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고수와의 Dinner Time ⑮
-사상의학계편-
’진정한 고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허만회(21회, 68세) 한의사(제원한의원원장)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5호(2018. 4. 09)
올해 6월2일(토) 잠실보조경기장에서 ‘제9회 서울고 가족사랑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허만회 동문(이하 허동문)은 서울고 마라톤동호회준비위원장으로 본 대회를 9 년째 이끌고 있다.
허동문은 매년 개최되는 동문음악경연대회인 ‘인왕음악제’의 추진위원장이기도 하다.
또 관악부 동문들이 주축으로 결성된 ‘셀라밴드’의 단장이며, 동기회(21회)회장도 역임 중이다.
매년 두 번, 설과 추석명절에는 30여명의 체형사상학회 소속 서울고 후배들과 선물을 주고받는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허동문의 남다른 ‘서울고 사랑’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좌측부터 엄은식(56회), 정효창(46회), 이강희(65회), 김우현(65회), 허만회(21회), 길완기(44회), 이정한(46회), 김병우(49회)
참석자: 허만회(21회, 제원 한의원 원장)
길완기(44회, 봉직의), 이정한(46회, 소통 한의원 원장),
정효창(46회, 경희백세인 한의원), 엄은식(56회, 신안경희 한의원 원장)
김우현(65회,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3학년)
진행·정리: 김신기(54회, 편집위원)
일시 / 장소: 2018. 3. 14.
저녁7시 / 교대역 신태평양
젊은 시절 방황하던 나날들, 서울고에 대한 그리움 쌓여
“서울고를 졸업한 69년부터 83년까지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떳떳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서울고에서 배운 가르침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만 4번 다녔다. 아마 그 기간 동안 서울고에 대한 그리움이 쌓였던 것 같다.”
허동문은 체형사상의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믿기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토록 방황을 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먼저 학창시절이 궁금해졌다.
“고등학교시절엔 모범생 그 자체였다.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한 학생이었다. 집, 학교밖에 몰랐다. 1,2학년 때까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3학년에 올라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머리는 자신이 있었는데 더 이상 아니었다. 똑똑한 동기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노력형이라고 몇 번을 강조해 말했다. 서울고도 운 좋게 합격했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역시나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1학년 땐 미술반에서 활동했다. 당시 서울고 선배님(2회)이 선생님이기도 했는데, 과제를 제대로 못해 엄청 혼났다. 그때 ‘아, 나에겐 미술적 재주가 없구나’ 깨달았다. 2,3학년 땐 밴드부 활동을 했다. 무작정 나팔을 불고 싶어 용기를 내 밴드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주하던 모든 학생들이 나를 쳐다봤다. 반장이었던 신병호 동문이 지휘를 멈추고 왜 왔냐고 물었다. 밴드반 단원이 되고 싶어 왔다고 하자, 누군가 살며시 팔짱을 끼며 의자로 안내했다. 전대식 동문이었다. 그와 같은 악기인 트롬본을 연주하게 된 계기다. 이후 2년간 트롬본연주에 전념했다.”
허동문에게 고등학교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졸업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사실 고등학교 시절엔 한의사가 될 꿈은 전혀 없었다. 당시 법대를 희망했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범대학교 지리교육학과를 가게 됐다. 하지만 1학기를 다니고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재수를 시작했다. 의대를 가려고도 했지만 뜻대로 안됐다. 그러다가 결국 선친의 배움을 잇고자 경희대 한의대로 진학하게 됐다.”
한의대 진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손가락을 보여줬다. 어릴 적, 선친을 돕기 위해 한의원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약재를 썰다 살점이 떨어져나간 자국이라고 했다. 방황 끝에 한의대를 가게 된 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의 방황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의학은 ‘내 운명’, 명의(名醫) 허준선생부터 내려온 한의사 ‘핏줄’
“서울고 출신 중에는 엘리트들이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뛰어난 졸업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고시에 대한 꿈을 가졌다. 한의대 진학 후에도 고시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해 1학년만 다니다 고시를 시작했다. 3년동안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고시에 실패했고 군대에 가게 됐다. 전역을 하니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다. 휴학을 하지 않고 학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입학동기들은 졸업장을 옆구리에 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강의를 듣기 위해 학원 문을 지나칠 때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서울고의 가르침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학교로부터 제적이 회복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천만다행이었다. 한의학이 내 운명이란 생각을 가졌다.”
