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0
7월3일[성 토마스 사도 축일/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_dNhneYOh8
(김동주 카니치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피정 센터를 찾는 분들 가운데, 수도자인 제가 부러울 정도로 진한 하느님 현존 체험 속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저한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답답해 하고 힘겨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 할 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텐데, 그래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 할 체험이 없이,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뵐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lLk4Bq2sCE
++++++++++++++++++
<두려움은 믿음을 증가시키는 발판>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이면 항상 복음은 의심 많은 토마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사도 요한과 같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고도 쉽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보다는 대부분 토마스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토마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래도 믿으려 했습니다. 그가 믿으려 한 것만으로 해서 그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이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요? 또 왜 토마스는 어떻게 끝까지 주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인하려 하였을까요? 이는 자신 안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지, 아니면 없다고 믿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자신을 그저 육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굳이 하느님을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신 안에 영혼과 같은 것이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신적인 존재를 찾으려 합니다.곧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만이 육체적인 위협을 넘어 영원한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20달러 지폐의 새 인물이 될 해리엇 터브먼은 1820년대 초 메릴랜드에서 흑인 노예로 태어난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체벌과 가혹한 노동 조건을 견디며 노예 제도의 잔인한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포기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녀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확신이 생긴 그녀는 혼자 그 길을 따라 탈출하여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확신이 생긴 그녀는 편히 지낼 수 있었음에도 13번이나 돌아와 가족들과 700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킵니다. 그래서 그녀를 흑인 모세라 부릅니다. 두려움에 맞서는 동안 믿음도 함께 성장합니다.
한 예로, 노예 그룹을 위한 탈출을 계획하는 동안 터브먼은 그녀에게 앞에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하느님의 환상을 받았습니다. 평범하고 빠른 경로를 택하는 대신 그녀는 그룹을 더 길고 위험한 경로로 이끌었습니다. 그날 밤 원래 경로가 노예 포수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자유로 이끄는 것과 관련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그녀의 믿음과 기도가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 인간이 있고 영적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 신학교 때도 귀신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무서워서 잠도 못 자다가 결국 신학교를 나간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육체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육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주 쓸모없습니다. 썩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탄이 두려움으로 우리를 잡아놓으려 한다는 것을 신학교 때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저도 성체조배 하는데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귀신을 본다는 사람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먼저 권고합니다. 기도로 두려움을 이기면 부활한 주님을 만납니다.
토마스는 도망을 쳤어야 맞습니다. 사도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는 영혼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면 신앙이 생깁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음을 증가시키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의 문 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를 가면서 매일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짐을 다 정리해서 버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권, 스마트폰, 지갑’입니다. 다른 것들은 혹시 깜빡하고 놓고 나와도 되지만 ‘여권, 스마트폰, 지갑’은 반드시 챙겨야 하는 목록입니다. 저녁에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호텔로비에서 ‘열쇠’를 받게 됩니다. 이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WiFi’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순례자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합니다. 가이드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선인터넷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순례자들은 무선인터넷에 접속한 후에 방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기도 하고, 낮에 들었던 성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도 하고, 순례 중에 찍었던 사진을 단체 카톡 방에 올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접속이 되더라도 속도가 느리면 사진을 나누기도 어렵고, 메일을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다음 순례를 준비합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직원에게 확인하기도 하고, 애꿎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탓하기도 합니다.
저도 순례 중에 가능하면 ‘WiFi’에 접속을 합니다.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기사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다지 필요 없는 메일이지만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합니다. 순례 중에도 매일 묵상 강론을 나누려고 합니다. 순조롭게 무선인터넷에 접속이 되고 강론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어떤 호텔은 ‘WiFi’의 속도가 느리거나 아예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순례를 준비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애꿎은 컴퓨터를 탓하기도 합니다. 컴퓨터가 오래 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참에 컴퓨터를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WiFi’에 접속하면 컴퓨터는 그동안 자신이 억울했음을 드러내듯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저도 아직은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를 보면서 입가에는 웃음이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10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정보를 찾아내고, 메일을 검색하듯이 예수님과 접속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용기의 꽃이 활짝 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했던 토마사도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예수님과 접속하고 싶습니다.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처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접속한 동료들이 부럽기도 했고, 예수님과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었습니다. 토마사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WiFi’에 연결되지 못해서 정보를 검색할 수 없었던 것처럼 토마사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해서 여전히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내 옆구리를 만져보아라!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 예수님과 접속한 토마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능력, 재능, 업적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비밀번호가 있으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골짜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의 믿음은 또 다른 ‘WiFi’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토마사도는 그 믿음으로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근심, 걱정, 불평, 불만이 있는 하루였다면 ‘믿음’의 ‘WiFi’를 다시 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희망과 기쁨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스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될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토마스는 우리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분이 정말로 부활하셨다고 믿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 때문에 토마스 사도가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 말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바라는 말로, 즉 “나도 정말로 믿고 싶다.”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요한 11,16)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자(요한 14,3-4),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기도 했습니다.