을 비롯한 홍경래·전봉준 등이 처형된 장소이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수급이 효시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사형장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과 아픔을 간직한 서소문공원을 왜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서울 중구가 공동으로 천주교 색채가 강한 순교성지로 바꾸려느냐는 지적이다.
“서소문공원은 천주교인만 순교한 곳이 아니라 천도교 유교 등 많은 사람 처형된 곳으로 천주교 단독 성지화 하는 것은 천도교계 차원에서 차별일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처형된 사람들에 대하여는 유교에 대한 차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체부와 서울 중구는 공식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지만 “세계의 유명 관광지로 조성하겠다는 사업 중 하나인데 특정 종교를 너무 의식한 측면이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천주교와 천도교와의 갈등 같은 특혜지원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원불교가 익산에 건립하기로 한 국제훈련원 사업이 개신교의 반대로 무산된 것도 그 한 사례일 뿐이다. 템플스테이 예산과 10‧27법난 기념사업 , 개신교 종교문화행사 등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정부, 지자체의 예산 지원에 대한 배아픔이 깔려 있다.
이에 황평우 문화재 전문위원은 “종교가 국고보조금을 가져가야할 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종교라는 이유로 각종 세계 등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도 부적절한 하다. 세금 등 종교인 스스로 지켜야 할 의무의 이행은 외면하면서 국고보조금이라는 권리만 챙기려는 태도는 종교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가 지적한다. 또한 “종교계 스스로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고, 과연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에 합당한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글·사진=장정태 논설위원>
1. 서소문 역사공원을 천주교성당화 하는 계획은 전면 철회되어야 합니다
❍ 서소문공원은 동학의 2세교주 최시형 등 숱한 동학도인들이 관련된 곳이고, 우리 역사에서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며, 홍경래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죽어간 곳입니다.
❍ 천주교에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신자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까지 부추겨 순교성지 조성에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2011년 7월 천주교서울대교구의 ‘서소문성지’ 재조성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서소문역사공원 사업은 ‘서울특별시의회에 서소문공원 역사공원 조성 특별위원회’가 구성(2013.4)되고, 설계공모(2014.6)까지 완료된 상태에서 실시설계(2015.7 완료)가 진행중인 상태이며, 2015년 9월 착공하여 2017년 8월 완공을 목표로 하는 사업으로, 이 사업에는 국비 등 모두 518억 원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 현재 서소문공원에는 천주교의 순교 현양탑이 건립(1984, 1999년 재건)되어 있습니다.
- 이 사업은 공식적으로 “조선 후기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닌 서소문공원에 역사문화 전시 및 체험공간을 조성하여 서울의 관광 인프라 확충을 도모”(중구청 자료)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특정 교단의 순교자들을 위한 추모시설과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공간을 주요 시설물로 설치하는 것입니다. (별첨한 설계공모 당선작 참조)
❍ 또한 이곳에서 처형된 대표적인 인물 황사영 등은 조선을 청나라로 편입시키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벌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자들입니다. 이들은 천주교에서는 순교라고 강변할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 나라를 바친 친일매국노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이런 사람들을 성자로 모신다는 사실 자체도 못마땅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사람을 추모하는 성당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업신여기고 모독하는 행위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2. 서소문 역사공원을 순국선열의 역사공원으로 재정립되어야합니다.
❍ 서소문 역사공원이 지닌 역사적 의의
서소문은 서대문(敦義門)과 남대문(崇禮門)의 사이에 있는 한양 성곽의 문으로, 소의문(昭義門), 또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조 때에 서소문 밖으로 오늘의 염천교 일대에 이르기까지 사형장이 있었습니다다. 그러므로 많은 국법을 어긴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장소였습니다. 비록 국법을 어겼어도, 의롭게 처형을 당한 사람들 역시 우리의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육신(死六臣)의 죽음과 동학교도 등의 죽음입니다.
- 역사적으로 서소문은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의로운 분들이 갇혀 있던 역사적 자리입니다. 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덕목인 절의(節義)의 대명사와 같은 사육신이 이곳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였고, 부당한 봉건의 세력과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싸운 동학군이 수없이 처형을 당한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학혁명을 총괄적으로 지도한 해월 최시형 선생이 그 만년에 갇혀 고초를 겪은 형무소가 있던 자리가 바로 서소문 일대입니다. 이와 같은 지역은 다만 한 종단의 역사 공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올곧고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고 또 나타낼 수 있는 역사공원이 되어야 합니다.
- 사육신의 죽음
사육신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육신이 어디에서 죽음을 당했느냐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실제 기록에는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곧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군기감은 세조 12년에 군기사(軍器寺)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서울시청 인근입니다. 따라서 군기감 앞에서 사육신이 거열형으로 처형을 당했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 서소문 일대라고 판단됩니다.
