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
코헬렛, 톨스토이 그리고 붉은 암소
이번주 파라샤의 서두를 장식하는 ‘파라 아두마(פָּרָה אֲדֻמָּה, 붉은 암소)’에 관한 명령은, 미쯔보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두의 문구인 ‘쪼트 후카트 하-토라(זֹאת חֻקַּת הַתּוֹרָה, zot chukat ha-Torah)’는, 이것이 토라에 나오는 ‘호크(חוק, chok)’의 가장 대표적인 예, 즉 그 논리가 모호하고 어쩌면 헤아릴 수조차 없는 법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는 시신과 접촉했거나 시신과 일정한 근접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시신은 부정함의 주요 원천이며, 시신이 산 사람에게 초래한 부정함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사람은 7일 동안 지속되는 정화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는 성막이나 성전의 경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정화 과정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제사장이 3일째와 7일째에 해당자에게 “정결의 물”이라 불리는 특별히 준비된 액체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흠이 없고, 일한 적이 없으며,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붉은 암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 소는 의식적으로 도살되어 진영 밖에서 불태워졌습니다. 불에 삼나무, 히솝, 주홍색 양모를 더한 뒤, 그 재를 “생수”, 즉 맑은 물이 담긴 그릇에 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접촉하여 부정해진 사람들에게 뿌려진 물이었습니다. 이 의식의 다소 역설적인 특징 중 하나는, 비록 부정된 자들을 정화시켰지만, 정결수를 준비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은 오히려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 의식은 성전 시대 이후로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보통 “법규”로 번역되는 ‘호크(חוק, chok)’가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른 예로는 고기와 우유를 함께 먹는 것, 양모와 리넨을 섞은 옷(샤트네즈, שעטנז)을 입는 것, 그리고 밭에 두 종류의 곡물을 함께 파종하는 것(כִּלְאַיִם, 킬라이임)을 금지한 규정이 있습니다. 후킴(חֻקִּים- 호크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매우 상이한 해석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정의는 ‘호크(חוק)’가 우리가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없는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타당하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줄 우주적 지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혹은 라브 사아디아 가온이 말한 것처럼, 단지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상을 주기 위해 내려진 명령일지도 모릅니다. (Saadia Gaon, Beliefs and Opinions, book III.)
현자들은 이방인들이 사회 정의(מִּשְׁפָּטִים,미쉬파팀)나 역사적 기억(עֵדוֹת, 에도트)에 기반한 유대 율법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기와 우유를 함께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계명들은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식했습1니다. ‘후킴’은 “사탄과 세상의 민족들이 조롱하던” 법들이었습니다. (Yoma 67b)
마이모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의 계명 중 비이성적인 것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후킴(חֻקִּי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 계명이 제정된 원래의 맥락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각 계명은 어떤 우상 숭배 관행을 거부하고, 이에 대항하여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관행들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계명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느끼는 것입니다. (The Guide for the Perplexed, III:31)
13세기에 나흐마니데스가 채택하고, 19세기에 삼손 라파엘 히르슈가 더욱 명확히 설명한 세 번째 견해는, ‘후킴(חֻקִּים)’이 자연의 완전성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된 법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에는 그 자체의 법칙과 영역, 경계가 있으며, 이를 넘어서면 신이 창조한 질서를 모독하고 자연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성(양모)과 식물성(린넨) 직물을 함께 사용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동물(우유)과 죽은 동물(고기)을 섞지 않습니다. 붉은 암소에 관해 히르쉬(Hirsch)는 이 의식이 인간의 죽음을 상기시켜 오는 우울함으로부터 인간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후킴(chukim)’은 이성적인 뇌인 전두엽 피질을 의도적으로 우회하도록 고안된 명령들입니다. ‘호크(chok)’라는 단어의 어근은 ‘h-k-k’로, “새기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글씨는 표면에 쓰이지만, 새기는 행위는 표면보다 훨씬 더 깊숙이 파고듭니다. 의식은 마음의 표면 아래 깊은 곳까지 파고들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며,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변연계, 즉 감정의 뇌가 있습니다. 또한 편도체에 위치한 잠재적 위험에 대한 매우 강력한 반응 체계가 있어, 이를 통해 우리는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싸우게 됩니다. 인간의 조건에 부합하는 도덕 체계는 인간의 조건이 지닌 본질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두려움에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품고 있는 가장 깊은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라 로슈푸코가 말했듯이, “태양도 죽음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코헬렛(קֹהֶלֶת, 전도서)』의 저자만큼 죽음과 그것이 삶에 드리우는 비극적인 그림자를 깊이 탐구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같으니, 둘 다 같은 운명을 맞이하며, 한 쪽의 죽음은 다른 쪽의 죽음과 같고, 그들의 영은 같으며, 사람이 짐승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이는 모두 헛된 숨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같은 곳으로 끝나니, 모든 것이 흙에서 나왔고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 (전도서 3:19-20).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코헬렛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어떤 감각도 앗아갑니다. 우리는 죽은 후, 생전에 이룬 업적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은 미덕을 조롱합니다. 영웅은 젊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고, 겁쟁이는 노년까지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비극적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구조가 찢어지는 것이며, 어쩌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가장 단순하고도 냉혹한 의미에서 더럽힘을 가져옵니다. 즉,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와 하나님의 영원함 사이에 심연을 열어놓습니다.
