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이 하나둘 터지는 이른 봄! 시샘이라도 하는 걸까. 날카로운 바람에 온몸이 움츠러든다. 이맘때쯤엔 입맛 돋우는 봄나물에 따끈한 찌개 밥상이 당긴다. 그중에서 청국장찌개는 맛뿐만 아니라 각종 성인병 예방과 더불어 피로회복에 좋아 나른한 봄철의 건강식으로 안성맞춤이다.
청국장의 역사는 옛 고구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누비던 우리 조상은 콩을 삶아 말안장 밑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었는데, 말의 체온으로 삶은 콩이 발효된 것을 시(豉)라고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청국장의 원조다. 이후 청국장은 한반도로 내려와 서민들의 유용한 단백질 식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또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네팔, 일본 등에까지 퍼져나가 청국장 문화를 형성했다. 간장, 겨자, 날달걀을 넣고 비벼 먹는 일본의 낫토도 일종의 청국장이다.
서울지하철 3호선 양재역 근처, 외교안보연구원 맞은편에 있는 ‘진주청국장’은 지난 30여년간 명성을 떨쳐온 청국장의 명가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청국장 끓이는 맛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음식 맛이란 향이라고 했던가.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여 나오는 이 집 청국장에선 쿰쿰하고 역한 냄새가 아니라 누구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만큼 구수한 향과 특유의 깊은 단내가 물씬 난다. 청국장찌개를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으면 콩이 몽글몽글하게 씹히면서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좋아 숟가락질이 절로 바빠진다. 특히 간이 세지 않아 밥 없이도 술술 넘어가고 곁들여 나오는 오색나물과 함께 밥 비벼 먹기에도 좋다.
진주서 시작해 창원 거쳐 서울로
창업주 조영희(77)씨는 이런저런 장사를 했지만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음식 솜씨가 좋으니 ‘먹는 장사’를 해볼까 궁리하던 중 문득 시어머니가 아랫목에 띄워 끓여주던 청국장찌개가 떠올랐다. 그 시절 경남에서는 청국장을 ‘뜸북장’이라고 불렀고 청국장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도 않았다. 청국장을 직접 띄워 먹는 사람도 드물었는데 조씨의 시어머니는 유독 청국장 끓여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갖은 야채와 두부를 넣어 끓여낸 청국장찌개 한 뚝배기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던 기억에 그 길로 진주에 청국장집을 열었다.
1986년 시어머니의 맛을 재현한 조씨의 청국장찌개는 청국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진주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가게가 몇 년 동안 문전성시를 이루자 욕심을 내서 큰 도회지인 창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도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때마침 웰빙 바람을 타고 청국장의 인기까지 치솟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서울로 가자는 남편의 제의에 조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995년 여의도로 입성했다. 경남 창녕 태생인 조씨의 손맛은 여의도의 방송인들과 국회의원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았고, 특히 영남권 출신 인사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진주에서 서울까지 진출해 승승장구한 지 십 년 만에 시련이 닥쳐왔다. 건물주가 가게를 비워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청국장 특유의 냄새 때문에 항의를 받을 때마다 꿋꿋이 버텨왔는데, 그간 닦아놓은 터전을 하루아침에 내놔야 하니 실의에 빠졌다.
그동안 카운터를 보면서 조씨를 돕다가 대를 물려받은 딸 박홍전(49)씨는 모험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2007년 박씨는 과감히 여의도를 떠나 서초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여의도점에 비하면 규모가 반도 안 되지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홀가분했다고.
“단골손님들 덕분에 서초동에도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어요.”
박씨는 여의도 시절 단골손님들이 일부러 찾아와 입소문을 많이 내주었다면서 감사한 마음을 내비친다. 지금도 이 집 손님 3명 중 1명은 여의도 때부터 오던 분들이다.
▲ 조영희씨와 딸 박홍전씨.
제대로 띄운 청국장이 핵심
진주청국장은 점심시간이면 몇 차례씩 회전이 되고 저녁엔 예약을 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옛 맛을 찾아온 연세 지긋한 분들 가운데 젊은층 손님들도 종종 눈에 띈다. 청국장 냄새가 역하지 않은 덕분이다. 우리의 전통 발효 음식을 찾는 외국인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유명 관광책자에 실리면서 일본인 손님이 꽤 된다.
“낫토만 알던 일본인들이 우리 청국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껴요.”
맛있는 청국장찌개는 무엇보다 제대로 띄운 청국장이 중요하다. 이 집에선 우리 콩을 사용해 전통 방식대로 잘 띄워 부드러운 맛이 특히 좋다. 풋고추와 애호박, 양파, 두부 등을 넣어 끓이는데 청국장 자체에 소금간이 조금 되어 있기 때문에 찌개를 끓일 때는 일절 간을 더 하지 않는다. 때문에 간이 짜지 않고 슴슴해서 청국장 본연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청국장찌개를 비롯한 이 집 음식의 깊은 맛은 정성껏 우려낸 육수에서 나온다. 육수를 낼 때 멸치 대신 디포리를 쓰는데, 반짝반짝 윤이 나는 좋은 것을 사다가 햇볕에 다시 한 번 말린다. 디포리와 다시마, 무, 파, 양파를 넣고 푹 끓여 맑게 걸러 만든 육수는 비린내 하나 없이 은은한 감칠맛과 부드러운 맛이 좋다. 매일 아침 만든 이 육수로 청국장 국물을 잡는 것은 물론 육수가 필요한 모든 반찬에 사용한다. 또한 진주에서 가져오는 집간장과 박씨의 고모가 담근 된장, 통영의 오랜 단골집 젓갈로 간을 맞춰 토속적인 음식 맛을 잘 살려내고 있다.
딸에게 가게를 물려준 뒤에도 어머니 조씨는 여전히 하루도 빠짐없이 주방에 서서 한결같은 맛을 내고 있다. 대물림받은 딸 박씨도 가락시장에서 매일 신선한 재료를 가져와 어머니와 주방에서 알콩달콩 음식 만드는 일을 함께한다.
“한식 밥상은 손이 너무 많이 가요.”
그동안 어머니 손맛에 입맛은 길들여졌지만 막상 한식 밥상을 차려내는 일은 녹록지 않다고 한다. 젊은 시절, 카운터만 보던 딸 박씨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어머니의 요리비법 노트를 완성해 가고 있다. 그녀에게 진주청국장은 가족이고 인생이다. 그녀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맛집들을 돌면서 벤치마킹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한 음식을 대접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블랙푸드인 서리태 청국장을 개발해 내놓았다.
박씨는 ‘청국장찌개’와 함께 맛깔스러운 한상 차림인 ‘정찬’을 대표메뉴로 꼽는다. ‘정찬’은 돼지보쌈, 코다리찜, 청포묵, 노랑호박전, 오색나물 등을 곁들이고, 청국장을 비롯한 각종 찌개류를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어 모임이나 가족외식 메뉴로 인기가 높다. 1만원 중반대의 착한 가격에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내다 보니 재료비가 오를 때마다 박씨의 고민도 깊어진다. 그녀의 요즘 바람은 한 가지다. “손님들에게 부담 없는 가격으로 어머니의 손맛을 오래오래 차려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