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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후줄그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저를 한 형제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저기요! 여기 사무실이 어딘가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양신부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양신부입니다.”
형제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시더니 그러셨습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농담하지 마시고 빨리 알려주시죠.”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웃기게도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그리스도 몰입 연기를 위해 성령의 술이 꼭 필요한 이유>
복음: 요한 14,6-14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만날 때 성모님 태중에 하느님 아드님이 계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힘으로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의 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그 일이 이뤄지는지 깨닫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1-43)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두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잉태되는 장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범죄도시로 18년 만에 돈과 무관하게 살다가 지금은 스타가 된 장이수 역할의 ‘박지환’ 씨가 유퀴즈에 나와 갑자기 잘 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연극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참가하면 항상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왜 그런지 카메라에 녹화된 내용을 보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어떤 매력도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알바한 돈으로 몇 대 사서 직접 오디션 장면을 녹화해 보았습니다. 자신도 자기 같은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캐릭터가 온전히 묻어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연기에 좌절을 느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카메라를 끄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녹화된 자기 모습을 보았는데, ‘앗,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연기 잘하는 자연스러운 배우가 하나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 매력이 있었고 캐릭터가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캐릭터를 가리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카메라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었다면 이제 막걸리가 그를 완전히 그 캐릭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아의 경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짝 눈치를 챘습니다.
‘카메라는 요물이구나! 웬만큼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거는 받아주지도 않는구나.’
그때부터 본 오디션은 다 합격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진짜 캐릭터가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려면 자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은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도 그와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필립보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와 안드레아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한 면이 그리스도와 매우 닮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도와 닮은 면이 있어서 예루살렘의 첫 주교가 됩니다. 그를 보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술기운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기운에 나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병헌은 연기 천재입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만 그 캐릭터의 감정선에만 집중합니다. 대사를 틀리면 다시 찍으면 됩니다. 그러나 틀에 매이면 캐릭터가 죽고 자기가 삽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연기가 어색하게 되고 분심들게 됩니다. 또 현장에서는 긴장하면 안 됩니다. 이완되어야 긴장을 만들지 않고 캐릭터 정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잔하고 온 사람과 같습니다. 연기할 때 캐릭터만 살고 최대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평화가 옵니다. 저도 강론하거나 강의 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직은 자아가 강해서 제가 보면 몸이 오그라듭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져 가려 합니다. 우리도 내 안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술에 취해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인물 몰입형 연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4,6-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하고 청한 사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코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 하신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즉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아드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얼마 전에 철학자 니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최하급 여행자는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등급은 스스로 관찰하는 여행자이고, 세 번째 등급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입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이고,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여행자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여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으로 살고 있을까요? 수준 낮은 수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습득한 지혜를 일상에서 남김없이 발휘하며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십니까?
여행자의 등급처럼 주님의 제자 되는 길 역시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주님의 참 제자에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수동적인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 눈치만 보면서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남 하는 대로만 살면서 여기에 굳이 어떤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남’처럼 사는 삶이 아닌 ‘나’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남처럼 사는 삶을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만의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보고 느끼는 주님의 손길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 나의 의지를 내세워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주님 제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뵙기를 바라는 필립보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예수님과의 전교 활동을 통해 흔들리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를 보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하느님을 보여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일상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린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단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욘 포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14,10)
삼위일체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신비 체험 안에서든
그분에게서 나와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 안에서든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랑 안에든
자기의 처지에 맞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네.
복음 말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