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전술'에서 '치킨 게임'으로, 혹은 '눈치 게임'으로.
러시아가 17일 밤 12시부로 '흑해 곡물 협정'이 끝났다고 공식 발표함에 따라 러-우크라 양측은 이제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자동차가 되든, 서로 상대방의 눈치를 계속 살피든, 새로운 대치 국면으로 들어섰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7일 "러시아의 협정 탈퇴에도 불구하고, 흑해 수출 항로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두렵지 않다. 러시아 없이도 흑해 항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며 "선사나 곡물 거래 기업들로부터 우크라이나와 튀르키예(터키)가 흑해 출항과 통과를 허용한다면 곡물을 계속 수송할 준비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또 "'흑해 곡물협정'이 러-터키-유엔, 우크라-터키-유엔 간의 각기 다른 합의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러시아의 협정 탈퇴가 우크라이나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곡물 선적/사진:Суспильне 스트라나.ua
그러나 러시아는 협정 탈퇴와 동시에 그동안 민간 선박의 흑해 입출항 검사및 허가를 해온 이스탄불의 공동조정센터(Joint Coordination Center, JCC)에서 철수하고, (곡물 수출항이 있는) 흑해 북서쪽 해안을 다시 임시 위험 지역으로 설정한다고 발표했다. 선사나 곡물 관련 기업들에게 '앞으로는 안전 운항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알아서들 하라'는 명백한 경고 신호다.
'폭풍 전야'와 같은 17일 밤 흑해 해상은 적막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흑해상에서 우크라이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의 한 척도 없었다. 반면 다뉴브강 어귀에서는 선박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선박들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상. 오른쪽이 크림반도, 왼쪽은 다뉴브강 하구. 그 사이의 우크라 흑해연안에는 배의 움직임이 일체 없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17일 JCC로부터 입출항 허가를 받고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로 들어온 선박은 16일 마지막으로 오데사 항구를 떠났다고 보도했다. 이 선박은 지난 6월 28일 JCC의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농업협회는 러시아 측이 6월 26일부터 흑해로 들어오는 선박 검사를 중단하면서, 이집트와 중국, 방글라데시, 터키 등으로 곡물을 실어나를 20척의 선박이 터키 영해에서 발이 묶였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장담 먹힐까?
젤렌스키 대통령의 주장대로, 곡물 선적 선박이 러시아의 협정 탈퇴에도 불구하고 흑해상으로 들어올까? 또 안전할까?
이론적으로 민간 선박은 우크라이나와 터키의 동의 아래 흑해 진입이 가능하다. 러시아가 선박 검사를 포기한 만큼,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무기도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다.
다만, 그 선박의 운명은 러시아의 대응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안전한 운항이 되거나 △운항 과정에서 무력에 의해 간섭을 받든가 △흑해 항구에 입항한 뒤 공격을 받는 경우로 나눠볼 수 있다. 미국과 나토(NATO)가 민간 선박의 안전 운항을 위해 나서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흑해를 항해하는 곡물 곡물 선적 선박/사진출처:터키 ahaber.com.tr 영상 캡처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 조정관은 러시아의 협정 탈퇴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미국은 민간 선박을 호위하기 위해 흑해로 군함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곡물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은 이제 철도와 트럭 등 육상 운송만 남았다"고 밝혔다. 또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앞으로 더 어렵고 덜 효율적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간 선박이 흑해에 진입하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더라도, 군사적으로 보호받을 장치는 일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물론, 러시아가 민간 선박을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최악의 경우 침몰시키면 전 세계로부터 더 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특수 군사작전에도 불구하고,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글로벌 사우스'권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도 추락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일 전세계를 향해 부드러운 말투이지만, 대놓고 '러시아의 허가없이 흑해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이날 "흑해 곡물 협정의 틀 안에서 안전 운항을 보장받지 못하면, 특정한 위험이 발생한다"며 "그 곳은 전투 지역과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국가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러시아는 이 경고를 입증이나 하듯, 17일 밤 흑해의 오데사와 니콜라예프 항을 공습했다. 우크라이나측은 러시아 칼리브르 순항 미사일의 잔해가 오데사 항구에 떨어졌다고 말했지만, 자세한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러나 CNN은 "오데사에서 네 차례의 강력한 폭발음을 들었고 항만 지역에서 거대한 불꽃을 보았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협정 탈퇴 후, 흑해 항만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이 우크라이나 방공망에 의해 여의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날 공습으로 그같은 기대는 깨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데사 폭격 CNN 보도/캡처
