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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 용기 내어 꾸짖으라고 하시는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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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용기 내어 꾸짖으라고 하시는데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와
나에게 지은 남의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내게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용서하는 것만 생각하거나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하기 전에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남이 내게 지은 죄를 꾸짖기 전에 내가 그에게 지은 죄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 말고도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에 대해서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지은 죄에 대해서만 반성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더라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에
그것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겨우 애씁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있으니
그 죄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두 단어 ‘부지불식간에’와 ‘조심’에 대해 유의합니다.
‘부지불식간에’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사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내 행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라는 것을 아예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조심(操心)이란 방심(放心)의 반대말로서 ‘操’자가 ‘잡다’ 또는 ‘쥐다’는 뜻이니,
방심하지 않고 곧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을 다잡거나 꽉 움켜쥔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음에 대해
방심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용서 못지않게 꾸짖는 것도 해야 하고 잘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꾸짖는 것이 실은 더 쉽지 않고,
잘 꾸짖는 것은 더 쉽지 않기에 우리는 꾸짖지 않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나도 죄를 짓는 놈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 주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빼주려는 것만 같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남의 죄를 감히 꾸짖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된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하는 것보다 꾸짖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어쩌면 더 큰 사랑이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용기를 낼 필요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고
반드시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많은 기도 뒤에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차오르도록 기도하고,
내가 꾸짖거나 충고할 때 그가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한 뒤에.
이런 준비를 거쳐서 잘 꾸짖는 사람은 용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용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용서는 이미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으라고 하셔도
저는 감히 꾸짖을 사람은 못되고 충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감히 꾸짖으라시는데 저는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는 오늘 저입니다.
사랑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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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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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가 없다.”고 고백하였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유혹은 극복하면 은총이고 넘어가면 죄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때때로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지만, 유혹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에게 유혹은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우리는 유혹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당신에게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하여도“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하시며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한 자비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그리고 누군가에게 여러 번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를 청했던 자기를 기억한다면 남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니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것에 대해 오히려 용서를 청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는 결정적인 상처가 될 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내가 잘한다고 생각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한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 용서해 주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신앙에서 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평화와 기쁨,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용서가 어렵다면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미운 상대를 만나 괴로워하지 말고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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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휴가 중에 동창 신부님의 숙소에서 머물렀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내어준 동창 신부님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의 성격만큼이나 방도 아주 정갈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선종사제들의 사진이 담긴 책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선종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부터 150번째 선종 사제까지의 사진이 담긴 책입니다. 신부님들의 사진 아래에는 출생 연도와 선종 연도가 있었고, 신부님들의 사목 성당이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모든, 신부님들의 기록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고, 신부님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온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침실 옆 작은 탁자 위에는 묵주가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매일 기도하였을 신부님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숙여졌습니다. 신부님의 서가에는 ‘도교와 그리스도교,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와 같은 책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사상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키웠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을 따르려는 신부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숙소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얻은 것도 좋았지만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의 영적인 그늘에 쉬다 온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손님 신부님들이 오면 가끔씩 뉴욕의 제 숙소를 내 줄 때가 있었습니다. 며칠 쉬다가 갈 수 있는 숙소는 되었겠지만 제 방이 영적인 그늘이 되어 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제 방에는 벽걸이형 시계가 있고, 그 아래에는 성당 달력이 있습니다. 매달 달력을 넘기지만 큰 의미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달력에 묵주를 걸어 놓았지만 묵주를 꺼내서 기도한 적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 온 책도 있고, 서점에서 주문한 책도 있지만 친구처럼 형광 팬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책상에 놓인 노트북으로 매일 강론을 준비하고, 말씀을 묵상하지만, 더 많은 시간은 검색으로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숙소를 보면서 세상과의 소통 시간은 줄이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더욱 늘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의 몸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네가 자주 찾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네가 주로 사용하는 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의미가 있지만 신심불이(身心不二)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도 이런 글을 늘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네가 걷는 그 길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혹여 누군가 저의 숙소에 머물면 영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합니다.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종교를 선택하려고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왕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를 믿어라!” 이 말은 천주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많은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예비자들에게 성당에 오게 된 이유를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선교해서 온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이 열심히 살고, 성당에 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진실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종교가 없었을 때도, 이왕에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회를 택하겠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사제들을 비롯한, 천주교회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솔선수범을 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엄숙한 천주교회의 분위기는 분주하고, 바쁜 현대인들에게 삶의 안식과 평화를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칼 날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넓은 방이라도 쉽게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로 저를 믿어 주는 분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실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저와 함께하는 분들을 끝까지 믿어 주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말과 행동은 좀 더 신중해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ness’입니다. 용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주는 것만이 용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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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단순하게 묻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십자가에 달려계신 제 눈앞에 주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지금 같아서는 못 하겠습니다. 한두 번은 가진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서 참아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라니요. 일곱 번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가만히 십자가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 깊은 곳에서 아주 천천히 따뜻한 물결이 일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결은 살포시 말을 건넵니다.
