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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 떠난 문화기행
여왕의 계절,5월의 끝자락에 1박2일 일정으로 경주를 찾았다.
일행은 포 엠 아트(회장 이혜정)와 심정문학(회장 고종원)회원 36명ㅡ.
출발지는 서울 이었지만, 멀리 강원도와 충북 청주, 제천에서 올라온 회원들도 있고, 경기 일산이나 안양등지에서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천안에서 고 종원 교수, 박 승호씨와 더불어 세 사람이 도중에서 합류를 했다.
이러다보니 낯익은 얼굴보다는 대부분 낯선 분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문학과 시낭송, 또는 다양한 재능의 소유자들이 함께한 자리여서 매우 유쾌한 여행이 될 꺼라 믿었는데.....
이게 왠걸, 차량인솔자인 가이드가 도대체 지랄이다.
우리가 승차한 관광버스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가이드의 지시에 꼼짝없이 절대복종(?)해야만 했다.
시라도 한편 낭송을 하고, 노래 한 곡조 들어가면서 갔으면 싶은 마음들인데....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으니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고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옆자리 짝꿍인 박 노미(시낭송가, 웃음치료사)여사는 연신 가이드 뒤통수에 손가락 쌍권총 들이대며 귀여운 미소를 날린다.
그러다 어느새 대전에 도착.
원자력 기술원에서 1차 안전체험학습을 받았다.
홍보물 영상시청에 이어 원자력 기초이론 및 안전규제 관련 교육이다.
근데 교육도 참 재미없다.
무슨 강사가 저모양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기왕 자기네 홍보를 위해 막대한 경비를 써가며 실시하는 일일 탠데, 어찌 이리도 한심하단 말인가!
요즘 원자력 발전소 비리문제가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는데도 그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식이니 더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참으로 그들은 현실 불감증에 빠져 안일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듯싶다.
기술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념촬영 후, 경주 강동면에 위치한 양동마을을 찾았다.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쪽으로 달리는 도로에서 약 2km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月城 손(孫)씨와 驪江 이(李)씨 양대 문벌의 유서 깊은 양반마을로,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자,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 보였는데 양동초등학교였다.
한 옥식 기와지붕이 인상적이고, 널따란 운동장이 시골 초등학교치곤 규모가 엄청 크다.
본래 이 자리에 있던 학교는 일제 강점기 1913년에 세워졌다니, 꼭 100년의 역사가 흐른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이 마을 지형이 물(勿)자 모양의 길지여서 마을 정면에 학교를 세워 혈(血)자 모양이 이루어 졌단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 봉에 오르면 한눈에 勿자모양의 마을이 들어온다고 한다.
양동마을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특히 우리의 전통가옥들이 눈길을 끈다.
마을 안쪽으로 한창 들어가다 꼭 보아야할 향나무가 있다고 해서, 사진기자(전AP통신) 백 남식선생의 뒤를 따랐다.
백 선생은 백두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백두산사진촬영의 공로로 북한에서 명예훈장을 받으셨고, 로마 교황사진도 현지에 가서 직접 촬영하신 너무도 유명하신 그런 분이라고 황 금숙 평화대사께서 일러주셨다.
향나무가 있는 곳은 서 백당 사랑마당.
과연 거목다운 늠름한 기상이 서려있는 향나무임에 틀림없으렷다.
서 백당은 이 마을 입 향 조인 손 소(孫 昭)가 지은 월성 손 씨 종가집이란다,
건물도, 나무도 600년이 지났다고 종갓집 후손들이 답변해 준다.
이 마을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으나, 조선시대 문신 손소가 이곳에 이주해 왔고, 이 번(李 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손 씨와 이 씨의 집성촌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배경 때문에 양동은 ‘외손마을’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양동마을 출신인물로는 조선 중기 중앙의 관직을 두루 거친 손 중돈(仲 暾)과 사후 동방 5현의 한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이 언적(彦 迪)이 있다.
