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음, 1.19일 엄상익 변호사가 최보식의 언론에 올린 글입니다. 가장 공평한 죽음으로의 길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을 잘 표현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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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부인이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 시골 도시에 사는 나를 찾아왔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평생 고생하며 살다가 남편이 은퇴하자 고국을 다니러 왔다는 것이다. 부인이 내게 말했다.
"저는 폐암 4기입니다. 암이 췌장에도 뇌에도 전이됐다고 그래요. 그래서 남편과 여행을 오게 됐어요. 바다가 보고 싶어 어제 버스를 타고 속초로 와서 동해에서 잤어요."
말하는 그 부인의 무겁고 어두운 마음이 느껴졌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40대 중반일 때 나도 암을 통보 받은 적이 있었다. 공중에 걸려 있는 줄다리를 건너가다가 발판이 없는 곳을 헛밟고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주위에 존재했던 세계가 갑자기 증발하고 나는 벌판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막막했었다.
먼 길을 찾아온 걸 보면 그 부인은 내게서 뭔가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서 온 것 같았다. 나는 암 수술은 받아봤지만 죽어보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말해줄 게 없었다. 한마디를 해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는데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지금부터 이십 년 정도 지나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로 옮겨 가서 거기서 웃고 떠들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백년 후면 지금 살고 있던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없어지지 않을까요. 빠르건 늦건 모두 저세상으로 옮겨가는 데 다섯살 아이와 칠십 먹은 노인의 죽음이 따지고 보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 앞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은데 말이죠.”
우리 모두 짧은 세월을 살다가 가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불쑥 작별이 다가오는데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사람마다 외로운 인생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의문이다.
문득 이십여년 전 폐암 4기로 죽은 부산에 살던 사촌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엑스레이 사진을 내게 보내면서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서울 의사들에게 한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의사인 친구에게 보였더니 남은 삶의 기간을 거의 정확히 알려주었다. 그걸 들은 형은 평소 일하던 대로 작업장에서 은을 두드려 수저를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호흡이 불편해지자 병원으로 가서 죽었다. 인간은 그냥 자기가 하던 일을 하다가 죽는 것 같다.
"남은 시간 뭘 하고 싶으세요? 버킷리스트가 있으세요?"
내가 찾아온 부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저 하던 대로 계속 남편이 하는 일을 돕고 싶은 것밖에는 없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목사라고 했다. 미국에서 작은 이민교회를 이끌어왔다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남편이 되는 분에게 말을 건넸다.
“저는 평신도로서 나름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으면 영이 껍질이던 몸을 빠져나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 산다고 하셨습니다. 한 단계 진화한 몸을 받아 천사 같은 존재가 된다고 했죠. 읽어도 읽어도 죽어보지 않아서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의지가 약한 저는 그 신세계로 통하는 죽음의 터널을 바로 앞에 둔다면 두렵고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의 본체는 결국 우리의 영이 내세에서도 산다는 게 아닐까. 남편인 목사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 역시 죽음 이후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부부를 데리고 길 건너편 바다로 나가 해변을 같이 걸었다. 그리고 그들이 묵는 숙소까지 내 작은 차로 데려다주었다. 내가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이었다.
돌아오면서 몇 년 전 저세상으로 건너간 폐암 4기의 한 시인이 떠올랐다. 어둠침침한 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가면서도 그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었다. 아침에 작은 창문을 열면 이슬이 맺힌 노란 호박꽃이 너무 예쁘다고 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 매트리스 밑에 공책과 연필을 놔두고 시를 쓰다가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내게는 귀한 스승이다. 그들에게서 나는 어떻게 사는지를 배웠다. 중요한 것은 돈과 지위가 아니다. 진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나는 누구인가와 내가 하던 일이 아닐까. 무엇을 하던지 각자 하던 일이 천직이 아닐까.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소망하던 내일이다. 귀한 오늘을 선물 받은 것에 감사한다. ◆듣고계신 노래는 Earl Grant 의 The End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