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지 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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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흥 제
오늘 아침 쌀밥을
먹으면서 며칠 전에 본 5000년 전 볍씨를 떠올렸다. 쌀에는 무슨 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렇게 오랜 동안 부패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내가 살던 고장에서 나왔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교회 75세 이상 회원들이
건강도 유지하고 견문도 넓힐 겸 매월 정기적으로 지하철여행을 다닌다. 이번 3월에는 고양시 600년 기념관에 가기로 했다. 고양이라는 지명은
1413년(태종 13년)에 고봉과 덕양을 합치면서 고양현이 탄생되었고 1470년에 고양군으로 승격 되었다. 1989년에는 신도시로 개발되어
고양시로 됨과 동시에 인구도 100만 명이 사는 큰 도시가 되었다. 2013년에는 ‘고양’의 지명이 탄생 된 지 600년 되는 해여서 고양시를
알리는 기념관을 개관했다.
고양군은 김포군과 더불어
이웃한 한강과 삼각산(북한산) 사이에 펼쳐진 넓고 기름진 땅이어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백제가 먼저 차지했다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겼다. 신라는 진흥왕의 순수비가 삼각산 비봉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까지는 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에서는 서울을 남경(南京)이라 하여 중요시했고, 조선왕조 때는 수도 한성(漢城)과 이웃 하게 되었다.
고양시는 개발되기 전인
68년도에 내가 살았던 고장이다. 신혼 초 백마역에 통근열차가 선다고 하여 텃밭 200평이 딸린 기와집을 샀다. 백마역이 500m 가량 되고,
뒤에 조그마한 산(정발산)이 있는 살기 좋은 농촌이었다. 아버님께선 텃밭에 각종 채소와 고추, 감자까지 심으셨다. 집에 딸려서 닭장도 짓고,
닭도 20여 마리를 길렀다. 매일 아침 따뜻한 달걀을 먹는 맛이 시골생활의 재미를 느끼게 했다. 텃밭 건너에 조그만 도랑이 있는데 장마 때면
시뻘건 물이 흘렀다. 거기에 삼태기를 대고 양쪽을 발로 막으면 거의 막아졌다. 조금 있다 들어 보면 묵직하게 올라왔는데 꼬물꼬물 움직이는
미꾸라지가 담겨 있었다. 두 번만 대면 양동이(바께쓰)에 한 가득 잡혔다. 그걸 닭장에 쏟아 놓으면 닭들은 눈부터 쪼아 먹었다. 맹수가
사냥하려면 먹이 감의 목부터 물어서 숨통을 끊듯이, 조류는 사냥감의 눈부터 빼 먹어 방향감각을 잃게 하는가 보다. 그런 쏠쏠한 재미가 있었지만
오래 살 수는 없었다. 나는 동아출판사에서 근무할 땐데 백마역에는 아침저녁에만 통근차가 서고, 매 시간 다니는 기차는 한 정거장 전인 곡산역에
서서 통근차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3㎞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출판사 일이 통근차를 타게 끝나지 않아 부득이 다음해에 집을 팔고 다시 서울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농촌이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될 줄을 상상이나 했는가. 거기에서 오래 살았으면 보상금을 톡톡히 받고 나왔을
터인데 내버리다시피 하고 나온 것이 아쉽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
정발산 역에서 내려 호수 공원에 먼저 갔다. 한강 물을 끌어 올려 만든 인공 호수로 주위 경관이 수려하고 물이 바닥까지 보이게 맑아 주민들
산책코스로 좋을 듯 했다. 옆에 있는 고양 600년 기념관에는 최영장군 묘, 벽제관, 서오릉, 서삼릉 등 관광지를 많이 소개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신도시 개발 당시에 출토된 5020년 되었다는 ‘가와지 볍씨’다. 5천년이면 단군(4349)보다도 오래 되었으니 그 때도 여기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다. 발견 당시 고양 신문에 게재된 부제(副題)를 보면 ‘까만 물속에 토탄 찌꺼기와 함께 뜬 볍씨’라고 되어 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고 싶어 관계기관에 문의했더니 국내에서는 밝힐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베타’ 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5020년
되었다는 회신을 받았으니 담당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 볍씨가 발견된 마을 이름이 ‘가와지’여서 ‘가와지 볍씨’라고 명명 했다. 그렇게 오래
된 볍씨가 물속에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썩지 않았을까?
피란 시절 충청도 농촌에서
살면서 농사 짓는 것을 보았다. 볍씨는 물에 소금을 약간 풀고 거기에 담가 뜨는 것은 걷어 내고 실(實)한 것을 논에 뿌려 손바닥 길이만큼
자라면 그 싹(모)을 뽑아 손아귀에 들어올 정도로 묶어서 다른 논으로 옮겨 심었다. 모를 낼 때는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로 하여 사람이 많았다.
논에 줄을 띄우고 빨갛게 표시한 자리에 대여섯 가닥씩 떼어 꽂았다. 그 작업은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여 허리가 아프고 종아리까지 빠지는 흙에서
발을 빼 계속 옮겨서 힘이 무척 들었다. 더구나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 피를 빨아 먹어 경계 하느라 신경을 곤두 세웠다. 10시쯤 되면 주인
여자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새참을 내 온다. 대개는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손칼국수다. 직접 재배한 재래종 밀가루로 만든 것이어서 색은
좀 검지만 맛은 있었다. 논두렁 편편한 곳에 둘러 앉아 먹었다. 점심은 쌀을 드문드문 둔 보리밥에 열무 겉절이를 얹어 고추장에 썩썩 비벼 고등어
한 토막 곁들이는 맛은 천하 일미였다. 힘든 일을 해야 밥맛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벼 농사가 처음
시작된 곳은 고양-김포 등 한강 하류라고 한다. 가와지 볍씨는 5,000년이 넘었지만 4,000년 된 볍씨들은 김포-고양 여러 군데서 나왔다.
물에 잠기면 싹이 나는 볍씨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도록 원형대로 보존 될 수 있었을까?
토탄(土炭)은 나무가
매몰되어 탄화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석탄이라고 사전에 실려 있다. ‘탄화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라는 구절에 열쇠가 있을 것 같다.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부패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 조 흥 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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