손 씨와 이 씨 양 가문은 서로 다른 골짜기에 자신들의 종가와 서당, 정자건물을 두고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지형이 높은 곳에 양반가옥이 위치하고, 낮은 곳엔 외거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듯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북쪽으론 설창 산, 남쪽엔 성주 봉, 마을 앞으론 양동천이 흐르고, 서쪽 산 너머엔 이 마을의 경제적 토대가 되어준 안강 평야가 펼쳐져 있어 참 복된 마을이란 느낌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자연과 수백 년 된 기와집, 나지막한 돌담길로 이어지는 멋스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남겨진 것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백 남식 선생은 열심히 사진담기에 여념이 없었고, 입구 쪽에 내려와 곡차한잔 기울인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들이었다.
양동마을 답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보문단지를 향해 달렸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단지 내에 있는 산책길을 걷기로 했다.
보문 호수를 끼고 도로 양편에 잘 조성된 조림이 참 아름다운 산책로였다.
울창한 벚나무가 꽃피는 봄철엔 화려한 꽃길로 더없이 좋다고 한다.
잠시 산책을 하고서 숙소인 Con cord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주변 호텔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경관이 마음에 들었다.
백선생과 함께든 룸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샤워를 한 뒤 곧장 식당엘 내려가니,곡차를 곁들인 제법 성대한 만찬이 준비되어 나왔다.
만찬이 끝나고서 안압지 야경이 좋다고 권하여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안압지는 신라 문무왕 때 나라의 경사를 맞아 축하연을 거행했던 동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仮山)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전하며,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접대장소로 사용된 이곳은 동서남북 약 190m규모의 인공 연못으로 원래 이름은 월지(月 池)였으나, 폐허가 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찾아들어 조선시대 안압지로 불리게 되었단다.
곳곳에 정자가 있고 아름다운 숲과 연못이 네온의 불빛에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해 주었다.
혼자 돌아다니기엔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 짝지와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며(?) 산책을 하였으니 여한이 없다해야 할는지.....?.
야경경치에 흠뻑 취해 정신을 잃을 즈음 숙소로 가야한다기에 발길을 돌렸고...
뭔가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음악회를 갖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밤공기가 약간 싸하여 준비한 잠바를 걸쳐 입고 모임 장소에 나갔다.
일행 중에 기타리스트도 있어 작은 음악회가 한층 분위기가 좋았다.
테이블에 앉은 그룹별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시낭송이며 다른 장기자랑도 펼쳐 보이며, 서로 간 친목을 도모하는 흥겨운 시간이었다.
한창 흥이 무르 익어갈 무렵, 제천의 전 미녀 여사가 등장을 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전여사의 시낭송이라 믿는다.
나는 아직껏 들어보지 못한 시였기에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분위기에 걸 맞는 낭송이었다.
모르긴 해도 시낭송의 제조기 별명을 듣는 이혜정 선생이 했어도 그 맛을 내기는 아마 어려웠으리라...??
깜찍하고 예쁘장한 스타일에 애교넘치는 낭낭한 목소리며....
이혜정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는데....한마디로 원더풀!!
시낭송이 너무도 짜릿한 감동을 주었고, 환상적이었다고 느껴졌기에 하는 말이다.
고전적인 봄밤/박 이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 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 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 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
어째서!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고전적인 봄밤을 머릿속에 넣고 숙소에 들었다.
여인들은 박연폭포같은 사내들을 그렸을 테지만, 난 황진이가 더 생각나는 하룻밤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 아름다운 경치들을 돌아보려 산책길에 나섰다.
떠오르는 빛나는 태양, 황금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며 산책을 하노라니 기분이 더없이 상쾌하다.
어제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까지 샅샅이 돌아보고 아침 조찬을 맞았다.
자유로운 뷔페 식단인데 메뉴가 괜찮다.
식사 후엔 관광 스케줄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참고로 경주 관광을 소개한다면, 다섯 군데로 권역별 관광지역이 자리하고 있다.