그의 선친은 대한민국 한의학 역사의 산 증인인 고송(古松) 허연 선생이다. 그는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동무 이제마(1837~1900)선생이 저술한 ‘동의수세보원’을 연구하는 모임인 ‘화요사상학회’를 창립했다. 부친이 사상의학 임상의 문을 열었다면, 아들인 허동문은 ‘체형사상학회’를 조직해 사상의학임상의 학문적 기틀을 잡았다. 인터뷰 도중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선생 (양천 허씨 20세손)이 허동문 (양천 허씨 33세손)의 조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허동문이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 한의사가 됐고, 사상의학의 대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부친과 같은 대가는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라 했다.
“선친께서는 72년부터 사상의학을 연구했다. 대학시절 선친의 어깨너머로 사상의학임상을 배웠는데, 본과 3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전수해주셨다. 졸업 후에는 선친으로부터 독립해사 당동에서 보성한의원을 개업했다. 3년간 운영하며 임상의 어려움을 깨달았고, 다시 선친의 제자로 돌아와 9년동안 전수를 받았다. 그 시간이 사상의학임상을 제대로 익히고 배우는 시기였다. 그러던 중 95년 선친께서 작고하셨다. 환자가 반으로 줄어들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공부를 제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96년 10월 ‘체형사상학회’를 만들어 교육을 시작했다.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매년 30주에 걸쳐 진행되는 강의인데 어느덧 22년째 이어오고 있다.”
사상의학을 잘 모르는 서울인들을 위해 허동문에게 사상의학이 무엇인지 물었다.
“허준선생은 피땀 흘려 동의보감(1610)을 편찬했다. 동의보감은 중국 한나라부터 명나라까지의 한의학을 총정리한 교과서다. 한국인이 중국한의학을 총정리 한 것이다. 1800년대 당시 동무 이제마 선생도 동의보감을 참고해 병을 치료했다. 그런데 같은 약을 써도 사람의 체질마다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확인하고는 맹자의 사단설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출발, 동의보감을 기초로 사상의학을 창시했다. 당시 동의보감에서는 신체를 3초(상초, 중초, 하초)로 나누었다. 반면, 사상의학에서는 4초(상초, 중상초, 중하초, 하초)로 나눈다. 동의보감이 병증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식이면 사상의학은 타고난 체질을 기반으로 병을 치료하는 맞춤의학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에게 공부란 ‘계속’해야 하는 것
하지만, 2000년초까지 딱 맞아 떨어지던 사상의학에 근거한 체질진단이 2010년이후, 잘 맞지 않았다. 마이카시대에 접어들고 대중교통이 발달했다. 직장에서 앉아있는 시간은 길어진 반면, 과잉영양섭취의 시대가 됐다. 이러한 환경변화로 사람들이 비만체형이 되면서 기존체질진단법으로는 한계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허동문은 체간측정법을 도입해 정확하게 체형을 측정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줄자로 체형을 쟀는데, 나무의 나이테를 재는 도구에서 착안해 체간측정기를 개발했다. 선친 때부터 이어온 학회(現 체형사상학회)를 통해 학문적인 토론을 거쳐 임상경험집(1~9권)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허동문은 사상의학계의 대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으로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며 겸손함을 내비쳤다.
“의학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좀 아는 것 같다고 놓으면 그때부터 퇴보한다. 인체의 신비를 한 순간에 풀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빙산의 일각임을 알게 될 뿐이다.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같다. 그래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 공부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2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서울고 후배들을 위한 삶의 노하우에 대해 물었다.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긍정적인 생각으로 풀려고 노력해야
“삶은 스트레스로 가득 차있다.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피하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다. 가만히 있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면 노력을 해야 된다. 나 같은 경우, 강의와 연구 등 공부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전히 풀고 있다. 덕분에 학문적 성과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후배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갖는 게 중요하다. 젊은 시절 방황할 때면 노먼 빈센트 필 목사가 저술한 ‘적극적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이란 책을 읽었다. 좌절에 빠질 때마다 보고 또 보고 외울 정도로 봤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다. 스트레스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꿈을 이루면 또 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는 대학졸업 후에야 서울고 동기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동기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마라톤동호회도 만들었다. 또 인왕음악제 개최를 비롯해 셀라밴드를 창단하는 등 총동창회 일에도 열심히 봉사해 오고 있다. 허동문은 서울고 일이라면 물적, 정신적, 체력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서울고사랑’은 남들에겐 지나친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사실 허동문은 서울인 편집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때는 서울고 교훈을 지키지 못해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였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서울고 역사를 만들어가는데 있어 ‘꼭 있어야 할 서울인’임이 분명하다.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울고 후배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_김신기(54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