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적 과학기술~세종대왕과 장영실
예순여섯 번째 이야기_자주적인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다
懸珠仰釜 技術最精
'과학 혁명'을 일으킨 세종대왕과 장영실
해시계 - 현주일구와 앙부일구
懸珠仰釜 技術最精
(현주앙부 기술최정)
현주일구와 앙부일구는, 기술이 가장 정확했다.
'과학 혁명'을 일으킨 세종대왕과 장영실
세종 시대에는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과 역량을 발휘한 '천재'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학문의 성삼문·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 그림의 안견(安堅), 음악의 박연(朴堧), 과학기술의 장영실(蔣英實), 농업기술의 정초(鄭招)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시대에 모든 분야에서 '천재'들이 발굴되어 역량을 펼쳤다는 것은, 그만큼 '천재'를 알아보는 세종대왕의 식견과 안목이 탁월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더욱이 세종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인재를 찾고,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입니다. 장영실은 아버지가 원(元)나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 신분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동래현(東萊縣)에서 관노(官奴)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출신 배경이나 신분으로 볼 때, 장영실보다 더 천(賤)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의 출신배경과 신분이 아닌 재능을 보았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이 지닌 탁월한 과학기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상의원별좌라는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세종대왕의 적극적인 보호와 지원 아래에서 장영실은, 세종이 구상한 '과학 혁명의 계획'들을 하나 둘씩 현실화시켜 나갔습니다. 이 시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을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종의 과학에 대한 구상과 의지 그리고 장영실의 뛰어난 기술 역량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종과 장영실이 합작해 만든 최초의 작품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였습니다. 자격루는 장영실이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쫓아가, 보고 들은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만들었습니다. 비록 완벽한 발명품은 아니었지만, 이 물시계를 시작으로 장영실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한 차원 발전시키는 각종의 과학기기들을 쏟아냅니다. 세종과 장영실이 내놓은 주요 발명품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자격루 → 간의대(簡儀臺 : 천문관측대) → 앙부일구(仰釜日晷 : 해시계) → 현주일구(懸珠日晷 : 해시계) → 천평일구(天平日晷 : 해시계) → 정남일구(定南日晷 : 해시계) → 옥루(玉漏 : 물시계) → 측우기(測雨器 : 강우량 측정기) →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 천문 달력) 등입니다.
장영실의 주요 발명품들은 대부분 천문이나 시간 그리고 기후 등을 관측하는 기구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농업을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자 민본(民本)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 꼭 필요한 과학기구였습니다. 정확한 시간과 계절에 따른 기온과 기후의 변화 그리고 강수량과 풍향 등은 모두 농업 생산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장영실의 발명품은 사람들이 과학적인 농업과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해시계 - 현주일구와 앙부일구
세종대왕이 즉위한 지 14년째 되는 해에 만들기 시작한 천문관측대 곧 간의대(簡儀臺)는 2년 만에 완성됩니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 천체 관측 기구), 혼상(渾象 :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한 천문기기), 규표(圭表 : 동짓날의 정확한 시간과 주기를 찾아내는 기구), 정방안(正方案 : 방위 지정표)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은 간의대를 통해 천문과학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문과학의 정보와 지식을 바탕삼아 정밀도가 한층 높아진 해시계와 물시계 그리고 측우기를 발명했습니다.
이 문장에 나오는 '懸珠仰釜(현주앙부)'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발명한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뜻하는 것으로 모두 해시계입니다. 해시계를 일구(日晷)라고 부른 이유는,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나타내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세종 19년에 만들어진 현주일구는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시간을 알아보는 일종의 휴대용 해시계입니다. 크기가 요즘 담뱃갑의 1.5배 정도 크기여서, 평소 도포자락 등에 지니고 다니며 시간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현주일구를 통해 시간을 알아보는 방법은 대충 이렇습니다. 먼저 바닥을 깊게 파 물을 채운 후 고정 나침판을 띄워 정남쪽을 알아냅니다. 중심의 구멍에 한 가닥 가는 실을 꿰어 위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는 밑바닥 남쪽에 맵니다. 이 실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시계판의 눈금이 곧 시각이 됩니다. 시계판은 두 면으로 되어 있는데, 한 면은 춘분(春分)에서 추분(秋分) 사이에 사용하고, 다른 한 면은 추분(秋分)에서 춘분(春分) 사이에 사용합니다. 또한 날씨가 흐리면, 일구(日晷 : 해시계)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따로 행루(行漏 : 휴대용 물시계)를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공중용(公衆用) 해시계입니다. 즉,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제작하여 공공장소에 설치해 놓은 시계입니다. 앙부일구를 만든 목적과 설치 장소에 대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初置仰釜日晷於惠政橋與宗廟前 以測日影 集賢殿直提學金墩爲銘曰 凡所設施 莫大時也 夜有更漏, 晝難知也 ···(중략)···置于路傍 觀者聚也···(생략)···
처음으로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해 그림자를 관측했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이 명(銘)을 짓기를,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어 알 수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중략)··· 길옆에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생략)···"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愚夫愚婦昧於時刻 作仰釜日晷二件 內畵時神 蓋欲愚者俯視知時也 一置惠政橋 一置宗廟南街
어리석은 백성들이 시각에 어두워 앙부일구 두 개를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다. 무릇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하나는 혜정교에, 다른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했다.
-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앙부일구라는 이름은 시계판이 가마솥처럼 오목하고, 또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둥근 지구를 반으로 잘라놓았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오목한 시계판에는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때 세로선은 시각을 나타내고, 가로선은 계절을 나타냅니다. 해의 그림자가 세로선(시각선)을 통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절기(節氣)마다 태양의 높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가로선(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24절기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문맹(文盲)인 백성들이 많은 사실에 착안하여 12지신상(十二支神像 : 쥐·소·범·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을 그려놓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민본(民本)의 정신에 따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출처~ 한국사 천자문, 2006.12.27 실용 한자 1000자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단군 신화부터 해방과 분단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8자 한자성어 125개에 담긴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대왕과 장영실 - 예순여섯 번째 이야기_자주적인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다 (한국사 천자문, 2006.12.27,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