첫째는 어제 돌아본 양동마을 주변으로 흥덕왕릉과 구강서원, 대흥사 등이 있는 안 강권
둘째는 경주 시내를 배경으로 하는 황룡사, 안압지, 무열왕릉, 오릉 등이 있는 시내 권
셋째는 보문 관광단지,경주세계문화 엑스포공원과 신라 밀레니엄파크가 있는 보문 권
넷째는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왕릉 등이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 권
다섯째는 감 포 해변과 감은사지 문무왕릉 등이 있는 감 포 권으로 분류된다.
우리는 오늘 감 포 해변 쪽을 돌아보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볼 예정으로 출발을 했다.
출발을 하던 가까운 주변에 아름다운 보문정이 있다기에 그곳부터 찾았다.
보문정은 보문단지 내에 있는 정자가 있는 작은 공원이며,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중 하나로 손꼽는 곳이란다.
열심히 기념사진들을 주워 담고, 전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로 명성 있는 <감 포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이 꼬불꼬불하면서도 주변풍광이 멋스럽게 잘 조화를 이룬 마치 산수화의 병풍을 펼쳐 놓은 듯싶다.
우리나라 찾고 싶은 아름다운 길을 물으니 여기저기서 하나씩 들춰댄다.
서울 양평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맞붙는 두 물 머리길, 남원에서 순천으로 빠지는 섬진강변로, 하동 쌍계사 가는 길과 남해의 해안도로, 청주의 가로수 숲길과 담양의 메다세콰이어 길, 정읍내장산에서 백양사로 넘는 단풍길, 부안격포에서 곰소 가는 길 등등.....
유흥준의 문화 답사기에 <감 포가는 길>이 소개되고, 감은사지가 표지로 등장하는걸 보면 역시 우리가 가는 이 길이 꽤 알려진 곳임이 분명한데, 필자는 불행이도 경주를 몇 차례 찾긴 했어도 이 코스는 정말 미답의 여행지라서 더욱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감은 사지는 신라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짓기 시작한 절인데,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완성시킨 절로써,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절이 없고 사지와 두 개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석탑이 신라 석탑의 원형이라고 하니 그 귀한 가치가 새롭게 느껴진다.
감은사 탑은 동탑과 서탑이 있는데, 동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고, 서탑엔 문무대왕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란다,
이들 탑은 최고의 탑으로 평가받는다 하며, 이 탑이 탑의 시초로서 탑의 어머니라 하고, 불국사 석가탑은 탑의 완성이라 말한다.
감은사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고,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작은 바위섬과 수중 못이 있고, 거기에 화강암의 대왕암(길이3.6m,너비 2.9m,두께0.9m)이 있다고 한다.
왕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여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란 유언에 따라 유골가루를 이곳에 모셨다 전한다.
감은사지와 문무대왕 대왕암을 돌아보고 원자력 발전소 홍보 관을 찾았다.
우리나라엔 영광과 고리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그리고 이곳 경주 월성에 있다고 한다.
홍보 관을 가기직전에 양식장이 있기에, 무슨 양식장이냐고 물었더니 여기에서 광어나 전복 등 바다에서 자라는 고기와 어패류를 안전하게 기르는 걸 홍보차원에서 하는 거라고 했다.
반면 여기서 길러낸 고기나 전복 등을 직원들이 직접 시식하는 시식회를 갖는다고도 한다.
그만큼 원자력 방사선에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전소 측의 자신감의 표출이라 본다.
홍보 관과 발전소 내부시설을 유리벽 너머로 관람한 후 점심식사는 감 포소재지 해변 가에 있는 횟집으로 나갔다.
몇 년째 거래하는 단골집이라고 서비스가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
물 회가 인기품목이라고 그걸 시켜주었다.
꼬득꼬득 말린 도루묵이 먹을 만 했다.
맛이 좋다고 한 봉지씩 사가지고 온 분들도 있다.
