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정 金商玎(1875~1954)】 「1919년 항일 의지를 표명한 혈서투쟁, 세금납부 거부투쟁」
1875년 (음)9월 12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음암면(音岩面) 유계리(遊溪里)에서 아버지 김덕재(金德載)와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이다. 이후 서산군 부석면(浮石面) 칠전리(七田里)에 살다가 이주하여 서산군 성연면(聖淵面) 고남리(古南里) 상현(象峴)에서 거주하였다.
고조부 김한록(金漢錄, 1722~1790, 호 한간(寒澗))이 충남 서부 지역의 거유(巨儒)인 한원진(韓元震, 1682~1751, 호 남당(南塘))의 학문을 전수받으면서 호론(湖論)적 학풍이 가문에 정착되었다. 이후 김한록의 둘째 아들 김일주(金日柱)를 거쳐 고손으로서 학풍을 이어받았다. 4세 때 부친을 여의고 형편이 어려워 독학으로 경서를 읽으며 고조부 김한록과 큰 증조부 김일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홍주의병에 참가한 종형 김상덕(金商悳),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과 종유(從遊)하면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척사적 경향을 지닌 이석태(李錫泰)·이철승(李喆承)·김복한의 장남 김은동(金殷東) 등 충남 서부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경향을 같이하였고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가학의 학풍과 우국지사들과의 교유를 통해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위정척사 의식을 형성하였고, 이는 척왜론(斥倭論)으로 발전하여 철저한 반일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두문불출하며 은거하다가 1919년 광무황제(고종)가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19년 1월 27일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의리상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면사무소 게시판에 「거애발상문(擧哀發喪文)」을 내걸고자 하였으나 관리들의 제지로 붙이지 못하였다. 2월 1일에는 부석면 망등산(望登山)에 올라 망곡(望哭)을 하고, 일제를 성토하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2월 14일 의분에 차 왼쪽 넷째 손가락을 끊어 복수대의(復讐大義)라는 혈서를 써 걸어 놓고 민족의 봉기를 촉구하는 혈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100여 장의 혈서를 쓰는 동안 피가 마르자 가슴살을 칼로 베어 피를 내어 그 피로 태극기를 그려 강력한 항일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서산 지역 3·1운동에 많은 군중이 참여하는 발단이 되었다. 3월 7일 광무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한 며칠 후 항일의 뜻을 더욱 굳히고 일제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운뎃 손가락 한마디를 절단하였다. 이때 대명의리(大明義理)라는 혈서로 그 뜻을 표명하고, 277자에 달하는 피로 쓴 글씨를 남겼다.
전국 각지에 3·1운동이 번져 서산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산군 재무주임 사카가키 이와지坂垣岩治를 부석면에 보내 이른바 총독부의 고유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고유문 발표가 끝나자마자 면사무소에 모인 주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와 경술국치, 광무황제 독살 등 일제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일제에 복종하지 않는 방법으로 세금을 납부하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면서 주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 일로 다음 날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15일간 구류(拘留)되었다. 구류 중 군수 지희열(池喜烈)이 회유하자 “우리 왕께서 서거하시어 주인 없는 강산이 되었는데 어디에다 세금을 바치겠느냐. 비록 도끼와 톱을 머리에 댄다 하더라도 맹세코 세금을 물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세금 납부 거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4월 1일 경찰서 유치장에서 북향(北向)하고 머리를 조아려 통곡하자 일제 경찰은 그를 몽둥이로 수없이 구타하였다.
1921년 7월 1일 일제 경찰 요코타(橫田)가 찾아와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고 협조하라고 회유하자 격분하여 요코타를 몽둥이로 내려쳤다. 이 일로 또다시 붙잡혔다. 1921년 10월 12일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가 발부되자 격노하여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한 번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일왕(日王)과 조선총독에게 세금을 낼 수 없다는 혈서를 써 반송하였다. 비록 힘으로 대적할 수 없지만 의리는 펼 수 있으며, 한국에 죽어도 변치 않는 일민(逸民)이 있다는 것을 알리며 총독에게 반드시 보복할 것을 통고하였다. 1924년에는 농민들의 생계보호를 위해 일제의 ‘전매령(專賣令)’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한국 농민들의 담배 경작을 규제하려고 전매령을 발표하자 “대한의 사람 한월당 김상정은 굴복하지 않고 담배를 심는다(大韓遺民 寒月堂 金商玎 種不屈草)”라고 쓴 팻말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담배농사를 독려하였다. 일제 경찰이 이른바 전매령 위반 혐의로 위협하자 “내 목은 베어 갈지언정 대의는 굴복하지 않겠다. 너희들의 더러운 말을 듣지 않겠다”라며 왼쪽 귀를 베었다. 그리고 “죽기를 맹세하고 처음 마음으로 왼편 귀를 잘랐네 / 악한 소리가 적으로부터 들어오지 말라고 / 사람이 있어 군친의 의리를 말한다면 / 오른쪽 귀로 들어주겠네”라는 시를 피로 써서 그 심정을 표현했다.
1932년 9월 15일 끝내 전매령 위반과 세금 불납 등의 혐의로 붙잡혀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감옥 안에서도 상투를 자르려는 일제 관헌들에게 저항하다가 힘에 부치자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입에 물고 관헌들의 얼굴에 뿜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며칠 후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석방하였다. 1937년 2월에는 여주(驪州)에 있는 증조부 김관주(金觀柱)의 묘를 참배하고 며칠 묵고 있을 때 누군가의 밀고로 또 붙잡혔다. 상투를 자르지 않고 상복을 입고 지냈는데, 일제 경찰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하며 상투를 자르고 상복을 벗기려 하였다. 이에 완강히 거부하다가 폭행을 당해 허리를 크게 다쳤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를 위한 전쟁에 도움을 주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징병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반대하였다. 제사용 그릇까지 공출하여 전쟁 물자를 만드는 일제를 ‘악류(惡類)’로 칭하면서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으니, 전 세계인이 의군(義軍)을 일으켜 일제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항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46년 1월 1일 김구(金九)를 찾아가 일제와 친일 매국노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는 혈서 「청토수적문(請討讐賊文)」을 올려 이완용 같은 매국노에 대한 처단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항일 정신에 김구는 “나라의 위기를 만나 죽기로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깨끗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한결같이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가히 몸을 베어 혈서를 한 것을 보아도 그 감정을 알겠더라. 이 거친 말로 그 특행을 기록하노라”라고 하면서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신념을 칭송하였다.
1954년 (음)8월 19일 80세로 사망했고, 1960년 서산 시민들은 「한월당선생 의열찬송비(寒月堂先生義烈讚頌碑)」를 세워 공적을 기리고 열사로 추앙하였다. 이후 「한월당 김상정지사 추모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묘는 서산시 성연면 고남저수지 인근에 모셔졌다. 저서로는 『한월당집(寒月堂集)』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