(요한 14,5) 아마도 토마스 사도는 적극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 같고, 언제나 항상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도, 미리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 우선 먼저 사도들 쪽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토마스 사도에게 전해 줄 때, 사도들 쪽에서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전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부활에 대해서 ‘반신반의’ 했던 사도들이 있었습니다.(마태 28,17)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토마스 사도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동료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했으니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혹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면, 믿음을 증언하지 못하고, 증언한다고 해도 그 증언에는 힘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토마스 사도가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인가?”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 몸의 상처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바로 앞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사도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19-20) 그래서 토마스 사도의 말을,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 몸의 상처를 직접 보고 싶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신 것은,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신 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토마스 사도 덕분에, 예수님의 부활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있었던 토마스 사도가 믿게 되었다는 일 자체가, 또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일 자체가 예수님 부활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특히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았지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보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이 말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며, 믿음은 우리 희망의 토대이다.”라는 뜻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은 동료들의 증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겠다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중요한 사도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개인을 넘어 그 당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과 토마스 사도의 대화를 보면 마치 부활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은 이들을 겨눈 말씀처럼 들립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시대를 뛰어넘는 부활 신앙에 대한 초대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의구심을 버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신앙 고백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주님이자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최고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부산교구 이상일 다두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서 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그 뜻과 상관없이 사람은 답을 알고 살고자 하는 속성이 강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답이 정확히 안보이면 의심도 하고 그 길을 가기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합리성과 의문들을 통한 명확성의 추구는 세상을 발전 시켰고 이 시대의 삶의 필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도 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생활이 합리성과 명확성아래에서만 성장되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은 사람 기준의 합리성과 명확성안에 다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우리 인간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던지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투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콩나물 뿌리는 물이 부족할 때 더욱 깊이 내리고 비온 뒤의 하늘이 더욱 맑아지듯이 마찬가지로 인간이 답을 찾을 수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더욱 하느님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고 신앙인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느낄 수 없는 어둠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려는 자신의 투신을 통해서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두신 신앙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한 토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우리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의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실까?
예수님이 정말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이 세상의 어둠과 고통이 왜 이렇게 많은가?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토마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의 그 신비를 나의 삶 속에서 더욱 깊이 체험하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끼기에 늘 희망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활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한가운데 오셔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문을 닫아걸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를 우리에게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와 있듯이 모퉁잇돌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이루는 우리가 제대로 잘 서있도록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거룩한 성전을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는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향하여 잘 서있어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가 소중하듯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집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이 안계실 때일수록 자녀들은 조금은 불안하지만 더욱 잘 지내야 하듯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잘 느껴지지 않는 고통과 불안한 상태에서도 더욱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불안에 떨던 제자들처럼 마음에 문을 닫아걸고 있었던 순간이 어떤 때였는지 돌아보면서 우리 한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회 류해욱 요셉 신부님]
<토마스의 고백>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가 듣는 복음의 내용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던 토마스의 불신과 주님을 뵙고 나서 이어지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는 고백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 이층 다락방에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지만 거침없이 그 방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여러분도 제자들과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평화의 은총이 가슴에 흘러넘치도록 청하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온화한 미소로 못 박힌 자리와 창으로 찔린 자리를 보여주시며 당신이 그들의 스승임을 확인시켜주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을 함께 느끼십시오.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에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외치는 토마스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옵니까?
토마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자로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가자.” 고 하셨을 때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처형을 당하자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한때 “죽으러 갑시다” 라고 큰소리 쳤었던 일을 생각하면 동료들에게 면목도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커다한 슬픔에 빠져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요.
하지만 종내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동료들에게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주님을 뵌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스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스는 열정적인 만큼 회의론자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회의하고 의심하면서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의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토마스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십시오. 또한 토마스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다음에는 철저하게 주님께 투신합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온 마음으로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는 토마스의 투신에 오래 머물러보십시오.
여러분도 토마스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숱한 의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은총을 체험할 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기로 해요.
=====================
[대구대교구 박병래 안토니오 신부님]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은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기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유다인으로 베드로 사도와 같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사도로 불린 열 두 사도 중 한 분입니다.
