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 침략 알리는 군사 통신수단… 임란 이후 파발제로 바뀌어
산에 가면 제일 쉽게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봉수대다. 전국의 산이 4,000개쯤 된다 하면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약 700개 있었다고 전한다. 5~6개의 산에 오르면 반드시 하나 정도의 봉수대를 본다는 계산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웬만한 산에는 봉수대가 다 있다. 이 중 상당수는 훼손이 심해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돼 있거나 복원된 봉수대도 있다.
봉수대는 원래 군사시설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엔 체계적인 운영과 관리보다는 일시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컸다. 조선시대, 특히 세종 시대에 들어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신호방식과 봉수노선 등도 이때부터 체계화됐다.
‘봉수대’ 글자를 한 자씩 살펴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봉(烽)은 봉화나 횃불을, 수(燧)도 봉화나 부싯돌을 가리킨다.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나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낸다고 해서 ‘봉수’라고 불렀다. 그 일을 수행하던 자리가 바로 봉수대다. 낮은 산이라도 사방이 확 트인 봉우리에 대부분의 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봉수대에 있는 5개의 화두는 연기나 불이 피어오르는 화두수에 따라 나라 안팎의 상황을 전했다.
세종 4년(1422)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해서 세종 20년(1438) 16년 만에 완비했다.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각 ‘연변봉수’에는 목수가 쓰는 자로 높이 25척, 둘레 70척의 봉수대를 쌓고, 그 아래에 깊이·너비 각 10척의 참호를 팠다. 봉수대 위에는 임시로 집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고, 봉화군·봉졸·봉군으로 이뤄진 봉수군과 봉수군을 통솔하고 감시하는 오장(伍長)이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전국 5개 기관선로로 나뉜 봉수대를 따라 올라온 봉수를 받아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역할을 했던 서울 남산봉수대. 다섯 군데 중 한 군데만 수원 화성 봉돈을 참고로 최근 복원했다.>
전국 5대 기간선로 나눠 한양으로 전달
세종은 또한 전국의 봉수 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나눴다. 봉수를 전달하는 봉수대는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약 643개에 달한다고 <증보문헌비고>에 기록하고 있다. 대개 전달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앙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국경지방으로 보내는 분산식도 있었다.
조선시대 봉수대 5대 기간선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됐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강원도→경기도→양주 아차산 봉수, 제2로는 동래 다대포→경상도→충청도→경기도→성남 천림산 봉수, 제3로는 평안도 강계→황해도→경기도→서울 무악 동봉수, 제4로는 평안도 의주→황해도→경기도→서울 무악 서봉수, 제5로는 전남 순천→충청도→경기도→서울 개화산 봉수 등으로 나눠졌다. 이렇게 나눠진 봉수는 최종적으로 한양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봉수대로 집결되어 그 상황이 즉시 조정에 보고됐다. 제1로·3로·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제2로·5로는 왜족의 침입을 경계하여 대비한 루트였다.
첫 발화지점에서 한양까지 봉수가 도달하는 데는 대략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동래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20일 정도 걸렸던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른 전달인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 봉수대가 643개였다면 선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개 선로에 평균 130개가량 된다. 제2로인 다대포에서 성남 천림산 봉수까지 거리가 400km 정도 된다면 약 3km마다 봉수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위부터)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기장 남산봉수대는 고려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둘레가 무려 220m에 달한다. 사진 기장군 제공 / 깔끔하게 복원한 창원가을포봉수대. 봉수대는 어디서나 사방이 확 트여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 <대동지지>에도 거제 옥녀봉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봉우리에 우뚝 솟은 거제 옥녀봉봉수대.