암소 제사는 바로 이러한 실존적이고 근본적인 두려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물 자체는 길들여지지 않고 야생 그대로인 순수한 동물적 생명의 가장 뚜렷한 상징입니다. 빨간색은, 양모의 주홍색과 마찬가지로, 피의 색이자 생명의 본질입니다. 나무 중 가장 높은 삼나무는 식물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히솝(우슬초)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 속에서 재로 변했는데, 이는 필멸성을 보여주는 강렬한 드라마였습니다.
그 재는 물에 녹아, 연속성과 생명의 흐름, 그리고 재탄생의 가능성을 상징했습니다.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계속 흐릅니다. 한 세대가 죽어도 또 다른 세대가 태어납니다. 개인의 삶은 끝날지 몰라도 생명 자체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뒤를 이어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이어가고, 우리는 그들 안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삶은 끝없이 흐르는 강과 같으며, 우리의 흔적은 미래로 계속 이어집니다.
현대에 들어 코헬렛이 느꼈던 바를 가장 깊이 체험하고 표현한 사람은 톨스토이였으며, 그는 자신의 수필 『고백(A Confession)』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글을 썼을 당시, 50대 초반이었던 그는 이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두 편인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출간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문학적 유산은 확고했고, 그의 위대함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자녀도 있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건강도 양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무의미함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는 코헬렛의 말을 길게 인용했습니다. 자살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를 괴롭혔던 질문은 이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과학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으나, 과학이 그에게 알려준 것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히 작은 입자들이 무한한 복잡성을 띠며 변이한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과학은 목적이나 의미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다룹니다. 결국 그는 오직 종교적 신앙만이 삶을 무의미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학식과 지혜를 갖춘 이들이 제시하는 합리적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한다.” 필요한 것은 합리적 지식 이외의 무언가이다. “신앙은 삶의 원동력이다. 사람이 산다면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유한함의 환상을 이해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무한함을 믿게 될 것이다. 신앙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의 접촉이 가져오는 오염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성적 지식을 우회하는 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붉은 암소의 의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의식에서 죽음은 생명의 물 속에 녹아들고, 그 물을 뿌려받은 이들은 다시 정결해져 쉐키나(Shechinah)의 성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며, 영원과 다시 연결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붉은 암소와 7일간의 정화 의식을 행하지는 않지만, ‘시바(שבעה)’라는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지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삶과 다시 연결됩니다. 친구와 가족과의 교감을 통해 우리의 슬픔은 점차 사라지는데, 이는 마치 붉은 암소의 재가 ‘생수’에 녹아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상실감을 안고 있지만, 어느 정도 정화되고 깨끗해진 상태로 다시 삶을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께 치유받도록 허락한다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탈무드는 “수감자는 스스로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결의 물을 뿌리기 위해서는 코헨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위로해 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보다 더 깊은 ‘호크(חוק)’의 세계에서 비롯된 믿음은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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