토마스 사도에 관한 내용은 주로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들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없었던 그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함으로써 토마스 사도의 확실한 성격과 약한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 믿으려고 하는 현대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사도는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고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큰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더욱 명백히 지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처럼 약하고 신앙이 깊지 못함을 입증해 보였지만, 부활한 주님께서는 토마 사도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전교하다가 우상 숭배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창에 찔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의심의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신앙을 고백한 토마 사도를 떠올리며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하셨으니 지금 믿고 있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 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처음으로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했을 때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했고 또 자신도 없어서 마음만 먹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나이 들어서는 할 수 없겠다 싶어서 30대 중반에 갑곶성지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튼튼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대전까지 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자주 가는 선배 신부님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의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푹 쉬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들어가니 허름한 정형외과가 눈에 보였습니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고생한다면서 냉커피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았습니다. 약사 선생님 역시 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생한다면서 약값을 깎아주십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곧바로 ‘사람 만난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자전거 탄 것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으로 힘든 것도 잊고 목표했던 부산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계속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를 잊게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거부하면서 고통과 시련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불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어쩌면 불신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 곧바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서,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먼저 해결해달라며 불평불만 속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과 만남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자기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만남 그리고 이웃과 만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나이다>
요한 20,24-29 (예수님과 토마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나이다>
당신
나에게
보이지 않아
나
당신을
보지 못해도
당신
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나이다
당신
나에게
보여주지 않아
나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
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나이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씨름인 의심>
제 생각에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의심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믿음의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완전한 불신의 존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심이란 불신과 다릅니다. 불신이란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의심이란 믿지만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반신반의가 바로 의심의 정확한 뜻입니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반신반의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반신반의의 존재가 인간이지만 다름이 있다면 불신을 선택하고 불신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기로 하고 믿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 사도가 의심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을 고백하였으니 의심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 그는 의심이 불신 쪽으로 쏠렸던 적이 있습니다. 여드레 동안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었고 왜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제자단을 떠난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그들처럼 제자단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믿었던 주님이 죽음으로 끝장나자 실망을 넘어 절망하였을 것이고, 주님께 대한 희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니 더 이상 제자단 가운데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단을 떠났던 그가 여드레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돌아와서 한 말을 보면 아직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의심하지만 의심이 불신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고 어떻게든지 믿어야겠다고, 적어도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지는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불신의 그룹에는 속하지 않고 믿음의 그룹에 속하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단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도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불씨를 끄지 않으려고 서로 의지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불신 쪽에서 믿음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돌아온 것뿐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믿음으로 온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의심은 믿고 싶은 의심이자 믿기 위한 과정의 의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자 의심은 의심을 거치지 않은 믿음보다 더 단단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의심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였듯이 믿음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씨름이 격렬할수록 믿음은 단련이 되고 단단해지겠지요? 우리도 믿음의 씨름인 의심을 시시하게 하지 말고 대단하게 하면 어떨까요?
토마스 사도의 반만큼이라도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교회 공동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1.
2년전부터 제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귀입니다.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하느님이 참 좋은 선물이 공동체요 공동체를 통해 받는 축복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배우는 겸손입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도 ‘신의 한 수’와 같은 선물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제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선물이란 깨달음과 동시에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선물중의 선물이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부단히 배우면서 참나를 형성해 갑니다. 공동체내에서 상처도 받지만 공동체로부터 받는 위로와 치유, 축복의 구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제 마침 구입했던 개신교 저명한 목사인 이정배 교수의 “스승의 손사래”라는 책을 독료했습니다. 신학 50년 여정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으로 얼마나 많은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복된 존재인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스승들과의 만남의 부족을 간접적으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스승들을 만남으로 보완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의 스승은 주 예수님이요 여기 공동체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도 참 다양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했다는 교회 전승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토마스가 있기에 얼마나 역동적인 주님의 제자 교회 공동체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토마스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일주전 전례모임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고백에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의 답변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인지, 바로 이것이 토마스의 장점입니다. 토마스 덕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서의 공동전례 모임시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변하여 문이 된 기적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다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고 빼앗아 올 수도 없고 거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이어지는 토마스의 고백과 주님의 답변을 통해 제자들은 크게 배우니 그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에 참석할 때 마다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처럼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 귀한 고백을 배우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평생 지니고 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과 더불어 평화의 축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런 분위기에서 쓰는 강론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살아 활동하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대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체험입니다. 공동체 하나하나의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 얼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 공동체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혈연을 뛰어넘어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회 성원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고맙고 영예로운 축복도 없습니다.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멋진 고백을 통해 교회의 참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있는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교회공동체, 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교회공동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지요!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공동체요 하느님의 거처로 성장, 성숙 중인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생활 자체가 파스카 주님의 체험이요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밖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에서 만나야할 주님이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를, 교회 공동전례를 사랑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시어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십니다. 아멘.
*AMEN(아멘)이란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Agree with God
(하느님 말씀에 동의하고)
Move with God
(하느님과 함께 움직이고)
End with God
(하느님과 함께 끝내고)
Never doubt God
(하느님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AMEN!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온전하게 믿자!'
오늘 복음(요한20,24-29)은 '예수님과 토마스'에 대한 말씀으로 '토마스의 불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전에도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토마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예수님께서 그런 토마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믿음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이제와 영원히 부활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도, 곧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세 번씩이나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했는데... 우리의 힘듦(믿음의 약함)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믿고 있는가?'
'믿음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 힘든 이유는 믿음의 본질을 온전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활만 믿고, 그 부활만 바라고 있지, 그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온전하게 믿고, 온전하게 부활 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qbd4X_jpMc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 27)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잘
보이지 않는
상처라는
은총입니다.
잘나낼 수 없는
상처의
마음입니다.
상처도 지나가는
여정중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상처를
입으십니다.
사랑이 상처임을
배웁니다.
상처가
사랑이 됩니다.
상처또한
감사가 됩니다.
상처를 통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상처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상처
십자가의
성숙입니다.
함께 이 길을
걷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과
감사의 날 되십시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