지금 못해도 괜찮아. 지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라. 왜냐하면 너도 그만큼 아팠으니까.
내가 부탁하는 것은, 지금이 아닐지라도 용서하기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거야. 오늘도 용서하기에 도전하고, 내일도 도전하고, 그다음 날도 도전하고. 그렇게 실패하다 보면 언젠가 어느 날 갑자기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마음의 불길이 사라졌음을 알게 될 거야.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몹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포기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은 용서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 마음에 상처가 깊기 때문입니다.
그저 포기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용서를 향해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구겨져서 좋아.
그게 매력인걸.
여름옷이 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티셔츠도, 반바지도….
셔츠들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린넨 셔츠를 접습니다.
린넨은 잘 구겨집니다.
아마 내년 여름에 꺼내면
린넨 셔츠는 꾸깃한 얼굴로 저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꾸깃함이 린넨의 매력입니다.
꾸깃하기에 까끌거리고
꾸깃하기에 시원합니다.
꾸깃하기에 가볍고
꾸깃하기에 멋스럽습니다.
린넨은 자기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그런 매력 있을꺼예요.
꾸깃!
꾸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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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마지막 걸음을 못 내딛게 뒤로 불러들이는 것, 이게 유년 시절 사랑의 기억이거든요. 얘들은 많이 사랑해 줘야 합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그 절대적인 사랑은 어디가지 않거든요. 그게 몸에 남아 있어서 그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괴테는 죽기 2년 전에 인생은 결국 ‘사랑이 살린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랑은 지금 삶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열쇠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의 크기는 어마어마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랑의 확장성은 대단합니다. 나만이 아닌 우리가 지금 삶을 잘 살게 해주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찾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아이가 너무 예쁩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도 때로는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여전히 예쁩니다. 신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때 아이들은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다 예쁩니다. 예쁘니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랑의 기억을 많이 남겨 주고 싶습니다. 사랑받은 아이가 또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바로 용서입니다. 자기에게 잘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서기란 쉽지 않지요. 그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모두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만이 우리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으며, 사랑만이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갖고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 속에 살면서 무조건 용서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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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이란 자신에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싹트는 것이다(윌리엄 조지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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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다
-지혜의 사랑, 지혜의 훈련, 지혜의 습관-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희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아시나이다.”(시편139,1-3)
오늘 화답송 시편 139장은 제가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24절까지이며 우리는 매4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 시간에 노래합니다. 이런 사랑의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문학에 속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가는 것이 지혜의 첩경이요, 이런 지혜야 말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의 책인 성서를 사랑합니다. 새삼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시편전례공동기도와 미사공동전례 시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시간, 지혜를 훈련하는 시간, 지혜를 습관화하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공동전례기도 수행에 온힘을 다할 때 지혜로워질 수 뿐이 없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시작도 지혜를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할 말씀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말그대로 사랑의 지혜입니다. 마치 의인화된 지혜로 그대로 주님의 현존처럼 생각되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모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영혼과 육신이 깨끗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지혜로 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시간이요, 이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 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신다.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참으로 이런 지혜로서 충만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공동생활에 참 필요한 지혜 셋을 가르쳐 주십니다. 추상적인 애매한 지혜가 아니라 구체적 공동체 삶의 현장에서의 실천적 지혜입니다.
첫째,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 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걸림돌로 알게모르게 이웃을 죄짓게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스스로 조심하고 깨어 있어,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하시니 이 또한 지혜의 훈련입니다.
둘째, 형제들을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 지혜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찌 일곱 번 뿐이겠습니까? 비록 용기 부족이나 무지로 ‘회개한다’는 말은 못하더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내심 그를 용서한다면 언젠가 때가 되면 깨달아 회개할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5절,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셋째, 믿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이고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내의 믿음, 경청의 믿음, 겸손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 비로소 존엄한 인간의 품위입니다. 믿음의 빛, 믿음의 지혜요 이런 믿음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믿음의 초보자입니다.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날로 튼튼히 합니다. 그러니 부단히 청해야 할 믿음의 은총, 믿음의 힘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새삼 참 권위는 이런 믿음의 권위임을, 더불어 우리 삶의 여정은 날로 성장, 성숙해져할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지혜와 믿음의 훈련과 습관과 함께 가는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혜로운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시편 화답송 139장 나머지도 너무 은혜로워 나눕니다. 이런 하느님을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아는 것이 그대로 참 지혜입니다.
“주님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몸을 잡아주시리다.”(시편139,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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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들임과 물듦>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믿음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희망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사랑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살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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