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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세상에 이런 성전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구나"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질타를 묵상하면서 참된 성전이란 과연 어떤 성전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대성전은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부속 성전, 친교의 공간, 휴식 공간, 기타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성전 역시 좋은 성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짱짱한 음향 설비는 물론이고, 사방이 휘황찬란한 고가 예술품으로 장식된 품위 있고 고상한 성전 역시 기도하는 분위기가 나는 좋은 성전이겠습니다.
매주 수 만 명이나 되는 미사 참례자들이 줄을 잇고,
매주 수 천 만원의 거액이 오고가는 초대형 본당 역시 좋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조건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성전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거나 열악할지라도
기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참된 성전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몸으로 직접 살려는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한 봉사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
구성원간의 상호 원활한 의사 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복음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나눔이, 이웃과의 사심 없는 빵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참된 성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가 구현되는 공동체,
인간 중심의 육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자신의 욕구나 의지대로만 살지 않고 이웃의 의지,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생활 전체를 맡기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선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로 서고자 염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마음을 깨끗이>
오늘 대전교구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정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은 서로 명문가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첫 영성체를 하며 그 깨끗한 마음을 오롯이 그리스도께만 드리기로 서원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처음부터 결심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수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님께서 혼인을 주례하시고 두 사람은 서로 오누이로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10번 가량 동정을 잃을 위기가 닥쳤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지킬 수 있었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 분은 동정의 순결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과 동시에
부부로서의 인간적인 사랑 또한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문 케이스의 분들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박해 상황이 아니니 이런 혼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임을 삶으로 보이신 분들입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하고 정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으며, 20살에 순교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옥중 편지는 항상 어머니와 누이들을 걱정하는 말들뿐이었습니다.
휘광이가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스스로 옷을 벗고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든 것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교님은 단순한 교리만 배웠지만 이러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던 한국의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보면 많은 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시는 당신 자신이 부끄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곳에 함께 참석하였던 신학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순교자들은 단순한 교리만 가지고도 그렇게 큰 믿음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많이 듣지만
이유는 바로 땅에 있을 것입니다.
씨는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그 열매는 서로 다르게 맺어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풀 위에 내린 똑 같은 아침 이슬이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이단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잡으려 하였지만 군중들 때문에 잡지 못하였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배반함으로써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도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우리 각 개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안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안다고 교만해진다면 공부를 포기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배우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도를 지녔다면 다시 시작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한다면
영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 안 쓰던 커다란 상을 꺼냅니다.
잘 보관해 놓아서 먼지도 없는 것 같은데 음식 그릇을 놓기 전에 먼저 행주로 상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면 정말 더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놓은 다음에 닦는 것은 더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죄의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닦아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로마 유학중
<내 마음속 성전>
가끔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냇물은 흐르기 때문에 큰 강이 되고 큰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아내고 또 비워낼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쉽게 안주하려 합니까!
또 얼마나 쉽게 나태함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까!
잠깐 쉬어갈 수 있지만,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되새기면서,
계속해 그 큰 바다로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강물을 닮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십니다.
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을까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익에 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예수님은 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되게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가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도 일어났으면 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어떤 영양분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은 과연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그리고 머리에게 물어봅니다.
아파트 평수, 통장의 돈, 자동차 배기량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가슴에게 물어봅니다.
세상의 것을 얼마나 품고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어떤 감동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깃들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현재 진행형’인지 아니면 ‘현재 완료형’인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하느님을 마음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집착·이기심·명예·탐욕 등은 그분께 맡겨드리고,
당신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마카베오 항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성전 재건과 수호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주님이 머무시는 성전과 우리 마음의 성전에 큰 사랑과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가 내 마음의 성전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 들어찬, 기쁘고 즐거운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 광주대교구 비아동천주교회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에 붉게 물든 동녘 하늘,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 기쁨,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대로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 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
“당신을 그리면서 성소에 왔사오며,
당신의 힘, 당신의 영광을 뵈오려 합니다.”
“내 항상 당신의 장막 안에 살았으면 싶사옵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들었으면 싶사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성당이든 방이든 문밖을 나서면
본능적으로 눈 들어 바라보는 하늘입니다.
며칠 전 수녀원에 미사 드리러 갔을 때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눈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 아래 아파트 숲 속의 수녀원 정원의 겨울 나목들,
그대로 거칠고 험한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난한 수도자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느님의 집 성전을 찾아 기도로 시작하는 수도자들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로 영혼을 채우고
이어 식당에서 음식으로 육신을 채운 후 일터로 나가는 수도자들의 삶,
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당(영혼), 식당(육신), 일터의 순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눈이 보이는 성전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와 그 아들들,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우선적으로 착수한 일이 성전정화였습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느님의 성전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산으로 올라가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이민족들이 더럽혔던 제단을 정화하고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합니다.
이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으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제물과 감사제물을 드립니다.
이게 바로 성전의 거룩한 기능입니다.
전례축제를 통한 공동체의 일치와 힘이요,
정화되고 성화되는 성전에 공동체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끊임없이 이 거룩한 성전에서
하느님께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를 바칩니다.
이런 거룩한 성전이 속화되는 것에 대한 주님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 분노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말씀하시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아주 오래 전 백련암을 찾았던 어느 구도자와 성철 스님의 문답이 생각났습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모든 수행자들이 명심해야할 말씀입니다.
깨어 살지 않으면
성전이나 절은 강도들의 소굴이나 세상을 속이는 것이 될 수 있고,
여기 사는 수행자들은 강도나 사기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분도 규칙에 나오는 다음 말씀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은 행실로써는 아직 세속에 충성을 지키면서도
삭발로써 하느님을 속이는 것으로 알려진 자들이다.”
세속에 충성을 지키며 삭발로써 하느님과 세상을 속이는 사기꾼 수도자가, 사제가 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이자 말씀의 집이요 영혼의 집입니다.
이게 성전 본연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후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기도의 집이자 말씀의 집인 성전으로서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기도는 물론 진리의 말씀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는 성전이요 공동체요 우리들입니다.
복음 묵상 중 떠오른 빛과 어둠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이 빛이라면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어둠의 세력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이 성전을 장악할 때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 사기꾼들의 집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미사를 통해
성전과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당신의 성전인 우리 모두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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