- 동학교도의 처형 및 효수
1894년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은 한국의 근대사의 큰 분수령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전주성 함락 이후, 조선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이를 틈 탄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외국군에 의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화약(和約)을 맺고 잠시 물러났으나, 일본군의 침략에 다시 동학군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동학군은 패배를 하고, 동학의 중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특히 동학군의 대장인 김개남은 전라도에서 처형을 당한 이후, 수급이 이곳 서소문에 사흘간이나 효수(梟首)되었고, 이외에 수많은 동학의 교도들이 이곳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 서소문 형무소에서의 해월 최시형 선생(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4년 동학혁명을 총체적으로 지도한 인물입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피신을 하였으나, 1898년 4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가 되어 서울로 압송이 되어 서소문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이 되어 한 달 여를 고통 속에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서소문 역사공원이 지닌 역사적 의의
서소문은 서대문(敦義門)과 남대문(崇禮門)의 사이에 있는 한양 성곽의 문으로, 소의문(昭義門), 또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한다. 조선조 때에 서고문 밖으로 오늘의 염천교 일대에 이르기까지 사형장이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국법을 어긴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장소이다.
그러나 비록 국법을 어겼어도, 의롭게 처형을 당한 사람들 역시 우리의 역사에는 많이 있었다. 따라서 서소문 일대의 사형장에서는 많은 의로운 죽음 역시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들 의로운 죽음 죽에 대표적인 사례는 사육신(死六臣)의 죽음과 동학교도들의 죽음이 있다.
1. 사육신의 죽음
사육신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사육신이 어디에서 사형을 당했느냐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실제 기록에는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곧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고 되어 있다.
군기감은 세조 12년에 군기사(軍器寺)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서울시청 인근이다. 따라서 군기감 앞에서 사육신이 거열형으로 처형을 당했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 서소문 일대라고 판단이 된다.
2. 동학교도의 처형 및 효수
1894년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은 한국의 근대사의 큰 분수령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주성 함락 이후, 조선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이를 틈 탄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군대를 상륙사키고,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외국군에 의한 전쟁터가 되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화약(和約)을 맺고 잠시 물러났으나, 일본군의 침략에 다시 동학군은 일어난다.
그러나 강력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동학군은 패배를 하고, 동학의 중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특히 동학군의 대장인 김개남은 전라도에서 처형을 당한 이후, 수급이 이곳 서소문에 사흘간이나 효수(梟首)되었다. 이외에 수많은 동학의 교도들이 이곳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3. 서소문 형무소에서의 해월 최시형 선생(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4년 동학혁명을 총체적으로 지도한 인물이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피신을 하였으나, 1898년 4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가 되어 서울로 압송이 되었다. 서울로 압송이 된 이후 이곳 서소문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이 되어 한 달 여를 고통 속에서 보냈다.
4. 의로운 죽음, 의로운 구금
역사적으로 서소문은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의로운 분들이 갇혀 있던 역사적 자리이다. 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덕목인 절의(節義)의 대명사와 같은 사육신이 이곳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였고, 부당한 봉건의 세력과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싸운 동학군이 수없이 처형을 당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동학혁명을 총괄적으로 지도한 해월 최시형 선생이 그 만년에 갇혀 고초를 겪은 형무소가 있던 자리가 바로 서소문 일대이다.
이와 같은 지역은 다만 한 종단의 역사 공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올곧고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고 또 나타낼 수 있는 역사공원이 되어야 한다.
- 윤석산 전 한양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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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개명천지 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우리 근대 역사는 너무도 뒤틀려 왔다.
자본주의 논리하에 거짓이 왜곡 포장되어 버젓히 교과서에 실리고
이러한 가슴 찟어짐을 그러함이려니 정도로 접수하고 마는 세태.
또한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시대상황이려니 입 다물고 지나치는 사람들.
'순국'이나 '순교' 두 단어 모두 따라죽을 殉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뒤에 붙는 國과 敎의 형태에 따라 두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이해하는 사항.
순국이냐? 순교냐? 형식상의 죽음이야 같다지만
내 나라를 잃고 그 무슨 가르침(敎)의 영역이 확보될 수 있으며.
아무리 양해한다도 해도 특정집단의 敎가 어떻게 國의 상위 개념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자신의 종교적 사상과 신념에 대한 의지를 폄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편가르기 식 분쟁 따위는 더더욱 원치 않는다.
그러나 수 십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동원되어 서소문 역사공원의 관광화가 입안되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피땀어린 국민의 세금이 특정 종교 편향 정책에 투입되는
어이없는 실상에 대한 쓴소리는 점점 늘어나고 또한 높아지게 될터이다.
최고의 양심,
가늠키 어려울 정도의 도덕율만이 대저 종교를 버티게 하는 힘이리라.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양심을 대표해온 카톨릭계 사제단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영역 확장 따위에나 골몰하는 반종교적 행태로 흐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