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013년 6월 22일(토) 09시부터 경기 의왕시 내손동소재 갈미한글공원(계원대학교 후문)에서 의왕시연합방위협의회의 주관으로 모락산 전승기념비 참배 행사가 진행됩니다.
이 행사에는 한국전쟁 당시 모락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신 김안일장군(당시 1사단 15연대장)과 김국주 장군(3대대장)등이 함께하시어 전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부대행사로 써바이벌 체험사격, 군 장비전시, 625 사진전, 포토죤 사진 촬영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번 행사에는 특별히 월드 미스 유니버시티 한국 대표(세계평화봉사단)들이 함께하여 모락산 전승기념비에 대한 홍보를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시어 625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고,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 주 최 : 의왕시 연합방위협의회
* 전야 음악회: 6월21일(금) 오후8시, 갈미한글공원 특설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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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시 연합방위협의회(회장 양성훈)는 6.25 한국전쟁 당시 큰 승리를 거둔 모락산 전투의 전사를 사료 조사와 고증을 통해 발굴하였고, 이를 토대로 전승기념비를 설치하였으며, 매년 6월 전승기념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민간단체가 자발적으로 전사 발굴 부터 추모행사 까지 기획하여 진행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시민들의 안보의식을 제고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가족과 함께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전쟁(6.25)과 모락산 지역 전투
의왕시를 일컬어 ‘녹색의왕’ 이라고 하는 칭하는 데 있어 주변의 산(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의왕이 자랑하는 명산 중에 청계산, 백운산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한두 번은 들어본 산이지만 모락산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의왕시민이라면 이 모락산에 관해서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모락산은 어떻게 보면 시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시를 양분하는 듯 하지만 모락산이야 말로 의왕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눈동자처럼 쉬지 않고 시를 지켜보는 모습이 여간 자랑스럽지 않다. 매일 같이 수많은 시민들의 등산코스로 산 하단부의 어디서나 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산을 오르다 목이 마를 만한 곳에는 여지없이 약수터가 자리 잡고 있으면 딱따구리를 포함한 각종 산새와 다람쥐, 산토끼 등이 산행을 더욱 즐겁게 하고 철마다 꽃을 피우는 초목과 무수한 수풀은 ‘푸름’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이렇듯 많은 시민들은 모락산을 의왕시를 대표하는 3대 산중의 하나로 시민들의 건강과 쉼을 주는 안식처로 알고는 있지만 이 모락산이 6.25전쟁당시 치열한 격전지 였던 곳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 듯 하다.
따라서 호국의 달을 맞아 잊혀져가는 6. 25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선혈들이 피 흘려 싸워 찾은 여기 모락산지역 전투를 간추려 보고자한다.
북괴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시를 전후하여 서해안의 옹진반도에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국군방어진지에 포화를 집중시키고 기습 남침을 강행함으로서 대한민국은 손쓸 겨를도 없이 6월 27일 정부를 수원으로 옮기기 시작하였고 연일 남쪽으로 후퇴와 지연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급기야 8월 4일에는 남북 160Km, 동서 80Km의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비장한 현지사수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16일 양일간에 걸쳐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9월 18일, 19일 사이에는 수도 서울 수복과 퇴로 차단작전에 들어갔으며 이후 북진을 계속하여 국군 제 6사단은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점령하여 압록강 물을 받아온 병사의 수통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지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깐 11월 29일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전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약 50~60만 명의 중공군이 산맥을 타고 특유의 인해전술을 펴면서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인명손실을 무릎 쓰고 진격해옴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12월 28일 중공군이 38선을 돌파하고 계속해서 육박해오자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서울을 철수함으로서 서울은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1. 4 후퇴”였다.
유엔군은 평택, 원주, 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인해전술로 밀고 나오던 중공군도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에 많은 손실을 입고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자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대규모의 공세적인 위력수색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모락산 일대에 전개되었던 당시의 전선 상황을 보면 1월 15일 오산탈환, 16일 수원 탈환 등 이후 밀고 밀리는 전투상황에서 1월 26일자로 수원-김량장-이천을 점령한 미 제 1군단 및 제 9군단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는 상황을 전개하였으며, 우리시와 인접한 군포지구의 수리산 전투는 터키여단이 인민군 8사단과 치열한 접전 끝에 적 2개 대대를 무찌르고 2월 4일 수리산을 점령하였으며 그 과정에 중공군 1개 연대의 반격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미 25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 1사단 15연대는 1월 29일 연대 지휘소를 수원 북쪽의 정자리로 옮기고 1월 31일 제 1대대를 오른쪽 공격제대, 제 2대대를 왼쪽 공격 제대로 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던바 제 1대대장(유재성 중령)은 왕곡리 백운사 일대로 진출한 다음 13:00시경 제 2중대를 오른편에 제 3중대를 왼편으로 잘라서 공격작전을 감행할 때 적 1개 대대는 모락산(386고지)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1개 중대규모의 적을 모락산 남방 1km지점에 있는 213고지 일대에 전진 배치하여 아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제 2중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돌격전을 감행하여 오매기일대를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제 2대대는 통뫼-지지대 고개 서편일대에서 237고지(일명 강아지 바위)의 적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좌측 공격제대인 제 5중대는 안골(시청 앞)을 지나 237고지의 서쪽 산기슭(가구단지 뒤편)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237고지에 있던 적 2개 중대는 모락산에 있는 1개 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집요하게 저항해왔다. 그러나 15연대 2대대장(최병순 중령)은 대대의 화력을 집중하며 계속 진격하여 1월 31일 15:00시부터 20분간 육박전을 전개한 끝에 237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3일 후인 2월 3일 진지강화 및 재편성을 마친 국군 제 15연대는 2차 공격을 시작하였다. 15연대장(김안일 대령)은 여명(06:00시)을 기하여 모락산을 탈취하기 위하여 연대의 모든 가용한 전투력을 집중 제 1대대는 모락산 하단 능선의 적 1개 대대 규모와 종일토록 분전하다가 날이 어두워질 무렵 수류탄과 대검이 교차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제 2대대는 제 5중대를 좌로 하여 모락산 서봉인 133고지(모린 전면 배우지)를 확보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자 갈산리 남쪽에서 2개 소대 규모의 적이 방해코자 저항하였으나 15:00시에 보전협동작전으로 적을 격파하고 이어 제 7중대도 갈산리 서쪽 무명고지를 점령하여 모락산 후사면을 위협하였다. 또한 237고지로부터 모락산 정면을 공격한 제 6중대는 제 5, 7중대의 모락산 배후 공격에 힘입어 모락산 남쪽 정면으로 돌격하여 백병전을 감행 마침내 모락산 정산의 적을 완전 격멸시켰다(1951.2.3).
이 전투 결과로 모락산이라는 중요한 고지를 점령 확보함으로써 1번 국도의 병참선 확보와 원활한 화력지원 및 지휘 통신의 유리한 상황 하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미 제 1군단과 한국군 제 1사단이 한강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든 우리시에 있는 모락산이 6.25전쟁 중 피 흘려 싸워 되찾은 격전지였음을 상기하며 우리 모두가 이 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잘 보존해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6.25는 결코 잊혀져가는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평화는 평화로울 때 지켜야만 된다.”는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만 될 때가 아닌가 싶다.
전투결과
- 중공군 663명 사살, 포로 90명 획득
- 아군피해 : 전사 70명, 부상 200 여명.
첫댓글 많은분들이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뜻깊은 행사를 위해 큰 도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