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이 길을 가는 이유
로잔 4차 대회를 위한 뉴욕 국제 리더쉽 회의 L4NY가 시작되었습니다,
회의나 집회 때에 졸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시차적응에 애를 먹습니다.
여전히 밤잠을 낮잠자듯 하고 낮이 되면 깜박깜박 졸게 됩니다.
몸에 익은 생활 패턴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절감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도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삶이 몸에 익은 것입니다. 힘들어도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며 매일 일기를 기록하려는 것은 주님께서 제 영혼에 빛으로 비추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왜곡된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제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삶의 통제권은 계속하여 제가 쥐고 있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람의 영적 상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을 다 지키지 않아도, 네 삶을 완전히 맡기지 않아도 된다. 내게 순종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으니 너는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라. 네 죄값을 내가 다 치렀다는 것만 믿으면 꼭 내 말대로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애통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니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가 맺힙니다.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게 붙어있으라” 말씀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저절로 붙어 있게 되지 않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절로 주님 안에 거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말씀하실 이유도 없으셨을 것이고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바깥에 버려져 마르나니”라는 말씀도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은 이러봐도, 저리봐도 악당입니다.
악당이 주인공의 손에 죽임을 당하면 관객들은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 악당은 그렇지 않습니다.
쾌락을 주고 재미를 주고 성공을 주고 탐욕을 채워주는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나 우상숭배해야지’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우상숭배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매 순간 예수님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애써서 자기가 부인되고 노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의 초점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저절로 자기 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황홀한 일입니다.
결코 비참한 느낌이 아닙니다. 아니 감사하고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점점 믿음을 지키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