5개의 봉수신호 따라 상황 달라
사방이 확 트인 봉우리에서 3km마다 있는 봉수는 흐린 날씨만 아니면 정확한 상황의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더욱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낮에는 활활 타오르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알렸다. 신호체계는 평상시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접전을 벌이면 5개의 홰(봉수신호)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봉수대마다 5개의 봉수를 설치, 신호를 전달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봉수군이 직접 다음 지역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초기 봉수대에는 3인 1조로 구성된 봉졸들이 주야로 정찰하며 5일씩 교대근무했다. 혹시라도 봉졸들이 근무태만, 부주의 등으로 봉화하지 않으면 최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숙종시대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근무소홀에 대한 처벌규정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적이 출현하거나 국경에 가까이 왔을 때 거화하지 않은 경우 70~100대에 이르는 장형(볼기)에 처했으며, 적의 침입을 보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수대가 제구실을 못 한 경우가 발생했다. 1510년 삼포왜란 때 불을 올리지 않았고, 1513년 왜적이 인천, 충청과 전라지역에 침입해 20여 일간 체류했어도 봉화를 올리지 않았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 달이 넘도록 봉화를 올리지 않은 경우가 발생했다. 더욱이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왜군들이 곳곳의 봉수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전국의 모든 봉수가 끊어졌다. 사실상 조선의 봉수는 임진왜란 이후 그 기능이 완전 마비됐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봉수무용론과 봉수의 폐단을 주장하는 일이 점차 늘어났다. 급기야 임란이 끝난 이후 1605년(선조 38)에는 말을 타고 가서 소식을 전하거나 사람이 직접 달려가서 소식을 전하는 파발제가 실시됐다.
어달산봉수대는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않고 그냥 있는 대로 복원한 듯한 느낌을 준다./사진 문화재청 제공>
삼국시대 이래로 부침을 거듭하던 봉수는 1885년 전신, 1890년대 전화 등의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부터 벌어진 행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봉수대에서 고사나 동제(洞祭)를 지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는 무속인들이 사방 조망이 좋은 봉수대에 올라가 굿판을 벌이면서 토속신앙이 파고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원래 봉수 주변에는 국법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조선 세종 때부터 표석을 세워 이를 널리 알렸다. <세종실록>에는 ‘봉수대 상단에 가옥을 지어 병기(兵器)를 보관하고, 아침저녁으로 공급하는 물과 불을 담는 데 필요한 그릇을 보관한다. 또한 무당이나 토속신의 사당 건립을 법으로 금한다’고 엄격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해 보면 봉수대에서의 고사나 동제행사는 조선 이후, 즉 일제시대 때 나라 잃은 아픔을 달래는 하나의 변형된 방식인 샤머니즘으로 파고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봉수대는 고대시대부터 있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는 우리 역사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나 학술 심포지엄 등은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전남 여수 금오도 망산봉수대는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언제든 적의 침입을 알릴 수 있다.>
국내 가장 오래된 봉수대 기장 남산봉수대 최종 목멱산(남산)봉수대 왕에 직보 봉수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봉수대는 부산 기장 남산봉수대로 알려져 있다. 봉수의 핵심시설인 연대가 높이 5m, 봉수대 외곽둘레는 220m나 됐다. 또 건물 터를 측량한 결과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봉수대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부속건물 터 또한 기단부와 벽체, 초석, 온돌시설 등이 지금까지의 봉수대 발굴조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건물 터에서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들인 생선뼈무늬인 어골문 기와와 청자가 발견돼, 봉수대 역사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는 이에 따라 2012년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기장 남산봉수대를 봉수대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신청 했다. 기장군 문화관광과 허재혁씨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기장 남산 봉수대 유적을 2012년 2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신청했지만 문화재청에서 아직 별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아 사실상 파기된 것으로 보인다”며 “봉수대 유적에 대한 관심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그간의 노력이 무산된 것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기장 남산봉수대는 규모와 시기 면에서는 국내 최고로 인정받았지만 아직 그 가치 면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인정받지 못한 셈이 다. 이는 봉수대에 대한 국내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은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안산봉수대도 제대로 고증을 거쳤는지 의문이 드는 봉수대 중의 하나다.>
서울 남산(당시는 목멱산)봉수대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점에 있는 봉수대다. 한양 도성에 바로 상황을 보고하는 최종 봉수대이기 때문이다. 왕에게 전국의 상황을 종합보고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원래 남산에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의 봉수대가 있어, 여기에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5개의 기관선로 봉수의 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그 5개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 남산봉수대는 그 가운데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이것도 본래 봉수대 터만 남아 있을 뿐 당시의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수원 화성의 봉돈을 참고로 최근 복원한 것이다.
조선 초 세종 때 확립된 봉수제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고종 때인 1894년 근대적인 통신체제가 도입되면서 완전 폐지됐다. 그 이후 방치하고 관심 밖에 있어 제대로 봉수대에 대한 연구가 뒤따르지 않았다. 산성과 더불어 우리의 전통 군사시설인 봉수대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조만간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월간 산 2015.02.09 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