러시아는 이날 공습을 크림대교 폭파 사건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다리를 공격한 수상 드론이 발사된 기지를 공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실장은 달리 해석했다. "미사일과 자폭용 드론을 동원한 오데사와 니콜라예프항 야간 공습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방해하고, 무려 4억 명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무도한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의 공습은 크림대교 폭파에 대한 보복 뿐만아니라 선주들에게 우크라이나 항구로 선박을 보내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흑해 진입 선박을 위협하는 또다른 요인은 흑해 상에 떠도는 기뢰다.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가 (특수 군사작전 개시 전) 흑해 연안에 설치한 수량 미상의 기뢰가 위치를 이탈해 흑해상에 떠돌고 있다"고 엄포를 놨다. 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거짓 깃발 작전'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러시아 측이 흑해 수역에 의도적으로 기뢰를 부설한 뒤, 민간 선박이 기뢰에 부딪칠 경우, '우크라이나 탓'이라고 몰아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선주와 보험회사들의 계산은?
사실 여부가 어떻든, 이같은 위험 천만한 상황에서 선주들이 과연 흑해 운항이라는 도박을 할까? 또 영국의 로이드(Lloyd's) 등 글로벌 보험사가 이들에게 해상 보험을 유지할까?
우크라이나 매체 'rbc 우크라'(РБК-Украина) 러시아어판은 17일 덴마크 노덴(NORDEN) 해운 그룹의 COO인 크리스티안 크리스텐센은 "흑해 협정의 연장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주들은 이제 우크라이나 항구에 들어가는 것을 자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도 "보험사들은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든, 보장을 중단하든, 하나를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드 등 주요 보험사들은 전쟁 위험에 따르는 추가 보험료는 7일마다 갱신한다. 앞으로 흑해 진입시 선주들이 부담해야 하는 보험료는 당초 예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해상 화물 및 군사 위험에 대한 보험은 화물당 최대 5천만 달러를 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 6월 5억 4,700만 달러의 보험 기금을 마련했다며 보험 위험을 대신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미콜라 솔스키 우크라이나 농업 정책부 장관은 "러시아가 협력하든 말든, 우리는 이 보험 기금으로 흑해 수출 항로를 계속 열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전쟁 중인, 더욱이 재정 적자로 서방에 계속 손을 벌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약속을 믿을 선사들은 별로 없다. 유일한 탈출구가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흑해 곡물 수출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인데,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가 기댈 곳은 터키다.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17일 "푸틴 대통령이 흑해 곡물 협정의 연장을 원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하칸 피단 외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회담에서 진전이 있을 것으로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페르시아만 연안 걸프국가 순방에서 복귀하는 19일 푸틴 대통령과 대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측의 '사보타주'로 다리 경간 일부가 뒤틀리고 무너진 모습/크림 24 텔레그램 캡처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제안에 순순히 응할 지 의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크림대교까지 폭파한 상태에서 빈 손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굴욕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게 뻔하다. 한때 푸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친 '바그너 그룹' 텔레그램 채널들도 이미 "크림대교가 폭파된 뒤 크렘린이 '흑해 곡물 협정 연장'을 수락하는 것은 매우 굴욕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남은 것은 러시아측의 요구 일부를 들어주면서 설득하는 방안이다. 러시아는 협정 종료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러시아)와 관련된 협정 내용이 이행될 경우 즉시 복귀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러시아의 요구 사항은 러시아농업은행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국제결제망/편집자) 연결과 암모니아 수출 루트 확보 등이다. 급한 대로 하나라도 서방 측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협정 복귀의 명분이 된다. 그러나 서방이 대러 금융제재의 핵심인 SWIFT 연결을 쉽게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서방 간의 '치킨 게임'은 생각보다 오래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