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으로 종2품인 형조참판 벼슬까지 오른 반석평에 대한 글을 실어봅니다.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아들 없는 집에 양자로 들이게 해 과거 시험을 치러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한 주인도 귀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주인의 자제에게 길에서 큰절을 올리며 벼슬길에 오르게 한 반석평도 대단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이라는 인물이 나왔으니 얼마나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감동입니다. 사람됨을 알아주고 인재로 등용하는 인품과 자신이 받은 은혜를 보답하려는 귀한 마음이 이 시대도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노비가 병조참판이 된 반석평’ 조선의 신분은 양인, 중인, 상민, 천민 등 4개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천민 계급은 법적으로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천민의 신분을 뛰어넘어 종3품의 관직까지 올랐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이다. 그런 장영실보다 더 높은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 있었다. 그 이름은 반석평(潘碩枰)이다. 반석평의 최고 관직은 종2품인 형조참판. 형조참판은 오늘날 법무부 장관이다.
어떻게 노비에서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고 참판까지 올랐을까? 그 과정에 대해 역사는 말합니다. 편견없는 주인을 만나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반석평이 노비 신분일 때 좋은 주인을 만난 것이다.
주인의 이름이 알려져 있진 않으나 국왕을 보필하는 최고 책임자인 재상이었다. 그는 어린 노비의 총명함을 빨리 알아차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남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르면 주인은 반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아끼어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반석평이 노비의 신분으로 재능을 쓸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아들이 없는 반서린(潘瑞麟)의 양자로 보냈다. 노비에서 신분이 상승한 반석평은 공부에 힘써 연산군(燕山君) 10년 (1504년)에 열린 소과 생원 시험과 중종 2년(1507)에 열린 대과 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종2품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은혜를 잊지 않은 반석평. 승승장구하던 반석평과 달리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주인의 자식은 관직에 운이 없었다. 거기다 주인의 집은 가세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반석평은 길을 가다가도 주인집 자제를 만나면 자신의 지위에 개의치 않고 진흙 길 위에서도 절을 하였다.
또 주인의 자제들이 궁핍 해지자 자신의 신분을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고백하여 자신의 관직을 그들에게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반석평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왕은 특례를 들어 신분을 숨긴 반석평을 처벌하지 않았다.
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나라에 쓰일 기회를 제공한 주인집의 자제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반석평은 출세한 후 주인집 자제들을 만나면 껄끄러울 수도 있었지만,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았다. 신분은 미천했으나 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은 반석평의 숨기고 싶었던 과거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재능을 알아준 주인을 만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반석평. 그는 관직에 나가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양반들도 오르기 힘든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가진 그는 주인에게 은혜를 갚았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의 조상이다. (반기문 : 제33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으며 제8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을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것이 그의 외교관 인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2006년 10월 13일 192개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만장일치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그가 국제정치의 본산지인 유엔의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은 한국 외교사를 빛내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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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 무더운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ㅎ~~추우나 더우나 난 그냥 의무적으로 글을 옮긴것 같애요
남이 읽어보든 말든 내 지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니까.
치매 예방에 많은 이익을 봅니다.
오늘도 뒷글 주셔서 감사 합니다. 무더위 잠간 참으면 지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