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도착해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무장공비들은 외투 속에 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을 숨기고 청와대까지 도보로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처음 이들을
발견했던 것은 서대문 경찰서장이었고 서대문서 서장은 이들의 대열을
막아서고 검문을 하였으나, 무장공비들은 훈련을 끝마치고 복귀중인
방첩대라고 이야기하며 검문 중인 서대문서 서장을 따돌리고 다시 청와대쪽으로
이동을 계속했습니다.
자하문
고갯길을 지나서 종로경찰서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러서 무장공비들은
종로경찰서 수사 2계 소속 박태한, 정종수 형사에게 다시 검문을 받게
됩니다. 무장공비들은 처음 경찰의 검문을 따돌렸던 방법대로 형사들의
검문을 피하려 했으나, 이들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챈 형사들은 계속해서
무장공비들의 뒤를 쫒았습니다.
자하문
고갯길을 지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건물에 이르러 이동하던 무장공비
앞을 막아선 것은 종로경찰서 서장인 최규식 총경이었습니다. 서장은
관내에 거동수상자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혈혈단신 지프를 타고
현장에 도착해서 권총을 빼들고 31명의 무장공비를 막아섰습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완강한 최서장 앞에서 무장공비들이
당황하고 있을 무렵 길을 막아선 최서장의 지프 뒤로 서울시민들이 탄
버스가 멈춰섰습니다. 잠시 후에 또 한대의 버스가 길을 막아선 앞의
버스 때문에 연이어서 멈춰서자 공비들은 이를 병력 수송용 버스로 오인하여
버스에 수류탄과 총기를 난사하였고, 무장공비들을 권총을 들고 단신으로
막아선 최규식 총경은 공비들의 AK소총 사격에 현장에서 순직하셨습니다.
무장공비들의
뒤를 따르고 있던 종로서 소속 박태한, 정종수 형사는 무장공비의 부대장이었던
김춘식을 생포하였고, (김춘식은 생포과정에서 부상이 심해서 후에 사망)
이 과정에서 정종수 형사는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맞아서 순직하셨습니다.
청와대
앞에서 교전이 벌어지자 수경사 30대대 (당시 대대장 전두환 중령) 가
즉각 출동하였고, 현장에서 5명을 사살, 31일까지 군경합동 수색을 통해서
총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남은 2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대간첩 작전을 위한 위해 향토 예비군과 전투경찰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목책으로 되어 있던 휴전선이 철책선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6.25당시의
전투경찰대는 이때 창설된 전투경찰대와 다릅니다. 이것이 지금의 전경이라
불리는 전투경찰의 창설 시초입니다. 전투경찰은 의무경찰의 대선배격입니다.)
31명의
무장공비를 최총경이 단신으로 막아서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국가원수를
잃고 혼란에 빠질 위기에 놓였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찰로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무장공비 앞에서 귄총을 빼들고 막아서셨던 최규식
총경님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희생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당신과 같은 분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서 지금까지 지켜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경찰입니다.
2003년
7월 20일 의무경찰 465기 황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떤 고위공직자들도 오지 않았던 서해교전 전사자 영결식에
오셔서 헌화를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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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앞서가신 분들의 나라 사랑은 남아 있는 저희가 뜻을 본 받아 이어나아가야 할겁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기도를 하려합니다..이자리에 있을수 있게 해주신분들께...
돌아가신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신조의 자서전과 다소 차이가 있군요. 김신조 자신도 말하길 종로경찰서장은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홀로 용감히 뛰어든 것이 아니라 딱 와서 하는말 '내가 누구인지 아나? 나 종로경찰서장야 너희들CIC라면서 나를 몰라 보나'했답니다.
본인도 말하길 만약 무장 수행원 몇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리고 검문방식이 좀더 신중했더라면(솔직히 나 종로 경찰서장이야 하면 일반시민들이나 떨지 적군들은 동요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당시에는 일반 시민들은 순경만 봐도 떨었답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인된 김신조는 그 당시 권위적인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암울했던 시대모습이었다고 설명하더군요(그리고 권총 빼들지도 않았답니다.) 시내버스 오인은 다 사실이라고 합니다. 한쪽의 이야기 보다 양쪽 모두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번 써 봤습니다.
네.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 김신조목사님은 그때 이후로 새 삶을 사셔서 충남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최규식 총경이 그곳에서 124군부대를 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더욱더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최규식 경무관....어렸을때 삼청공원에 놀러가면서 동상을 뵈었던 분이지요. 그 동상을 보면서 뭐라고 할까? 개인적인 당시 주변에서 봤던 것과 연결되어서 많은 상념에 잡히더군요..참 대단한 분이셨지요. 서울까지 올때 특수부대라는 호통에 다들 비켜 줬는데 끝까지 안비켜 주었던 분이니까요...
고압적인 자세가 되었던 아니었던 간에 무장공비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막아선 그분의 용기만은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깜찍이님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경찰에서 거동수상자가 특수부대를 라고 하면서 검문을 통과하려고 하면 현장에 나가서 지휘할 경찰서장이 전국에 몇명이나 될까요? 2. 최규식 총경이 그 곳에서 CIC라고 해서 방법에 상관없이 통과 시켰을 때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질문3. 다른곳은 CIC라는 이야기에 통과시킨 사람과 시키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뭔가요? 만약 최규식 총경이 CIC라는 이야기에 "어서 가십시요"라고 했다면 최규식 총경은 아마 지금도 살아있지 않았을까요? 질문4. 김신조씨는 이땅에 정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적으로 했던 행동에 대하여는 최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합리화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드시지 않나요? 질문4를 드리는 이유는 위의 사진에 나오는 기자회견을 지휘했던 당시 방첩부대 외사과장 XXX중령 (대령 예편)님의 말씀과 김신조씨의 자서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