식사 후엔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을 찾았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해병대 해안 경비지역으로 민간인 통제구역인데, 군이 철수함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관광의 길이 열렸다고 한다.
주상절리란 용암이 흐르다가 바닷물과 만나면서 굳게 되어, 육각기둥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이란다.
이곳 주상절리는 국내 최대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향후 유네스코자연유산등재를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기묘하고 웅장한 바위모양이 해안의 절경과 조화를 이루어 좋은 관광자원이 될 듯싶다.
신기하게 우뚝 서있는 형상이 있는가하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놈, 반듯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녀석도 있고, 부채꼴 모양을 한 그런 형상도 있다.
부채꼴 형상이 마지막 코스라기에 거기까지만 돌아보고, 해변에 내려가 보니 해산물이 널려 있었다.
고동과 조개를 잡는 여인도 있어, 나는 다시마를 뜯어서 먹어보았더니 먹을 만 했다.
이런 저런 해변의 추억을 뒤로하며 다음 목적지 불국사가 급했다.
그런데 불국사를 가는 줄 알았더니 차를 정차한곳은 동리목월 문학관 아닌가!
불국사를 돌아보려면 시간도 넉넉지 않은데다, 우리일행들이 동리목월문학관을 지나친다면 아니 되겠기에 행선지를 바꿨던 것이다.
이곳 문학관은 경주가 낳은 문학의 거장이신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시인을 동시에 모시는 기념관이다.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시인의 만남은 같은 동향인이라는 끈끈한 정도 있지만, 김 동리선생이 1935년 소설 <화랑의 후예>가 조선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이듬해 또다시 <산화>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박목월에게 큰 자극이 되고, 이를 계기로 서로 교류하게된 것이 두 분이 가까워진 동기라고 전한다.
김동리는 목월보다 세 살 위의 선배로써 1913년 출생하여 향년 81세를 사시는 동안 수많은 명작을 남기신분이다.
소설,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밀 다원 시대/ 화랑의 후예/ 사반의 십자가 등을 위시해서 수필과 시집 등 많은 작품들을 쓰셨다.
박목월시인은 1916년 출생하여 향년 62세를 사셨는데,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 하리만큼 <국민시인>이란 애칭을 들어온 청록파의 대표적 시인이다.
청록파라하면 박두진과 조지훈을 목월시인과 함께 동류의 시인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인데, 수주 변영로의 樹자의 木을 따오고, 김소월의 月을 차용하여 목월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박목월의 대표 시에는 우리가 어릴 적 많이 불렀던 <송아지>를 위시해서, 뻐꾸기/ 흰 구름/ 청 노루/윤사월/ 나그네/ 그리움 등의 시가 있는가 하면, 요즘 많이 애송되는 <어머니의 언더라인>도 있다.
어머니의 언더라인에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있는데, 목월선생의 장남이신 박 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께서 최근 증언하신 어머니에 대한<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라는 글에서 뭉클한 감명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동리와 목월, 두 거장의 문학동반자의 자취를 돌아보고, 1박2일의 경주여행을 마무리했다.
경주는 우리나라 천년왕국의 고도인 만큼 돌아볼 곳이 너무도 많은데 다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도 크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에서 <고전적인 봄날>을 만나게 된 걸 여행의 백미로 삼고 싶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러거나 저러거나 왜 지랄이야!
내가 좋다면 좋은 건 데..... 왜?
바로 이대목이 이번 여행을 오래도록 추억 속으로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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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자상하게 기행문을 쓰셨군요`
좋은곳,
아름다운님들과 함께 잊지 못할 추억 가득 담아 왔네요
우리 효행시인이신 이성우시인님께서 동행하셨기에
글을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지루한글 다 읽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광장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께서 읽어보셨군요.
함께하신 추억 잊지않고 있습니다.
종종 카페에서 만나뵙겠습니다.
파란 하늘님
사랑합니다
경주이야기 반갑네요,,,,,경주가 시댁인지라,,,,,,,,
추운날씨 이지만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