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가득한 국까 일빠 성향의 게시물들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일본군에 자원한 조선인 청년들이 수십만이나 되었다고 하는 소리들이 있네?
별로 가고 싶지는 않지만, 오유 역사 게시판에서 가져온 글들로 한 번 대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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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1910년 1742만명정도로 인구가 추정되며 1944년 25120174명으로 2512만명으로 인구는 늘어난 반면
1927년 ~ 1931년간 총생산량의 42%인 660만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고 당시 식량생산량을 보면 말그대로 수탈 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안됩니다.
인구는 50%가까이 늘었는데 식량의 40% 빼앗긴것이 굶어죽기 직전이 아니면 뭐랍니까...
1930년엔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농업공황이 발생, 미곡 가격이 대폭락하고 소농과 소작농 계층의 부채비중이 급등하였으며, 39년 식량 통제가 발효되었고 41년부터는 공출이 시행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농촌은 지옥도를 방불케 했습니다. 일제 시대 내내 이랬던 것은 아니지만 저 표가 보여주는 시기엔 분명 그랬습니다.
애초에 저 표가 보여주는 시기는 일본 본국조차도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생필품 부족으로 아비규환이던 때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농촌이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겁니다.
참고로 30년대에 잠시 미곡 가격이 회복되고 농촌 경제가 나아지는 반등기가 있긴 한데, 그게 37년이고 1년도 안 가 짧게 끝납니다. 공교롭게도 저 표는 딱 38년부터 보여주고 있군요.
참고로 30년대에 잠시 미곡 가격이 회복되고 농촌 경제가 나아지는 반등기가 있긴 한데, 그게 37년이고 1년도 안 가 짧게 끝납니다. 공교롭게도 저 표는 딱 38년부터 보여주고 있군요.
당시 특별지원병 자격은 1. 17세 이상인자 2. 소학교 졸업 이상자.
또한 채용시험에서는 1. 일본어(해독,작문) 2. 국사(일본사)
1936년 인구통계 2100만명중 일본어가 가능한자는 210만명으로 (10%) 실제 저 시험을 통과할정도의 실력자는 5%정도라고 볼수 있습니다.
17세 이상 20미만중 가능한 이것이 가능한 인구는 9만7천명으로 여성을 제외한 경우 55% 하여서 5만명 즉 1936년에 5만명이 조선에서 모조리 강제징용하였을때 일본군으로 사용가능한 군인자원입니다.
그렇다면 왜이렇게 지원자수가 많으냐???
가능한놈은 최대치가 5만명인데 10~20만명이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한 방법이 잇으니 황국정신!!!
지원병의 숫자가 애국심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하고 마구자비로 지원을 받아준겁니다...
지원자 수를 늘리기 위해서 선전, 광고 심지어 강요까지 하게 된겁니다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特島月報] 1941年 11月號) ; [第81回 帝國 議會 貴族院予算委員會 第3分科會議速 記錄] 第2號 (1943年 2月 26日字)
따라서 지원자원은 형편없었으며 그에 대한 일본 내무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1. 응모자는 진심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지원하였다.
2. 응모자 중 유식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대다수가 농촌청년이다.
3. 응모자는 좋은 조건에 유혹당하고 제대후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特高月報] (1941년 12월호), <四,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신담...;;;
곡물이 수출되었든 강제로 수탈되었든 어쨋든 사라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곡물가격은 상승하고 빈궁한 가족은 문제가 생기는거 아니에요?
무슨 만주에서 곡물이 수입되어서 문제 없다고요?
그 통계자료 보셨나요? 수탈이든 수출이든 사라진 곡물양보다 모자른 양이 수입되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당연히 문제 생기는거아니에요?
더구나 쌀은 다른 곡물종에 비해서 탄수화물 농도가 높아 높은 열량을 내는 곡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곡물과 보리나 수수같은 잡곡을 동일선상에 두고서 비교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가 알고 계시나요?';;;
그리고 이미 조선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이미 토지의 40%는 일본인 소유로 넘어간 상태에서 눈가리고 수출형태의 반출이 수탈과 다른점은 뭡니까?
1924년 통계에 따르면 전 농가 2백 72만 8천 9백 21호 중 1년에 수지가 적자인 농가는 1백 27만 3천 3백 26호로 44.6%가 매년 빚을 지고 살아 가는데 화폐보다는 조세로서 쌀을 공출해가는 상황에서 수출이라는 이름만 썻지... 약탈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당시 조선 경제 전체를 놓고 보자면 수탈이 아닌 수출이라는 주장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농민들의 생활상을 보자면(원래 '굶어 죽기 직전'이냐 아니냐가 논점이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왜냐면 저걸 평범한 대다수 농민들이 판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글쓴이의 오류는 당시 조선 농촌의 소유 구조를 간과한 데 있습니다.
네 쌀이 없으면 초근 목피로 연명만 할수있게되도 황국을 찬양해야지요 ㅋㅋㅋ
1937년에 중·일 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육군 특별 지원 명령을 칙령으로 공포하여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지원병의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강제 모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친일파와 친일 단체들을 동원해서 지원병 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지원병을 대대적으로 증모하기 위하여 선전대의 조직, 지원병 후원회와 전국 경찰의 동원 등으로 지원병 수를 할당하는 등 강제 모병을 노골화하였다.
또, 일제는 1943년에 해군 특별 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육군의 경우와 같이 강제 모병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청년들을 그들의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하였다. 또, 학병제를 실시하여 전문 학교 이상의 학생과 졸업생들을 전쟁터로 끌어 갔다. 이와 같은 각종 수단으로 일제가 동원한 인원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후에 패망한 일본정부의 복원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육·해군 21만여 명과 군속을 합하여 모두 38만여명을 동원하였고, 이 중에서 약 15만 명이 1953년까지 귀환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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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이가 없음.
그 시절은 '지원병이라고 쓰고 강제징병이라고 읽는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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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이 지원병일 뿐,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되어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말같지도 않은 소리로 호도질하는 꼬라지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몇 자 적습니다.
半島人(はんとうじん,hanto:jin) 즉, 반도인이란 명칭을 "타민족으로서가 아닌 지역적 의미의 호칭"이라며 미친 개구라를 까고 있는데, 지역적 의미의 호칭이 아니라 엄연히 일본놈들이 본토(열도)와 구분하고 얕잡아 부르는 인종 및 민족 차별적 호칭입니다. 朝鮮人(ちょうせんじん,cho:senjin) 즉, 조센징이라는 호칭 그리고 이에 준말인 鮮人(せんじん,senjin) 즉, 센징과 같은 맥락의 표현입니다. 어디서 쥐약을 팔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위에 몇 분이 언급하셨듯이 말로만 지원병이고 의무적으로 지원해야 하기에, 지원 안 한 조선사람은 주위에서 충동질이 짜증날 정도였고, 버티다 버티다 급기야 순사새끼들한테 끌려가 뒈지게 맞고 지원서를 작성해야 했다고 합니다.
위의 당시 지원자 상황이 팩트에 매우 가깝다고 봅니다만, 결과만을 놓고 그 과정에 개구라를 섞어서 팩트를 호도하고,
"당시에는 누구나 미친듯이 지원했으니, 국민의 대다수가 일본에 환장한 친일파이며, 일본도 한국을 차별하지 않았다." 라는 뉘앙스로 마치 팩트인양 주장하고 싶은가본데, 그게 바로 뉴라이트 개종자들이 주장하는 짜증나는 개소리이외다. 다시는 어디가서 저런 개소리를 주워듣고 개수작 부리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