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르노도상 수상, 페미나상 파이널리스트
“에밀리 디킨슨은 오래전부터 종이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었다.”
1800편에 달하는 시를 짓고도 생전에 단 10편의 시만 발표한 에밀리 디킨슨. 그는 바깥세상을 등지고 꽃으로 가득한 정원과 자기만의 방에서 머물렀다. 운율과 문법 등 당대 시의 정형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학적 감수성을 선보인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사망증명서 직업란엔 ‘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캐나다 퀘벡의 소설가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이 아이러니한 기록에서 영감을 얻어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재구성한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인의 유년기와 여성으로서 겪은 고난, 종이와 펜으로 오롯이 지켜낸 창작의 나날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와 시 세계가 고요히 피어나는 가운데, 소설가이자 에밀리 디킨슨 연구가인 저자의 이야기가 스며든다.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종이로 만든 마을』로 “마치 예측할 수 없는 꿈처럼 흘러가는 유려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2020년 르노도상 에세이 부문을 수상하고 같은 해 페미나상 에세이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오름으로써 그 독보적인 작품성을 증명해냈다.
언어를 사랑한 두 작가가 함께 딛고 일어선 순백의 우주
관습과 장벽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그려낸 섬세하고도 장엄한 이야기
『종이로 만든 마을』은 에밀리 디킨슨을 향한 ‘미지의 여성’ ‘은둔의 여왕’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걷어내고 시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종교적 가르침,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항하는 창의적인 사유와 굳건한 결심, 그리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 시인으로서의 신념……. 저자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각종 기록과 시인의 글을 토대로 지금껏 베일에 싸여 드러나지 않았던 에밀리 디킨슨의 다채로운 생애를 그려낸다.
『종이로 만든 마을』은 산문시와 같은 유려한 문장과 단편적인 형식에 소설적 상상력과 에세이적 문법이 어우러져, 전례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아가 곳곳에 자리한 백지가 긴 여백을 선사하는 동시에 그저 텍스트를 떠받치는 배경이 아닌 ‘종이’ 자체의 물성을 되살린다. 이는 현대의 소설가 도미니크 포르티에와 과거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 사이에 존재하는 얇고도 두꺼운 벽이자 그들이 함께 딛고 선 순백의 땅이다. 전위적인 스타일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빚어낸 본작은 “마지막 장을 덮자 마치 산자락에 걸린 구름 조각처럼 길고 긴 여운이 남았다”는 [프랑스앵포]의 평가처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울릴 감동을 선사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숨지 않았다. 은둔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기문학의 원칙을 뒤엎는 파격적이고 과감한 전개
기존 전기문학과 달리 『종이로 만든 마을』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퀘벡 출신의 소설가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마주하며 이중의 거리감을 느낀다. 이 거리감은 저자가 시인이 살았던 지역과 같은 주에 속한 보스턴으로 이주하며 더욱 극명해지지만, 자기만의 ‘집’을 찾아 헤매는 저자의 분투가 조그마한 방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일상과 포개지며 극적으로 해소된다. 곧 ‘집’은 서로 다른 삶을 산 소설가와 시인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기존에 에밀리 디킨슨을 정의하던 ‘폐쇄성’을 전복하는 문학적 공간으로 부상한다. 『종이로 만든 마을』은 이러한 독창성을 인정받아 평론가와 언론에서 극찬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는데, 이번에 출간되는 한국어판에서도 원서와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 본문을 구성했으며 두 작가가 교감한 가상의 공간을 상징하는 감각적인 표지로 단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