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 마16:21~26절 2025.3.16. 주일오전
* 내 죄가 만들어낸 십자가의 죽음
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십니다. 유대 나라 최고 기득권자들 즉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의문을 가져야 할 문제가 왜 예수님께서 죽으시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유대 나라나 로마세력의 힘에 눌려서 죽는 죽음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야 할 나쁜 짓을 해서 어떤 도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법을 위반해서인가? 왜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말씀 속에서 찾아서 그 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원하신 죽음입니다.
요12:27~28절에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기 때
문에 그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죽는 그 일을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그 일이 곧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17: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 그 일이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일을 위해서 죽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4: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가 범죄한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은 내 죄라는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죄악으로 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해방시켜 의를 입혀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 나의 정신과 나의 가치관은?
성도는 말씀 앞에 나왔다면 자신의 모든 조건을 내려놓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나의 실상인 죄를 말씀이란 빛 앞에서 명백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실상인 죄를 알고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유대나라 기득권 자들이 아니라 지금 말씀 앞에 나온 나 자신의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내 죄를 알았고, 내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은 자라면 다른데 눈 돌리고 기웃거릴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느냐? 죽느냐?는 심각한 문제가 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나의 죄로 그 죄에 상응하는 죄값인 사망이라는 멸망에 처한 자들입니다. 내 인생의 종말, 즉 끝날은 오늘인지 내일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자로 존재하지 않고는 영원한 멸망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면 나는 예수의 피로 의로운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자신의 죄를 알고 예수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내 죄를 모르면 22절에 베드로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짓이란 뭡니까? 그것은 내 육신이 살겠다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영광된 하나님의 약속을 가로막는 일을 하는 방해자가 됩니다. 결국 이 일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육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일이고 사탄의 사고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사탄의 사고란 돈이 힘이고 돈이 영광입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마력에 매인 이 세상은 돈이 선이고 돈이 곧 진리입니다. 온 세상은 이러한 구조 속에 돈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6: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마져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고, 돈이 진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찾는 사람은 돈이 되는 사람입니다. 목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켜 돈이 되게 하면 대접받고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증언해도 외면받는 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의 실정입니다.
성도는 정신이 바꾸어지고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즉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가치관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은 돈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꼭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뜻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고 영원한 영광의 길입니다. 그래서 24절에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 나를 부인해야 하고 버려야 하는가? 나의 소욕은 죄악으로 형성된 죄의 도구요 사탄의 종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고를 가진 나의 사욕은 수리하고 고쳐서 쓸 수 있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 끝내야 합니다. 이런 성도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됩니다. 바울은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고 합니다. 자기의 부인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입니다. 여러분 순종이 뭡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순종이 있는가? 이 순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순종이 아닙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속에서 강권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서 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여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의 눈을 뜬 자라면 자기에게는 의미를 두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의 예수를 기뻐하고 만족하고 감사해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