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이쯤되면 뻔뻔해져서 어느 자리에 가서든지 편하게 무슨 얘기라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짧은 시간에 축약하여야 할 자리여서 그런지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아동학대 예방에 관한 기념식에서 저는 가정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동학대의 장소는 많은 경우가 가정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동 인격의 성장 발달에 있어서 가정교육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고 아동학대와 가정교육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는 것이 하나의 단초가 될 것입니다.
요즘의 슬픈 현상들에 관한 기가막힌 학대의이야기들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은 귀한 얘기를 공개하겠습니다.
바로 저와 엄마의 얘기입니다.
저는 중학교 일학년 한 학기를 학교 수위실에서 기거하였습니다.
생후 9개월에 소아마비에 걸려 지금 70살까지 한번도 1m를 달려보지 못했습니다. 국민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머니는 저를 업고 등하교를 하셔서 남자학교에서 성인 여성이 졸업장을 타고 아들과 함께 동기동창이 된 분은 저의 어머니뿐 일겁니다.
국민학생이었을 때에는 가벼워서 비교적 쉬우셨을 겁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개를 넘어 등하교를 시키시기에는 점점 무거워져가는 아들이 버거우셨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 가까이에 있는 학교 진학하기를 고집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완강히 거부하셨습니다. 사춘기를 맞이할 저의 정서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하셔서 였겠지요. 그래서 저를 업고라도 등하교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조그마한 여성이셨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큰 분이셨죠.
그리고 생각하신 것이 학교 수위실에 기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커다란 학교의 수위실 생활은 무서웠고 바람부는 날 강당 옆에 있는 화장실을 다니는 것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지면서 달이 밝으면 학교 정원 소나무밭 벤치에 앉아 달구경도 많이했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쓸 수있는 감수성의 환경이 어릴 적부터 키워진거죠
가난해서 시골의 이모할머니댁에 위탁되어 길러졌고
결국 가난과 장애가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생각하며 살게 하여서 저를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고 작가가 되도록 만들게 된거죠.
엄마도 제가 보고 싶으셔서 수시로 학교에 다녀 가시고 하셨죠. 그러면서 한 학기동안 엄마의 등은 곧게 펴실 수 있으셨죠.
그러다 어느 선생님 한 분이 교장선생님께 고자질을 하신거죠. 학생이 수위실에 기거하며 하숙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수위실에서 쫓겨나고 엄마는 저를 다시 업는 고행을 시작하신거죠.
그렇게 엄마는 자기 희생으로 못난 아들을 사랑으로 감싸셨죠.
그러나 무조건 안기만 하신 것은 아니었죠 잘못이 있으면 모질게 나무라셨죠. 다른 아이들이 저를 놀려서 싸우기라도 하면 엄마는 그아이의 부모에게 사과를 하셨죠. 저는 억울하고 서운하기도 했어요.
엄마가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였죠.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